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활한 우주,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미끄러지듯 나아가던 ‘갤럭시아 호’의 함교에는 지루함과 졸음이 팽배해 있었다. 망망대해 같은 심우주에서 일상처럼 반복되는 항해는 그 어떤 스릴 넘치는 발견도 메마르게 할 터였다.
“현우 씨, 아직도 차트만 들여다보고 있어요? 뭘 그렇게 뚫어져라 봐요? 저번에 우주 미아 된 통신관 유진 씨 초상화 그리다가 캡틴한테 혼났잖아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어깨가 움찔했다. 현우는 황급히 스크린을 껐지만, 이미 늦은 듯했다. 그의 짝사랑 상대이자, 이 함선의 브레인인 세라 수석 연구원이 싸늘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완벽하게 묶은 올백 머리,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언제나 빈틈없는 연구원 제복. 그녀는 마치 우주 그 자체처럼 차갑고도 아름다웠다.
“아, 세라 선배님! 그게… 초상화가 아니라… 심우주 항로의 미세한 기류 변화를 분석 중이었습니다! 캡틴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현우는 횡설수설하며 손을 휘저었다.
세라는 현우의 말을 잘라내듯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그래요? 그럼 그 미세한 기류 변화가 혹시… 제 얼굴 윤곽선을 따라 흐르는 기류인가요? 아니면 제 오똑한 콧날이 만들어내는 공기역학적 효과라도?”
“크, 크흠…! 아닙니다! 절대! 전적으로! 그런 불경한 생각은… 제 미천한 두뇌에 존재조차 할 수 없습니다!” 현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경례까지 했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농담이에요, 현우 씨. 그렇게까지 경직될 필요는 없어요.” 세라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의 입가에 스치는 미소는 현우의 심장을 순식간에 요동치게 만들었다. 아, 이 미소 한 방에라면 우주 끝까지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가봤자 다시 세라 선배님한테 한 소리 듣고 있을 확률이 99%겠지만.
바로 그때였다. 함교 중앙의 메인 스크린에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삐비빅! 미확인 에너지 반응 감지! 반복 스캔 중…’
캡틴 강이 굵은 목소리로 외쳤다. “무슨 일이지? 현우, 통신장, 즉시 보고해!”
통신장 유진이 허둥지둥 패널을 두드렸다. “캡틴! 어… 에너지 반응입니다! 이제까지 관측된 적 없는 형태의… 인공물일 가능성이 큽니다! 엄청난 밀도를 가지고 있어요!”
세라의 눈빛이 순식간에 예리하게 빛났다. “인공물? 이 심우주에? 좌표 찍어, 현우. 즉시 상세 스캔 돌려.”
“예! 선배님!” 현우는 아까의 지루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의 눈에는 이미 우주선 탐사대원의 불타는 사명감이… 절반, 그리고 세라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절반이었다.
메인 스크린에 거대한 물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완벽한 구형. 검은색의 표면은 빛을 전혀 반사하지 않았고, 흡사 블랙홀의 경계선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듯했다. 아무런 문양도, 연결 부위도 없었다. 마치 우주 태초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고독한 존재였다.
“이게 뭐야…?” 정비반장 준호가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돌멩이도 아니고, 기계도 아니고… 저렇게 완벽한 구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질 수가 없는데…?”
“접근 속도를 낮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라!” 캡틴 강의 지시가 떨어졌다.
세라는 스크린에 코를 박을 듯 다가서서 물체를 관찰했다. 그녀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측정된 에너지 반응은 생체 신호도, 기계 신호도 아닙니다. 마치… 존재하는 것만으로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 표면은… 제가 아는 어떤 물질과도 일치하지 않아요. 감탄스럽군요.”
“감탄스럽다구요, 선배님? 저거 혹시 외계인들의 최종 병기 같은 거 아니에요? 우리 갤럭시아 호를 한 방에 펑! 하고 터뜨리는…?” 현우는 괜히 침을 꿀꺽 삼켰다.
“현우 씨, 상상력은 가끔은 도움이 되지만, 지금은 과학적 사고가 필요한 때입니다. 외계인의 병기라기엔 너무… 우아하지 않나요?” 세라는 현우를 흘끗 보며 말했다. 그 ‘우아하다’는 표현에 현우는 잠시 멍해졌다. 세라 선배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
“캡틴, 저 물체를 포획해서 연구실로 가져와야 합니다.” 세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캡틴 강은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위험할 수도 있다, 세라. 미확인 외계 물질을 함선 내부에 들여놓는 건….”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인류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캡틴. 이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이 될 수도 있어요. 저 물체가 주는 데이터는, 우주 문명의 이해도를 완전히 바꿔놓을 겁니다.” 세라의 설득은 언제나 논리 정연하고 강력했다. 결국 캡틴 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정비반장 준호, 포획 준비해.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뤄. 현우, 세라 연구원 보조해라.”
***
연구실은 마치 수술실처럼 팽팽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텅 빈 공간 한가운데, 거대한 구형의 물체가 중력장에 의해 부유하고 있었다. 검은 표면은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전자기 스캔, 음파 스캔, 양자 스캔… 모든 것을 동원했지만 아무런 내부 구조도 파악되지 않습니다. 정말… 비어있는 걸까요?” 현우가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세라는 물체 주위를 맴돌며 손전등으로 표면을 비춰보고 있었다. “그럴 리 없어요. 이렇게 완벽한 형태로 에너지를 방출한다는 건, 분명 내부에서 어떤 작용이 일어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준호 반장이 땀을 삐질 흘리며 중얼거렸다. “만져봤을 땐 그냥 차가운 돌멩이 같던데… 이거 혹시 그냥 엄청나게 정교하게 깎인 우주 쓰레기 아닐까요? 외계인들도 가끔 쓰레기 버릴 수도 있잖아요?”
“준호 반장님, 우주 쓰레기가 이런 에너지를 방출할 리가 없잖아요. 좀 더 진지하게 임해주세요.” 현우가 핀잔을 주자, 준호는 투덜거렸다. “쳇, 뼈대 없는 외계 돌멩이 연구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세라의 손이 문득 그 검은 구체에 닿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윙- 하는 낮은 울림이 연구실 전체를 뒤흔들었다. 구체의 검은 표면에, 마치 잔잔한 물결이 일듯 은은한 빛의 파장이 퍼져 나갔다. 빛은 무지개색으로 변하며 점차 강해졌다.
“에너지 반응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선배님, 손 떼세요!” 현우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세라의 손은 구체에 단단히 붙어 있는 듯했고, 그녀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함께… 미묘한 홍조가 떠올랐다.
그리고 현우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격렬하게 뛰었다. 혈관 속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고,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들이 통제 불능으로 튀어나왔다.
‘세라 선배님…! 지금 저렇게 당황한 얼굴도 정말 예쁘시네… 저 붉어진 뺨을 만져보고 싶… 아니, 이건 아니지! 안 돼 현우! 정신 차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세라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옥타브는 높고 떨렸다.
세라는 구체에서 손을 떼려고 애쓰는 듯했지만,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현우를 올려다보았다. 평소의 냉철함은 온데간데없고, 눈빛에는 묘한 초조함과 함께… 어딘가 부드러운 기운이 섞여 있었다.
“현우 씨… 저기… 왜 그렇게 제게 바싹 다가와요…? 혹시… 제 향기가 궁금해요…?” 세라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현우는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향기?! 세라 선배님이 지금 내게 향기를 묻고 있다고?! 꿈인가?! 아니면 우주선에 산소 결핍인가?!’
“어… 그게 아니라, 선배님이 위험하실까 봐…!” 현우는 뒷걸음질 치려 했지만, 발이 바닥에 붙어버린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세라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서고 말았다.
“거짓말. 당신 눈은 지금… 제가 입고 있는 이 칙칙한 제복 안의 비밀을 꿰뚫어보려는 것처럼 번뜩이고 있는데?” 세라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나긋나긋했고, 그녀의 입가에는 장난기 어린 미소마저 어렸다.
현우는 패닉에 빠졌다. ‘비밀?! 무슨 비밀?! 난 그냥 선배님을 동경할 뿐인데?!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을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아니, 아니지! 이건 그냥 과학적인 동경이야! 고차원적인 지성체에 대한 순수한 탐구심이라고!’
“선배님, 오해십니다! 전 그저… 선배님의 뛰어난 지성에 매료되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지성으로 외계 유물을 분석하는 모습이… 너무나… 아, 아름다우셔서…!” 현우의 입에서 필터링 없는 본심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그의 뺨은 불덩이가 되었다.
세라의 미소가 더 깊어졌다. 그녀는 현우의 뺨을 손가락으로 콕 찌르며 말했다. “어머, 제 지성에 매료된 게 아니라, 그냥 제게 반한 건 아니고? 얼굴이 새빨개졌네요, 현우 씨.”
“저, 전…! 전 그저 과학적인 흥분 때문에…!” 현우는 필사적으로 부정하려 했지만, 그의 심장은 이미 쿵쾅거리며 ‘좋아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뒤에 있던 준호 반장이 갑자기 두 손으로 구체를 붙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오, 나의 사랑스러운 스패너! 평생 너만을 사랑할 거야! 네가 닳고 닳아 못 쓰게 될 때까지, 내가 너를 닦고 조이며 함께 할 거야! 내가 만든 이 기계들도 모두 너의 미모에는 미치지 못해!”
현우와 세라는 동시에 준호 반장을 돌아보았다. 준호 반장은 스패너를 들고 껴안으며 울고불고 난리였다.
“반장님…?” 현우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세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갑자기 통신장 유진이 연구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여러분! 큰일 났어요! 캡틴이 지금 함교에서 자신의 오래된 캡틴 모자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계세요! 그리고… 그리고 밥통에 대고 ‘내 사랑스러운 쌀알들, 너희의 희생으로 내가 존재한다!’라고 외치고 계세요!”
현우는 얼굴을 감쌌다. 세라 선배의 ‘당신 나한테 반했지?’ 공격도 버거운데, 이제는 함선 전체가 미쳐가는 것 같았다. 이 외계 유물… 도대체 뭘 하는 물건인 거야?!
“이, 이거… 아무래도… 감정을 증폭시키는 종류의 유물인 것 같습니다…!” 현우가 간신히 말했다.
세라는 붉어진 뺨을 쓸어내리며 구체를 노려보았다. “감정 증폭… 그것도 억눌린 감정이나, 대상에 대한 집착을? 현우 씨, 그럼 지금 제가 당신에게….”
세라의 말끝이 흐려졌다. 현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외계 유물은 여전히 오색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윙윙거리고 있었다. 이 미스터리한 구체가 갤럭시아 호의 평범했던 일상을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로 뒤바꿔놓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현우는 자신이 생존하는 동안, 세라 선배에게 자신의 모든 ‘순수하고 과학적인 동경심’을 들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불가능에 가까운 소원이겠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