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심연의 기계군주**
**1화: 잿빛 황야의 그림자**
삭막한 잿빛 황야 위로 붉은 노을이 길게 드리웠다. 수천 년 전, ‘대격변’이라 불린 거대한 전쟁이 휩쓸고 간 흔적들은 여전히 거대한 강철의 무덤처럼 곳곳에 널려 있었다. 녹슨 빌딩의 잔해, 뼈대만 남은 고가도로,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덮어버린 모래와 먼지. 이곳은 ‘표면’이라 불렸다. 인류의 대부분이 지하 깊숙한 곳에서 새로운 삶을 꾸려가고 있을 때, 지상의 황무지를 떠도는 이들은 오직 몇몇의 고독한 탐색자들뿐이었다. 이안도 그들 중 하나였다.
이안은 묵혼의 조종석에 앉아 느릿하게 황야를 훑었다. 묵혼. 그의 옆을 수십 년간 지켜온 낡고 투박한 기체였다. 구시대의 유물이라 불리는 메카닉들 중에서도 특별한 기능을 지닌 모델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묵묵히 이안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철갑 병기일 뿐이었다. 외장 곳곳에는 전투의 흔적인 깊은 긁힘 자국과 패인 흔적들이 선명했다. 그의 눈에는 이 모든 상처가 고스란히 영광의 훈장처럼 느껴졌다.
“젠장, 오늘도 수확은 영 시원찮군.”
이안의 중얼거림이 좁은 조종석 안을 맴돌았다. 통신망은 끊긴 지 오래였고, 유일한 동료는 기계음 섞인 묵혼의 엔진 소리뿐이었다. 그의 눈은 묵혼의 헤드 센서가 송출하는 증강 현실 스크린을 좇았다. 낮은 에너지 반응이 멀리 떨어진 폐허 구역에서 감지되었다. 구시대의 잔해 중 전력을 보존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일 것이다. 희박하지만, 어쩌면 쓸만한 부품이나 데이터 코어를 찾을 수도 있다.
묵혼의 거대한 발이 묵직하게 땅을 디뎠다. 낡았지만 여전히 강력한 구동계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황야의 침묵을 깨고 철컹거리는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때였다. 이안의 센서가 갑자기 붉은 경고음을 내뱉었다.
`경고! 미확인 고속 비행체 접근!`
이안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조종간을 틀었다. 묵혼의 거대한 몸체가 회전하며 자세를 낮췄다.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젠장, 이런 곳에 뭐가 나타났다는 거야?”
화면에는 희미한 형체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크지 않은 녀석. 아마도 황야를 배회하는 약탈자들의 드론이거나, 더러는 구시대의 방어 시스템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반가운 손님은 아니었다. 묵혼의 양팔에 장착된 플라즈마 캐논이 번뜩이며 충전되기 시작했다. 푸른빛이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
두 대의 비행체가 거의 동시에 시야에 들어왔다. 먼지 낀 하늘을 가르며 날아온 녀석들은 작고 날렵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표면의 약탈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개조된 정찰 드론들이 분명했다. 이안은 묵혼의 센서로 그들의 무장을 빠르게 파악했다. 소형 레이저 포. 묵혼의 장갑에는 큰 피해를 주지 못하겠지만, 귀찮게는 할 수 있을 터였다.
“들어와라, 이 쓰레기들아.” 이안의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과 함께 날카로운 결의가 서려 있었다.
묵혼이 먼저 움직였다. 거대한 몸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엔진의 포효와 함께, 이안은 조종간을 꺾어 드론 중 하나를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첫 번째 드론이 묵혼의 움직임을 피하려 했으나, 낡았어도 숙련된 조종사의 움직임은 빨랐다. 묵혼의 왼팔이 거대한 강철 주먹을 휘두르자, 허공에 파공음이 울렸다. 쾅!
날아오던 드론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묵혼의 주먹에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강철 외장이 찌그러지며 폭발음과 함께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 잔해들이 황야 바닥으로 흩뿌려졌다.
`적기 한 대 격추.` 시스템 음성이 낮게 울렸다.
하지만 곧바로 두 번째 드론이 묵혼의 등 뒤로 파고들었다. 쉭- 쉭- 날카로운 레이저 빔이 묵혼의 등에 스치듯 지나갔다. 두터운 장갑에도 불구하고, 이안은 등 뒤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것을 감지했다.
“이 빌어먹을!”
이안은 재빨리 묵혼의 자세를 낮추고 회피 기동을 시작했다. 지친 구동계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지만, 묵혼은 여전히 이안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다. 황야의 바위들을 방패 삼아 움직이던 이안은 갑자기 묵혼을 멈췄다. 그리고는 묵혼의 오른팔에 장착된 플라즈마 캐논을 조준했다. 목표는 두 번째 드론.
드론은 묵혼의 움직임이 멈추자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더욱 대담하게 접근해왔다. 그 순간, 푸른빛이 작렬했다. 플라즈마 캐논에서 뿜어져 나온 에너지 탄이 대기를 가르며 날아갔다. 드론은 피할 틈도 없이 플라즈마에 직격당했다. 콰앙! 두 번째 폭발음이 황야를 뒤흔들었고, 드론은 허공에서 산산조각 났다.
`적기 전멸. 전투 종료.`
이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구시대의 유물들을 노리는 약탈자들은 언제나 성가신 존재였다. 이안은 묵혼의 스캔 모드를 다시 활성화시키며 주변을 탐색했다. 아까 감지했던 에너지 반응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약탈자들이 사라진 지금, 그는 좀 더 여유롭게 그곳을 탐사할 수 있을 터였다.
묵혼의 발걸음이 다시 시작되었다. 폐허의 중심부로 향하는 길은 드론 잔해와 녹슨 파편들로 가득했다. 구시대의 거대한 연구 단지였을 법한 곳. 건물들의 외벽은 산성비와 바람에 깎여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지만, 간간이 남아있는 표식들은 이곳이 과거의 지식과 기술을 보관하던 장소였음을 암시했다.
묵혼의 헤드 센서가 특정 지점에서 격렬하게 반응했다. 이안은 묵혼을 멈추고 직접 데이터를 분석했다.
“이게 뭐야…?”
센서가 감지한 것은 단순한 에너지 반응이 아니었다. 지하 깊숙한 곳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지금까지 이안이 보지 못했던 종류의 신호였다. 안정적이면서도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마치 살아있는 것 같은 파동이었다. 구시대의 어떤 장치도 이런 식으로 전력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이라면 더욱이 불가능했다.
이안은 묵혼을 조종해 신호의 원점을 찾아 움직였다. 잔해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자, 지면이 다른 곳보다 미약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곳에 도착했다.
폐허의 한가운데, 거대한 바위들이 무너져 내린 곳. 그 중심에,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다고는 믿을 수 없는 거대한 구멍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검은 심연을 품은 듯한 그 구멍 속으로 묵혼의 센서가 빛을 쏘아보냈지만, 빛은 이내 어둠에 잠식되어 버렸다. 하지만 묵혼의 특수 심층 스캐너는 그 어둠 속에서 거대한 인공 구조물의 존재를 명확히 포착했다.
`미확인 구조물 감지. 규모: 전례 없음. 깊이: 불명. 구성 물질: 미분류.`
이안은 조종간을 꽉 움켜쥐었다. 심장이 격렬하게 두근거렸다. 지하에 묻힌 미지의 유적, 그것도 평범한 것이 아닌, 상식을 초월하는 규모와 재질의 구조물이라니. ‘구시대’의 전설처럼 전해지던, 인류가 결코 도달하지 못했다는 ‘심층 문명’의 흔적인가?
“젠장… 이건 그냥 폐허가 아니었어.”
이안의 눈은 탐욕과 동시에 경외심으로 빛났다. 저 아래에는 인류의 잃어버린 역사, 혹은 새로운 미래를 바꿀 만한 무언가가 잠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강하게 휘몰아쳤다. 하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미지의 심연은 항상 위협을 품고 있기 마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안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묵혼의 조종간을 아래로 꺾었다.
“좋아, 묵혼. 내려간다.”
묵혼의 거대한 몸체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검은 심연 속으로 천천히 진입하기 시작했다. 이안은 더 이상 황야의 잿빛 노을을 볼 수 없었다. 오직 끝없는 어둠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심연이 그에게 무엇을 보여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