회색빛 노을이 지평선 너머로 저물어가는 시간, 폐허가 된 도시의 뼈대만이 앙상하게 드러난 옥상 위에서 지우는 차가운 금속 총신을 매만졌다. 익숙한 무게감이 손안에서 어둠처럼 번졌다. 망원 조준경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언제나 그랬듯 침묵과 죽음으로 가득했다. 바람이 휘잉, 하고 귓가를 스치며 삭막한 콘크리트 잔해의 냄새를 실어 날랐다.
그녀의 시선이 아래층, 무너진 백화점의 한구석에 자리 잡은 작은 은신처로 향했다. 그곳에는 그녀의 유일한 피난처이자, 동시에 가장 큰 위험이 존재했다.
“오늘은 별일 없네….”
지우는 작게 중얼거렸다. 어깨에 짊어진 소총의 무게가 납덩이처럼 느껴졌다. 사방이 적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그녀의 정신을 갉아먹는 것은 단순히 좀비들의 위협만이 아니었다. 내부에 도사린,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더 깊은 상흔을 남겼다.
수십 미터 아래, 유리 파편과 흙먼지가 뒤섞인 공간에 그는 앉아 있었다. 햇빛 한 조각 제대로 들지 않는 곳에서도 그의 존재감은 어둠 속의 불꽃처럼 선명했다. 카이. 그의 이름은 지우가 직접 지어준 것이었다. 그에게는 이름조차 없었으니까.
그는 여느 감염자와는 달랐다. 짐승의 굶주린 눈빛 대신, 깊이를 알 수 없는 고독이 어린 시선이 때때로 지우를 향했다. 썩어 문드러진 피부 대신, 창백하고 메마른 살결이 그의 근육질 몸을 감싸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지우를 해치지 않았다. 오히려, 지우를 지켰다. 수없이 많은 밤을, 수없이 많은 위험 속에서.
지우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발소리가 텅 빈 공간에 울려 퍼질까 봐 발끝에 힘을 주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갈수록 공기는 더욱 차갑고 습해졌다. 마지막 계단을 디뎠을 때, 그녀의 눈앞에 카이가 나타났다. 그는 늘 그렇듯 그림자처럼 어둠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
그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짐승의 눈과 같았다. 하지만 그 시선은 지우를 향할 때만큼은 맹목적인 적의가 아닌, 복잡한 감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갈망, 불안, 그리고… 알 수 없는 종류의 애착.
“카이.”
지우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하루 종일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은 탓이었다. 카이는 고개를 들어 지우를 보았다. 그의 창백한 입술이 미미하게 움직였다.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지만, 지우는 그가 자신을 부르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우는 조용히 그의 옆에 앉았다. 묵직한 소총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녀는 카이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피부는 종잇장처럼 얇았지만, 뼈대는 강철처럼 단단했다. 이 손으로 그는 수없이 많은 ‘그들’을 찢어발겼다. 지우를 지키기 위해.
“오늘도 아무것도 찾지 못했어. 물도, 식량도….” 지우는 한숨을 쉬었다. “이러다간 다 굶어 죽을지도 몰라.”
카이는 지우의 말을 이해하는 듯, 그녀의 손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는 굳건함으로 가득했다. 지우는 그 눈빛에서 묘한 위로를 얻었다. 적어도 그는 자신을 혼자 두지 않을 터였다.
그때였다.
_쩌저적!_
위쪽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굉음에 지우는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단순한 잔해물 낙하음이 아니었다. 분명, 인공적인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 그리고 이어진 둔탁한 진동.
“…이런.”
지우는 본능적으로 소총을 다시 집어 들었다. 카이의 손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의 눈빛이 경고로 변했다. 위험하다는 듯,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듯, 혹은… 다른 무언가에 대한 불안함으로.
“알아, 카이. 알아. 조용히 해.” 지우는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 천천히 일어섰다.
_쿵. 쿵. 쿵._
진동은 더욱 강렬해졌다. 그리고 저 멀리서, 익숙하고도 소름 끼치는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무리가 이동하는 소리. 그것도, 거대한 무리였다.
“젠장….”
지우는 재빨리 옥상으로 다시 올라갔다. 조준경으로 도시를 살폈다. 그리고 그녀는 얼어붙었다. 서쪽에서부터 거대한 그림자가 물결치듯 밀려오고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감염자들의 떼거리였다. 그중에는 일반적인 감염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구의 변이종도 섞여 있었다. 놈들은 마치 사냥감을 포착한 늑대 무리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쪽으로. 이 건물로!
“카이, 놈들이 오고 있어!” 지우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번엔… 수가 너무 많아. 여긴 안전하지 않아!”
카이는 이미 옥상으로 올라와 있었다. 그의 짐승 같은 후각과 예민한 청각은 이미 위험을 감지했을 터였다. 그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이빨이 드러나며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그의 목에서 터져 나왔다. 그 소리는 보통 감염자들의 으르렁거림과는 달랐다. 사나웠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지키려는 절박함이 섞여 있었다.
“어떻게 해야….”
그때, 저 아래 거리에서 놈들의 선두가 건물 입구에 도달했다. 놈들은 망설임 없이 건물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썩어 문드러진 손톱으로 벽을 긁어대며,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토해내며.
지우는 방아쇠를 당겼다. _탕! 탕! 탕!_ 총알이 놈들의 머리를 꿰뚫었지만, 놈들은 마치 흙더미처럼 쓰러지고, 그 뒤를 수많은 놈들이 곧바로 채웠다. 끝이 없었다. 그녀의 탄약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안 돼…!”
가장 먼저 건물 안으로 진입한 감염자들이 지우와 카이가 내려왔던 계단으로 향하고 있었다. 놈들의 움직임은 평소보다 빠르고, 조직적이었다. 마치 누군가 지휘하는 것처럼.
카이가 갑자기 지우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눈은 불타는 듯 붉었고, 얼굴의 혈관이 도드라져 보였다. 짐승의 본능이 완전히 깨어난 모습이었다.
“카이…?”
그는 지우를 돌아보지 않은 채, 천천히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등은 평소보다 훨씬 크게 느껴졌다. 놈들에게 돌진하려는 듯.
“안 돼! 혼자서는 무리야! 우리 둘 다 죽을 거야!” 지우는 그를 잡으려 했지만, 카이의 속도는 이미 인간의 범주를 넘어섰다.
그는 맹렬하게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에 지우는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_콰앙!_
아래층에서 둔탁한 충돌음이 들려왔다. 이어진 것은 총성 소리가 아니었다. 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찢어지는 끔찍한 소리. 그리고 카이의 낮은, 짐승 같은 포효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놈들의 울음소리와 뒤섞이며, 광란의 전투가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지우는 주저앉았다. 그녀는 망설였다. 총을 들고 그에게 합류해야 할까? 아니면, 그가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도망쳐야 할까? 그녀의 마음속에서 두 개의 상반된 본능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_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_
그는 괴물이다. 결국은. 언젠가는 그녀를 집어삼킬지도 모르는 짐승. 하지만 동시에, 그는 그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던지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녀는 그에게서 떠날 수 없었다. 아니, 떠나고 싶지 않았다.
지우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결심으로 빛났다. 그녀는 다시 소총을 움켜쥐고, 카이가 사라진 어둠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쳤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지옥 같은 비명과 포효가 가득한 어둠 속으로 그녀가 발을 내디뎠을 때, 저 아래층에서 섬광 같은 것이 터져 나왔다.
_쉬이이이익… 콰아앙!_
폭발음과 함께, 건물이 통째로 흔들렸다. 지우는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아찔한 연기와 먼지가 계단을 타고 솟아올랐다.
“카이…!”
그녀의 비명은 무너져 내리는 건물 잔해 속에서 덧없이 흩어졌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카이는… 그는 괜찮은 걸까? 아니, 괜찮을 리가 없었다. 이런 엄청난 폭발 속에서.
지우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녀는 주저앉아 무너져 내리는 건물을 붙잡았다. 공포와 절망이 그녀를 덮쳤다. 이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는 그녀는 너무나 지쳐 있었다.
그때, 먼지투성이의 어둠 속에서 한 줄기 희미한 빛이 지우의 시야에 들어왔다. 아니, 빛이 아니었다. 어떤 존재가 연기 속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거대한 그림자.
“카이…?”
지우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핏물이 흥건한 그의 몸. 찢겨나간 살점들 사이로 뼈대가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지만, 그는 서 있었다. 상처투성이였지만, 분명하게.
하지만 그의 모습은 예전과는 달랐다. 그의 몸에서는 검붉은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그의 눈은 완전히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피부 곳곳에서 솟아오른 뾰족한 돌기들이 그를 더욱 괴물처럼 보이게 했다. 그는 이전의 카이가 아니었다. 훨씬 더 강하고, 훨씬 더 위협적인, 진정한 짐승의 모습이었다.
그는 천천히 지우를 향해 걸어왔다. 그의 발걸음마다 바닥이 진동했다. 지우는 뒷걸음질 쳤다. 공포가 그녀의 심장을 옥죄었다.
“카이… 너….”
그의 입에서 낮은, 듣도 보도 못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포효이기도 했고, 고통의 신음이기도 했다. 그의 손이 천천히 올라와 지우를 향해 뻗어졌다.
지우는 총을 들었다. 하지만 차마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그의 눈동자 깊숙이 박혀 있던 그 알 수 없는 애착이, 그리고 그녀를 위해 싸우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의 손이 지우의 뺨에 닿았다. 차갑고 거칠었다. 괴물의 손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아니, 이전보다 더 깊은 슬픔과 함께 지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지우.”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한 마디. 그 안에는 그녀를 향한 간절함과, 이제는 자신조차 통제할 수 없는 본능에 대한 고통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변이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더 강력한 괴물이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시선이 지우의 어깨 너머, 무너진 건물의 잔해 너머로 향했다. 그곳에는 여전히 수많은 감염자들이 포효하며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카이는 지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몸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묘한 온도를 하고 있었다.
“도…망…쳐.”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 뜻은 분명했다. 그가 다시 한 번 싸울 것이라는 경고. 그리고 그녀를 이곳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마지막 노력.
지우는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핏빛으로 번뜩이는 그의 눈동자에서, 그녀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그림자를 보았다.
“안 돼, 카이. 혼자 두고 가지 않아….”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종족을 초월한 금지된 사랑의 끝은 대체 어디일까? 그녀는 답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심장이 그에게 속삭였다.
_함께라면, 지옥이라도._
그녀는 총을 거두고, 대신 그의 얼굴에 닿은 손을 꼭 잡았다. 그때, 건물 바깥에서 놈들의 포효가 더욱 가까워졌다. 시간이 없었다. 그들의 선택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이 될 터였다. 이 어둠 속에서, 그들은 함께 운명과 맞서야 했다.
카이는 지우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그의 눈빛은 다시 한번 놈들을 향해 불타올랐다. 이 잔혹한 세상에서, 그들의 사랑은 가장 위험한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