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핏빛 맹세**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검게 얼어붙은 나뭇가지들이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바람에 흔들렸고, 그 아래 쓰러진 시신에서는 끈적한 피비린내가 피어올랐다. 윤무는 싸늘하게 식어가는 흑풍도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연민도, 승리의 쾌감도 없었다. 오직 심연과도 같은 공허함만이 가득할 뿐.
“백천.”
낮게 읊조린 이름이 겨울밤의 정적을 갈랐다. 입술 새로 새어 나온 그 이름은 칼날처럼 날카롭고, 지옥불처럼 뜨거웠다. 흑풍도는 백천이 강호에 뿌려 놓은 수많은 촉수 중 하나에 불과했다. 이 비루한 도적 두목을 처단하는 것은, 그저 거대한 복수극의 지극히 작은 서막일 뿐이었다.
윤무는 허리춤에 찬 검의 손잡이를 매만졌다. 차갑고 단단한 감촉이 그의 손아귀에 익숙하게 파고들었다. 이 검은 더 이상 청풍문의 고결한 기운을 품고 있지 않았다. 백천에게 모든 것을 잃은 그날, 윤무는 이미 과거의 자신과 이별했다.
* * *
회색빛 하늘이 검은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천둥과 번개가 몰아치고, 폭우가 대지를 때리는 날이었다. 청풍문은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붉은 피가 빗물에 섞여 대지를 적시고, 선량했던 문도들의 비명이 귓가를 찢었다.
“백천!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윤무는 절규했다. 온몸이 피투성이였고, 다리는 이미 칼에 깊이 베여 서 있기도 힘들었다. 그의 눈앞에는, 평생을 형제처럼 믿고 따랐던 백천이 서 있었다. 늘 온화하고 정의로웠던 그의 얼굴은 기이하게 뒤틀린 야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백천의 손에는 청풍문의 보검, ‘청풍검’이 들려 있었다. 윤무의 아버지, 청풍문주만이 다룰 수 있는 검이었다.
“무슨 짓이냐고? 어리석은 윤무! 나는 이제껏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 백천은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청풍신공은 네 아비 같은 고리타분한 자들이 다룰 만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강자는 나! 백천만이 될 수 있다!”
윤무는 믿을 수 없었다. 몇 달 전까지도, 백천은 자신과 함께 청풍문의 번영을 꿈꿨고, 강호의 불의에 맞서 싸우자고 맹세했던 벗이었다. 그를 향한 믿음은 굳건한 바위와 같았다. 하지만 그 바위는 지금, 백천의 칼날 아래 산산조각 나 부서지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이런 짓을….”
“어째서라니? 네 아비는 청풍신공의 진의를 감추고, 나 같은 인재에게조차 비기(秘技)의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결국 네 아비는 그저 과거에 갇힌 노인일 뿐! 이 강호의 주인은 나, 백천이다!”
그때, 저 멀리서 청풍문주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윤무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피를 토하며 쓰러진 아버지의 가슴에 박힌 것은, 다름 아닌 백천의 손에 있던 청풍검이었다.
“아버지!”
윤무는 비틀거리며 달려가려 했지만,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백천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청풍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검기가 윤무의 다리를 다시 한 번 후려쳤다. 극심한 고통과 함께 윤무는 쓰러졌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아버지의 얼굴과, 싸늘하게 식어가는 어머니의 시신이었다. 그 뒤편에는 이미 불길이 치솟아 청풍문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백천은 잔인하게 웃으며 청풍검을 거두었다.
“이곳에서 죽어라, 윤무. 네 아비의 어리석은 정의와 함께.”
그리고 백천은 차가운 빗속으로 사라졌다. 윤무의 의식은 점차 멀어지고, 몸은 감각을 잃어갔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불타는 절망과 함께 타오르는 끔찍한 증오였다. 그날, 윤무는 죽었다. 하지만 동시에, 복수를 위해 다시 태어났다.
* * *
윤무는 정신을 차렸다. 흑풍도의 시신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싸늘한 밤공기가 그의 몸을 감쌌다. 잃어버린 과거의 상처가 생생하게 되살아나 심장을 짓눌렀다. 하지만 윤무는 더 이상 절규하지 않았다. 그의 가슴에는 오직 얼음장 같은 냉정과 불꽃 같은 증오만이 공존할 뿐이었다.
“청풍신공은 사라졌다. 백천, 네가 그리도 갈망하던 그 힘은 이제 너만의 것이 되었으니… 부디 만끽하거라.”
윤무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나는 새로운 길을 찾았다. 네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둠의 길을.”
그의 눈빛이 깊은 밤하늘보다 더욱 어둡게 가라앉았다. 윤무는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푸른빛을 머금은 검날은 달빛 아래 차갑게 빛났다. 그 검의 이름은 ‘혈마비검(血魔秘劍)’. 청풍문의 검이 아니라, 나락의 끝에서 건져 올린 복수의 검이었다.
윤무는 쓰러진 흑풍도의 시신을 발로 툭 차 뒤집었다. 그의 품에서 찢어진 서신 한 장이 떨어졌다. 백천의 인장이 찍힌 것이 분명했다.
*흑풍도, 서북 방면의 물류를 완전히 장악하라. 그 어떤 방해도 용납하지 마라.*
서신을 읽던 윤무의 눈이 가늘어졌다. 백천은 여전히 강호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그가 청풍문을 멸문시키고 얻어낸 청풍신공으로, 백천은 이제 무림의 정점에 서 있었다. 하지만 윤무는 알고 있었다. 그 정점은 모래성처럼 허약하다는 것을.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내가 하나하나 무너뜨려 주마.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처절하게 추락하는 것이 너의 운명이 될 것이다, 백천.”
윤무는 서신을 갈기갈기 찢어 겨울바람에 날려 보냈다. 찢어진 종잇조각들이 어둠 속으로 흩어지는 모습은 마치 백천의 명예가 조각나는 미래를 예견하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그림자는 밤의 어둠과 완벽하게 섞여들었다. 흑풍도의 시신과 피비린내는 그 뒤에 남겨진 채, 조용히 잊혀져 갔다. 복수의 칼날은 이제 막 첫 번째 희생자를 거둔 참이었다. 윤무의 마음속에는 오직 백천의 심장을 꿰뚫을 그날만을 기다리는 핏빛 맹세만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밤은 깊어지고, 복수의 서곡은 막 시작되었다. 강호는 아직 알지 못했다. 과거의 망령이 얼마나 잔혹한 칼날이 되어 돌아왔는지. 윤무는 다시 한번, 거대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의 목적은 오직 하나. 백천, 그 이름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그 어떤 방해도 용서치 않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