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 1: 현실 속의 잔상
차갑게 식은 손가락이 마우스 위에 얹혔다.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르스름한 빛이 지훈의 멍한 눈동자에 맺혔다. 헤드셋을 벗어던진 지훈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 전까지 그를 옥죄던 전율은 여전히 신경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젠장, 이게 뭐라고….”
그가 플레이하던 가상현실 게임, 『아르카나: 에테르의 그림자』는 명성에 걸맞은 몰입감을 자랑했다. 아니, 몰입감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했다. 그곳은 또 하나의 ‘현실’이었다. 고작 30분 전만 해도 지훈은 수백 년 된 고목의 뿌리가 뒤엉킨 어둠침침한 던전, ‘속삭이는 골짜기’의 가장 깊은 곳에서 거대한 고대 정령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컨트롤과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보스의 패턴은 그를 완전히 잊게 만들었다. 자신이 지금, 고작 몇 평 남짓한 자취방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다는 사실을.
보스를 쓰러뜨리고 전설 등급의 아이템을 획득하는 순간의 희열은, 현실로 돌아온 지금도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지훈은 벌떡 일어나 의자에 걸쳐둔 후드티를 아무렇게나 집어 들었다. 이제 슬슬 배가 고파질 시간이었다. 새벽 1시, 도시의 고층 아파트 단지는 침묵에 잠겨 있었다. 창밖으로는 저 멀리 반짝이는 불빛들만이 깨어있는 생명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냉장고를 열어 텅 빈 속을 확인한 지훈은 한숨을 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게임하기 전에 미리 뭐라도 사다 놓을 걸. 결국 그의 손은 선반 위 인스턴트 라면 봉지로 향했다. 냄비에 물을 올리고 가스레인지 불을 켰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파란 불꽃이 솟아올랐다.
그때였다. 쨍그랑!
놀란 지훈은 움찔 몸을 떨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유리컵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어? 내가 뭘 떨어뜨렸나?”
지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컵은 식탁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는데. 혹시 고양이를 키웠던가? 아니, 그는 혼자 살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지훈은 이내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피곤해서 헛것을 봤거나, 지진이라도 난 건가? 하지만 그의 휴대폰은 어떤 긴급 알림도 울리지 않았다. 아마도 피로가 극에 달해서 잠시 착각했을 것이다. 대충 파편을 쓸어 담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라면 물이 끓기 시작했다. 꼬들꼬들한 면발과 얼큰한 국물을 상상하며 지훈은 침을 꿀꺽 삼켰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라면을 냄비째 들고 식탁으로 향했다. 플라스틱 받침대 위에 냄비를 내려놓고 젓가락을 들었을 때였다.
철컥.
주방 싱크대 상부장 문이, 닫혀 있었던 그 문이 스스로 스르륵 열렸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완전히 열린 문은 다시 스르륵 닫혔다.
“……?”
지훈은 젓가락을 든 채 굳어버렸다. 이번엔 명백했다.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서? 뻥 뚫린 환기구를 통해 들어오는 바람이 상부장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을까? 그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오래된 아파트라 문이 삐걱거리고 헐거워진 탓일 거라고 억지로 합리화하며 애써 불안감을 지웠다.
그는 라면을 후루룩 먹기 시작했다. 피곤해서 예민해진 것일 뿐이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뜨겁고 얼큰한 국물이 속을 데우자 조금은 안정을 되찾는 듯했다. 접시에 덜어 놓은 김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아삭한 소리가 적막한 공간을 채웠다.
그때, 거실 쪽에서 나지막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림자…….”
지훈의 몸이 다시 경직됐다. 젓가락이 접시에 떨어지며 쨍, 하는 소리를 냈다. 잘못 들은 걸까? 환청? 뇌가 과부하 걸린 건가? 그는 숨을 죽였다. 라면 국물에 고개를 파묻은 채, 거실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냉장고의 웅웅거리는 소리와 창밖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도시의 소음만이 전부였다.
‘잠이 부족해서 그래. 게임을 너무 오래했어.’
지훈은 애써 침착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울리고 있었다. 쿵, 쿵, 쿵. 마치 갓 보스를 쓰러뜨리고 심장이 진정되지 않은 것처럼.
라면을 서둘러 먹고 설거지를 마쳤다. 이제는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침실로 향하는 복도를 지날 때였다. 거실에 놓인 대형 TV 화면이 갑자기 ‘탁’ 하고 켜졌다. 지직거리는 노이즈 화면이 어둠 속에서 푸른빛을 뿌려댔다.
“이게 또 뭐야!”
지훈은 화들짝 놀라 TV 쪽으로 몸을 돌렸다. 리모컨은 소파 팔걸이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는 리모컨을 들어 TV를 껐다. 노이즈 화면이 사라지자 어둠이 다시 거실을 집어삼켰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듯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 지훈은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건 단순한 착각이나 피로 누적이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침실 문을 열었다. 침실은 어두웠지만, 희미한 달빛이 창문으로 새어 들어와 가구들의 윤곽을 드러냈다. 어째서인지 침실 공기가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피부에 닿는 한기에 소름이 돋았다.
침대에 막 앉으려는 순간, 그의 시선이 책상 위로 향했다. 그가 벗어던진 VR 헤드셋이 놓여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분명히 앞을 보고 있었는데.
헤드셋의 센서 부분이, 그러니까 헤드셋의 ‘눈’ 부분이 지훈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흡사, 누군가 헤드셋을 쓰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지훈은 얼어붙었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섬뜩한 기운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헛것이 아니다. 분명히 헤드셋은 정면을 보고 있었다.
그 순간, 헤드셋의 작은 LED 램프가 깜빡이더니, 스피커에서 희미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것은 지직거리는 노이즈음이었다. 마치 오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그리고 그 노이즈 너머로, 방금 전 『아르카나: 에테르의 그림자』 던전에서 들었던 보스의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흐흐흐… 어둠은… 깊고… 그림자는… 널… 따라갈 것이다…
음산한 목소리는 마치 지훈의 귓가에 직접 속삭이는 듯 생생했다. 게임 속 보스가 죽기 직전 내뱉었던 그 대사 그대로였다.
지훈은 숨을 들이켰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헤드셋은 여전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노이즈음과 보스의 웃음소리가 점점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합리화할 수 없었다. 이건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 현실 속에, 게임의 잔상이 스며들어 있었다.
지훈은 뒷걸음질 쳤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가 VR 헤드셋을 벗어던진 순간부터, 무엇인가가 게임에서 그의 현실로 따라왔다는 소름 끼치는 사실이 뇌리를 스쳤다.
콰아앙!
갑자기 침실 문이 굉음을 내며 활짝 열렸다. 복도에서부터 거실까지, 집 안의 모든 불이 동시에 꺼졌다. 완전한 어둠이 지훈을 집어삼켰다. 창문 너머의 도시 불빛마저 흐릿하게 멀어지는 듯했다.
그리고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는 또다시 그 목소리를 들었다.
“— 이제… 시작이다….”
그것은 게임 속 보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지훈 자신의 목소리였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충격에 지훈은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손끝발끝이 마비되는 듯한 극도의 공포 속에서, 지훈은 자신의 집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어쩌면,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혼자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어둠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