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핏빛 장미와 그림자 복도
아셀리아 마법 학원. 그 이름만으로도 이 세상 모든 마법사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꿈의 성지였다. 웅장한 백색 대리석 건물들은 늘 구름에 닿을 듯 높이 솟아 있었고, 반짝이는 마법 결계가 학원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었다. 새벽녘이면 영롱한 무지개빛으로 빛나던 결계는 해가 지고 나면 수천 개의 별을 품은 듯 반짝였고, 밤하늘을 수놓은 마법 불꽃놀이는 매일 밤 학생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그러나 하은에게 아셀리아는 매일매일이 벅차고 버거운 곳이었다. 재능 넘치는 귀족 자제들과 타고난 천재들이 즐비한 이곳에서, 평범한 집안 출신의 하은은 늘 스스로가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마력은 고작해야 흐릿한 형상을 그리는 것이 전부였고, 가장 기초적인 소환 마법조차 제대로 구사하기 어려웠다.
“하은 씨, 또 늦었잖아!”
복도 저편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 학년 수석이자 학생회장인 ‘로젤린’이었다. 그녀의 긴 금발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고, 차가운 푸른 눈은 언제나 완벽한 질서를 갈망하는 듯했다. 로젤린의 시선은 하은의 흐트러진 교복 칼라와 엉성하게 묶인 머리칼을 스캔하듯 훑어내렸다.
“죄, 죄송합니다, 로젤린 선배님….”
하은은 무심코 고개를 숙였다. 사실 늦은 것도 아니었다. 수업 시작 5분 전, 로젤린 기준으로는 거의 ‘지각’이나 다름없겠지만.
“복장은 단정히 하고 다녀. 아셀리아는 너처럼 흐트러진 모습은 용납하지 않아.”
로젤린은 하은을 지나쳐 가며 차가운 향수 냄새를 남겼다. 하은은 작게 한숨을 쉬며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원소 마법의 이해’ 수업이 열리는 중앙 강당이었다.
오늘의 수업 주제는 ‘영혼과의 교감’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령이나 자연의 기운과 소통하여 마법을 발현하는 고등 마법의 기초. 하은에게는 그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집중해도, 아무리 손을 뻗어 보아도, 그녀의 주위엔 늘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공간, 텅 빈 마음.
“자, 그럼 각자 자신의 마법 공간을 만들어 정령과의 교감을 시도해 봅니다. 마음의 눈을 뜨고, 귀를 기울이세요.”
교수님의 나긋한 목소리가 강당에 울려 퍼졌다. 학생들은 눈을 감고 마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내 강당은 수많은 빛깔의 마법 공간으로 가득 찼다. 누군가는 싱그러운 숲을, 누군가는 반짝이는 호수를, 또 누군가는 불꽃이 춤추는 용암 지대를 창조했다. 그곳에서 작은 정령들이 춤추고 속삭이며 학생들의 마법을 도왔다.
하은은 눈을 감았다. 그녀의 마음속에 펼쳐진 공간은 늘 회색빛의 텅 빈 들판이었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 그녀는 수없이 손을 뻗었지만, 만져지는 것은 오직 차가운 공기뿐이었다.
‘나는… 뭘까. 내가 정말 마법사 맞을까?’
절망감이 그녀를 덮쳤다. 그때였다. 회색 들판 한가운데서, 아주 작고 미미한, 그러나 분명한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 따뜻함은 마치 땅속 깊이 박혀 있던 씨앗이 고개를 내미는 것 같았다. 하은은 본능적으로 그 따뜻함을 향해 다가갔다.
점점 커지는 온기. 그리고 그 온기 속에서 피어나는, 핏빛처럼 진한 붉은색.
*핏빛 장미.*
하은의 마음속 들판에, 단 하나의 핏빛 장미가 피어났다. 꽃잎은 벨벳처럼 부드러웠고, 줄기에는 가시 대신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 그 순간, 장미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녀에게 속삭였다. 아주 오래된, 그러나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이곳에 오라.”*
하은은 눈을 번쩍 떴다. 주위 학생들은 여전히 자신의 마법 공간 속에서 정령들과 교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은은 더 이상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오직, 귓가에 맴도는 장미의 속삭임만이 그녀의 의식을 지배했다.
‘이곳에… 오라니? 어디로?’
심장이 격렬하게 두근거렸다. 마력은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었고, 그 마력은 특정한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처럼 그녀를 이끌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하은은 홀린 듯 강당을 나섰다. 핏빛 장미가 이끄는 방향은, 늘 학생들이 피하는 학원 서쪽 끝, 오래된 ‘별들의 도서관’ 방향이었다. 도서관은 거의 폐쇄되다시피 한 곳으로, 금서들이 보관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발소리조차 흡수할 듯한 고요함이 감도는 복도를 따라 걸었다. 창문 너머로 드리워진 석양은 핏빛 장미의 색을 닮아 있었다. 마침내 낡고 육중한 도서관 문이 나타났다. 철제 문고리에는 녹이 슬어 있었고, 퀴퀴한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여기… 정말 아무도 안 들어가는 곳인데…’
주저했지만, 마음속 핏빛 장미의 이끌림은 너무나 강렬했다. 하은은 녹슨 문을 조심스럽게 밀었다. 끼이익-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문이 열렸다.
내부는 더욱 어둡고 습했다. 천장까지 닿을 듯한 낡은 책장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고, 거미줄이 여기저기 쳐져 있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먼지가 훅 끼쳐 올라왔다. 하은은 손바닥에서 작은 빛을 만들어 전방을 밝혔다.
그녀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핏빛 장미의 마력이 더욱 강하게 그녀를 잡아끌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묶인 것처럼, 하은은 홀린 듯 도서관 가장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복도 끝, 다른 책장들보다 훨씬 낡고 거대한 벽이 나타났다. 벽에는 마법 문자들이 음각되어 있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먼지에 가려져 알아보기 힘들었다. 핏빛 장미의 마력은 바로 이 벽에서 강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하은은 손을 뻗어 벽을 만졌다. 차갑고 단단한 돌이었다. 그 순간, 그녀의 심장에서부터 손바닥까지 핏빛 장미의 마력이 흘러넘쳤다. 벽에 닿은 손끝에서 붉은빛이 번져나가더니, 음각된 마법 문자들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쿠르르르릉-!*
육중한 벽이 거대한 울림을 토해내며 서서히 옆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 뒤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눅진하고 비릿한 냄새가 확 끼쳐 나왔다. 그리고 하은의 귓가에, 핏빛 장미의 속삭임이 더욱 또렷하게 들려왔다.
*“…드디어, 문이 열렸노라.”*
그것은 단순한 속삭임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봉인되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듯한, 깊고 불길한 울림이었다. 어둠 속에서 차가운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고, 하은은 본능적으로 이곳이 절대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되는 곳임을 직감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마치 심연의 밑바닥에서 피어난 핏빛 장미처럼, 섬뜩하고 아름다운 빛이었다.
하은은 숨조차 쉬지 못했다.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학원 지하에 숨겨진 끔찍한 금기의,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금기가, 이제 막 그녀에게 손을 뻗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