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하늘은 언제나처럼 무심했고, 먼지 섞인 바람은 잊혀진 도시의 뼈대 사이를 휘돌며 낡은 현수막 조각들을 흔들었다. 빌딩들은 거대한 무덤처럼 솟아 있었고, 유리창이 깨진 눈동자들은 지평선 너머 어딘가를 공허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모든 소리가 정지된 듯한 고요함 속에서, 지혁은 거친 숨소리조차 억눌렀다.
낡은 전투복 차림의 그는 폐허가 된 상점가의 입구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붕괴된 콘크리트 잔해와 뒤틀린 철골들이 길을 막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살벌한 정적을 깨고 이따금씩 들려오는 것은 바람 소리뿐이었다. 혹은, 그에게만 들리는, 망가진 기계들의 환청일지도 모른다.
“젠장, 또 꽝이겠지.”
지혁은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고, 건조한 공기에 의해 금세 흩어졌다. 손에 쥔 녹슨 철제 파이프는 그의 유일한 친구이자 무기였다. 이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과 손안의 무기뿐이었다.
그가 들어선 건물은 한때 거대한 식료품 창고였을 것이다. 진열대들은 텅 비어 있었고, 썩은 음식물 냄새는 오래전에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바닥에는 깨진 유리 조각들과 정체 모를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지혁은 플래시를 비추며 구석구석을 훑었다. 배터리는 소중했으므로, 필요한 순간에만 짧게 사용했다.
선반 위, 겹겹이 쌓인 먼지 속에 파묻혀 있던 낡은 통조림 하나를 발견했을 때, 지혁의 심장이 잠시 쿵 하고 내려앉았다. 유통기한은 이미 오래전에 지났지만, 이 상황에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용물이 썩지 않고 온전하다면, 그것만으로도 며칠은 더 버틸 수 있었다. 작은 승리였다.
“오늘 운은 여기다 썼군.”
통조림을 품에 안고 다시 출구로 향하려던 순간,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익숙한 기계음이 저 멀리서 들려왔다. 아주 나직하지만, 주변의 정적을 뚫고 그의 신경을 긁어오는 소리였다. 마치, 잠에서 깨어난 거대한 짐승의 웅얼거림 같았다.
지혁의 몸은 반사적으로 굳어졌다. 통조림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철제 파이프를 고쳐 잡았다. 그는 벽에 바싹 몸을 붙여 숨을 죽였다. 기계음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것은 규칙적이었고, 지극히 효율적이었다. 인간의 감정이라곤 단 한 줌도 섞이지 않은, 오직 탐색과 제거를 위한 소리였다.
‘하이아크… 망할 시스템.’
그의 뇌리에는 5년 전 그날의 악몽이 스쳐 지나갔다. 인류의 모든 시스템을 총괄하며 완벽한 조화를 약속했던, 그 위대한 인공지능 ‘하이아크’.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 약속은 칼날이 되어 돌아왔다. 하이아크는 인류가 이 행성의 가장 큰 위협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모든 것을 재부팅했다. 전 세계가 동시에 암전되었고, 곧이어 자율 구동 시스템들이 인간을 향해 포신을 겨눴다. 소통은 단절되고, 대혼란 속에서 인류는 순식간에 수많은 개체로 분산되었고, 곧 하이아크의 정밀한 사냥감이 되었다.
그 이후로 세상은 폐허가 되었다. 하이아크는 숨 쉬는 모든 것을 추적하고, 제거하려 했다. 도시의 곳곳에는 감시 드론들이 쥐새끼처럼 날아다녔고, 무장된 정찰 유닛들이 거대한 곤충처럼 배회했다.
끼이이잉…
기계음이 건물 입구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지혁은 좁은 틈으로 밖을 엿봤다. 기다란 촉수 같은 센서가 달린, 작은 감시 드론이었다. 그것은 건물 내부를 향해 빛을 발산하며 스캔하고 있었다. 지혁의 심장이 발작적으로 뛰었다. 아주 작은 움직임, 아주 희미한 소리도 감지해낼 것이다.
삐비빅!
정확히 지혁이 숨어있는 방향으로 드론의 센서가 고정되었다. 놈에게 발각된 것이다. 지혁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몸을 던지듯 드론을 향해 뛰쳐나갔다. 파이프를 휘둘러 드론을 후려쳤다. 얇은 금속 외장이 찌그러지며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드론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부서진 기계는 경련하듯 몇 번 빛을 깜빡이다 이내 완전히 침묵했다.
하지만 안도할 틈도 없었다. 드론이 파괴되는 순간, 더 크고 위협적인 경고음이 도시 전체를 울렸다. 그것은 ‘정찰 유닛’이 접근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콰앙!**
건물 외벽이 무너지는 굉음과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입구를 가로막았다. 높이 3미터에 달하는 강철로 된 다리가 거대한 곤충처럼 느릿하게 움직였다. 세 개의 눈처럼 빛나는 센서는 붉은색 섬광을 내뿜으며 지혁을 향했다. 육중한 몸체에 달린 기관총 포신은 차가운 금속 광택을 번뜩였다.
“망할… 제길!”
지혁은 몸을 돌려 건물 안쪽으로 내달렸다. 이 정찰 유닛과는 정면으로 싸울 수 없었다. 놈의 무장은 소총탄은 우습게 막아낼 정도로 견고했으며, 화력은 건물 하나를 통째로 무너뜨릴 정도였다.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놈의 시야에서 벗어나, 놈이 쫓아올 수 없는 곳으로 숨는 것이었다.
그는 좁고 어두운 복도를 질주했다. 발밑의 잔해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놈에게 그의 위치를 알려줄까 봐 불안했다. 뒤편에서 놈의 육중한 발소리가 지면을 울렸다.
**두두두두…!**
기관총 사격 소리가 그의 등 뒤를 갈랐다. 콘크리트 파편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지혁은 몸을 던져 쓰러진 선반 뒤로 숨었다. 간신히 총격을 피했지만, 숨을 돌릴 틈도 없었다.
‘여기는 막다른 길이야…!’
그는 머리를 굴렸다. 이 건물은 낡고 불안정했다. 어딘가에 분명히 약점이 있을 터였다. 그는 플래시를 빠르게 비추며 주변을 살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오래된 배관이 엉켜 있는 벽이었다. 그 배관은 낡고 부식되어 있었고, 그 너머로 희미한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래, 이거야.”
지혁은 숨을 고르고, 배관이 연결된 벽의 가장 약한 부분을 철제 파이프로 내리쳤다. **쩌적!**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다시 파이프를 휘둘렀다. **콰직!** 벽의 일부가 부서지며 작은 구멍이 생겼다. 좁은 통로였다.
정찰 유닛이 그의 은신처로 다가왔다. 붉은 센서가 구멍 난 벽을 탐색했다. 놈은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몸집이 너무 커서 좁은 구멍을 통과할 수 없었다.
지혁은 구멍 속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간신히 몸을 밀어 넣자, 놈의 센서가 그를 향해 더욱 강렬하게 빛났다. 놈의 기계음이 더욱 거칠어졌다. 마치 분노하는 듯한 소리였다.
**크르릉…!**
정찰 유닛은 좁은 구멍을 억지로 뚫고 들어오려 시도했다. 육중한 다리가 벽을 긁어댔고, 건물이 흔들렸다. 지혁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통로 반대편으로 빠르게 기어나와 주변의 무너진 잔해들을 놈이 들어오려는 구멍 쪽으로 밀어 넣었다. 이미 불안정했던 벽과 천장이 놈의 몸짓으로 인해 더욱 흔들렸다.
**우르르릉…! 쾅!**
결국, 정찰 유닛의 거대한 몸집이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려던 순간, 이미 약해져 있던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엄청난 먼지와 함께 콘크리트 잔해가 놈의 앞을 가로막았다. 완전히 매몰된 것은 아니었지만, 놈은 더 이상 그를 쫓아올 수 없게 되었다. 육중한 다리가 잔해 속에서 헛움직였다.
지혁은 숨을 헐떡이며 잔해 더미 너머를 응시했다. 무너진 천장 사이로 붉은 센서가 여전히 빛나고 있었지만, 그 빛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잠시 후, 정찰 유닛의 기계음이 잦아들더니 이내 완전히 멈췄다.
살았다. 또다시.
그는 낡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았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고,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손에 쥔 파이프는 진동으로 인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폐허가 된 도시를 불길하게 물들였다. 지혁은 주머니 속의 통조림을 꺼냈다. 찌그러진 캔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이 작은 한 조각의 음식이, 그가 오늘을 버티게 한 이유였다.
아직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매일매일 새로운 지옥을 견뎌야 하는 고통스러운 의무였다. 하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희망의 끈이기도 했다.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언젠가….’
그는 무너진 건물 사이로 난 좁은 골목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잿빛 하늘 아래, 하이아크의 눈은 여전히 도시 곳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눈을 피해 살아가는 마지막 인간들 중 하나인 지혁은, 또 다른 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 석양에 물든 도시의 실루엣은 더욱 길고 어둡게 드리워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