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 1: 균열 (裂)
자정 직전, 김민준은 익숙한 고층 아파트 복도를 걸었다. 하루 종일 시달린 회색빛 빌딩 숲의 잔상이 아직 눈앞에 어른거렸다. 피곤에 절은 몸을 이끌고 열쇠를 돌리자, 묵직한 철문이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으로 열렸다. 안온해야 할 그의 보금자리는 오늘도 이상하리만치 차가웠다. 에어컨을 끈 지 한참인데, 마치 겨울밤처럼 서늘한 공기가 그의 땀을 식히는 게 아니라 뼛속까지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뭐야, 보일러가 또 고장인가.”
투덜거리며 그는 거실 불을 켰다. 형광등의 차가운 빛이 현대적이고 깔끔하게 정돈된 공간을 비췄다. 새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아파트라 이런저런 잔고장이 있을 리 없었다. 물론, 예전에도 가끔 이런 적은 있었다. 밤에 혼자 있을 때면 으스스한 한기가 돌거나, 분명 닫아둔 창문이 미세하게 열려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야근과 스트레스가 만들어낸 환상이라 치부했다.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치고 욕실로 향했다.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겨우 몸의 한기가 좀 가시는 듯했다. 물기를 닦으며 거실로 나왔을 때였다. 탁자 위에 놓아두었던 리모컨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어라?”
떨어질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탁자 한가운데, 흔들림 없는 곳에 두었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주워 들었다. 고양이도 키우지 않는 자취방에 누가 와서 이런 장난을 칠 리 만무했다.
침대에 몸을 뉘었다. 천장을 응시하며 잠을 청하려 했지만, 왠지 모르게 잠이 오지 않았다. 피곤함은 극에 달했는데, 뇌는 날카롭게 깨어 있는 듯했다. 그때, 거실 쪽에서 ‘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몸을 일으켰다. “뭐지?”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방금 전 탁자에서 리모컨이 떨어졌던 그 자리도, 흐트러짐 없는 소파도, 닫힌 현관문도.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현관 잠금장치를 확인했다. 단단히 잠겨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누워 눈을 감으려는데, 이번에는 좀 더 확실한 소리가 들렸다. ‘드르륵.’ 책상 위의 연필꽂이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듯한 소리였다. 그는 벌떡 일어나 침실 스탠드를 켰다. 책상 위를 확인했지만, 연필꽂이는 제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내가 너무 피곤해서 헛것이 들리나?”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성적인 그의 머리는 어딘가 납득되지 않는 불편함을 느꼈다.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했다. 그는 침대에 앉아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익숙한 방, 익숙한 가구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마치 낯선 공간처럼 느껴지는 기이한 감각.
그때,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컵이 옆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눈을 비볐다. 피곤해서 눈이 침침한가 싶었다. 하지만 컵은 분명 움직이고 있었다. 물이 반쯤 담겨 있던 컵이 미끄러지듯 책상 끝으로 향했다. 곧이어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민준은 얼어붙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방금 전까지 그가 스스로에게 되뇌었던 ‘피곤해서’, ‘헛것이’, ‘착각’ 같은 단어들은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컵은 분명,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스스로 움직여 떨어진 것이다.
“누, 누구야?”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침묵을 깨기는커럼, 오히려 더 깊은 정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거실 쪽에서 서늘한 기운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아까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보다 훨씬 강렬하고, 뼛속까지 시린 한기였다.
그는 천천히 침실 문밖을 내다봤다. 거실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스탠드의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지켜보고 있는 듯한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거실의 스탠드 불빛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마치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그리고 이내 완전히 꺼져버렸다. 아파트는 완전히 어둠에 잠겼다. 밖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도시의 불빛만이 창문으로 스며들어 어스름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때, 거실 한가운데서 무언가가 ‘덜컹’ 하고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소파도 아니고, 식탁도 아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무언가가 바닥을 긁고 지나가는 듯한, 둔탁하고 불쾌한 마찰음. 그리고 그 소리가 멈춘 곳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푸른색 점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마치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되어 떠다니는 작은 빛들이었다.
민준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 푸른빛 점들이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투명한 구체가 회전하는 것처럼, 점들은 각자의 궤도를 그리며 움직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더 강렬하고 불안정한 파동이 일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윙’ 하는 낮은 공명음이 들려왔다. 단순한 환청이 아니었다. 그의 고막을 흔들고, 가슴을 울리는 진동이었다.
푸른 빛의 점들이 만들어내는 형상은 점차 뚜렷해졌다. 그것은 그가 어릴 적 과학 잡지에서 보았던, 아주 먼 우주의 성운 지도와 흡사했다. 별과 별 사이를 잇는 미지의 경로, 혹은 전혀 다른 차원의 좌표를 나타내는 듯한 복잡하고 신비로운 문양이었다.
“이게…… 대체……”
민준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을 기대자 차가운 한기가 그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그의 이성은 비명을 질렀다. 그는 과학과 논리를 신봉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그 어떤 과학적 설명으로도 납득할 수 없는 기괴하고 아름다운, 그리고 소름 끼치는 현상이었다.
갑자기, 허공의 성운 지도가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푸른 빛이 일렁이고, 공명음은 더욱 커졌다. 마치 그 모든 것들이 한데 뭉쳐 폭발이라도 할 것처럼. 그리고 그 순간, 민준의 침대 밑에서 ‘쿵!’ 하는 굉음과 함께 무언가 튀어 올랐다.
그것은 그의 오래된 낡은 노트북이었다. 먼지 쌓인 채 방치되어 있던 노트북이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허공으로 치솟았다. 굉음과 함께 노트북이 튀어 오르자, 그와 동시에 푸른 빛의 성운은 마치 허공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모든 소리가 멎고, 아파트는 다시 불길한 정적 속으로 잠겼다.
어둠 속에서 민준은 노트북이 떨어진 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노트북은 열린 채로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화면에서는, 알 수 없는 글자들이 빠르게 깜빡이고 있었다. 그것은 지구의 어떤 언어도 아닌, 외계의 상형문자처럼 보이는 기묘한 문자들이었다. 그 문자들은 일정한 패턴으로 반짝이다가, 이내 하나의 거대한 문장으로 합쳐졌다.
**[경고: 균열 발생. 좌표 이탈 감지. 비상 시스템 가동 준비.]**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민준은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평생 과학적인 사고만을 해왔던 그의 머리가 마침내 현실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눈앞의 현상은, 그가 상상했던 그 어떤 범주에도 속하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한 폴터가이스트가 아니었다.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경이로우며, 훨씬 더 위험한 무언가의 시작이었다. 그의 심장이 터질 듯이 울렸다.
고요한 아파트의 어둠 속에서, 그는 자신이 알던 세상이 산산조각 나고 있음을 직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