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 균열의 시작
김지훈은 퇴근 후 텅 빈 아파트에 들어설 때마다, 묘한 허전함과 함께 지쳐버린 하루의 무게를 느꼈다. 현관문을 닫자마자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던지고 소파에 몸을 파묻는 것이 일상이었다. 오늘도 다를 바 없었다. 스탠드 불빛 아래 놓인 소설책을 펼쳤지만,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회사에서 쌓인 피로와 저녁 메뉴 고민으로 가득했다.
“젠장, 라면 먹기도 귀찮네.”
작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대답해줄 사람도 없지만, 혼잣말은 언제나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거실 탁자 위에는 어제 마시다 남긴 머그컵과 태블릿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지훈은 손을 뻗어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평소 같으면 SNS를 훑거나 웹툰이나 볼텐데, 오늘은 그마저도 무기력했다.
그때였다.
‘딸깍.’
아무도 누르지 않았는데, 탁자 끝에 놓여 있던 볼펜이 저절로 굴러 떨어졌다. 지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닥에 떨어진 볼펜을 응시했다. 착각인가? 피곤해서 헛것이 보였나?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 않게 볼펜을 다시 집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잠깐 졸았나.”
다시 소설책에 시선을 고정했지만, 어쩐지 등골이 서늘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있을 리 없었다. 이 아파트는 혼자 산 지 3년째였다. 옆집은 노부부, 위아래는 신혼부부. 특별히 오갈 사람도, 찾아올 사람도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새 창밖은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지훈은 뒤늦게 허기를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 주방으로 향하려던 찰나, 거실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 위의 머그컵이 스르륵 미끄러지더니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지훈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히, 분명히 컵이 움직였다. 그것도 스스로.
“이… 이게 뭐야?”
그는 바닥에 떨어진 컵 조각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손발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머릿속에서는 온갖 비과학적인 상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귀신? 도둑? 도둑이라면 왜 하필 컵만 깨뜨린단 말인가.
지훈은 급히 휴대폰을 찾아들었다. 손이 심하게 떨려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누구에게 전화를 해야 할지도 모호했다. 경찰? 뭐라고 말한단 말인가. “제 머그컵이 스스로 움직여서 깨졌어요!”라고? 미친 사람 취급당할 게 뻔했다.
그는 어둠이 짙게 깔린 거실을 살폈다. 모든 것이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가구들, 벽에 걸린 액자, 창밖 풍경까지. 하지만 방금 일어난 일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그때, 주방 쪽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숨을 들이켰다. 분명히 냉장고 문이 닫히는 소리였다. 하지만 냉장고 문은 자신이 들어온 후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누구… 누구세요?”
목소리가 떨렸다.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주방은 어두웠다. 지훈은 거실 스탠드의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주방 입구를 응시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무언가 있었다.
“거기, 거기 누구 없어요?”
지훈은 용기를 내어 한 발짝 주방 쪽으로 다가갔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기분이었다. 손에 땀이 흥건했다. 그의 발걸음이 멈춘 순간, 주방 식탁 위에 놓여 있던 과일 바구니가 통째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과와 귤이 사방으로 굴러갔다.
‘쿵! 우당탕탕!’
이제는 확실했다. 이건 누군가의 장난이 아니었다. 그리고 자신이 미친 것도 아니었다.
“이, 이건…!”
지훈은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이 닿자 비로소 멈춰 섰다. 그와 동시에 거실 벽에 걸려 있던 액자 하나가 스르륵 기울어지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액자 속 사진은 3년 전 이사 오기 전, 친구들과의 여행 사진이었다. 액자 유리는 산산조각이 났다. 사진 속 해맑게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 마치 비웃는 것 같았다.
거짓말 같았다. 비현실적인 상황이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폴터가이스트 현상. 대체 왜 하필 자신에게?
갑자기 거실 전체의 불빛이 일제히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전기가 불안정한 것처럼. 깜빡임은 점차 빨라졌고, 결국 모든 불빛이 동시에 꺼졌다. 아파트는 완벽한 어둠 속에 잠겼다.
“흐읍!”
지훈은 숨을 들이켰다. 사방은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심연이었다. 공포가 극에 달했다. 그는 휴대폰 플래시를 켜려 했지만, 손이 너무 떨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이 번쩍였다. 그것은 바로 그의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였다. 평소에는 그저 시간을 알려주는 디지털 시계였을 뿐인데, 지금은 시계 액정 전체가 기묘한 푸른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글자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문자들이었다. 마치 고대 유적에서나 볼 법한 상형문자 같기도 하고, 이전에 본 적 없는 기이한 형태의 기호 같기도 했다.
문자들은 빠르게 변화하며, 액정 안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푸른빛이 점차 강렬해지며 그의 손목을 감쌌다. 지훈은 시계를 벗어 던지려 했지만, 손목에 시계가 끈적하게 달라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귀를 찢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아파트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진동과 함께, 어둠 속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마치 공간 자체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였다.
지훈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시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은 그의 시야를 완전히 뒤덮었다. 그 빛은 점차 희미해지며 그의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고, 마침내 그의 눈앞은 완전히 암전되었다.
마지막으로 느껴진 것은, 몸이 공중으로 붕 뜨는 듯한 기이한 부유감이었다.
그리고, 차가운 공기와 함께 낯선 흙냄새가 그의 코끝을 스쳤다.
***
*(다음 챕터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