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도시의 낡은 숨결이 켜켜이 쌓인, 하지만 내부에선 나름의 활기찬 삶이 꿈틀거리는 아파트 단지. 그중에서도 유독 햇살이 잘 드는 맨 끝 동, 5층에 자리한 작은 보금자리로 이서연은 이삿짐을 풀고 있었다. 막 스물셋이 된 그녀에게, 부모님의 품을 떠나 얻은 첫 독립 공간은 벅찬 설렘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휴… 이제 정말 내 집이네.”

땀으로 끈적이는 이마를 쓸어 올리며, 서연은 텅 빈 거실 한가운데 놓인 낡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닥에는 아직 채 열지 못한 박스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고작 원룸이지만, 짐이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지쳐버린 오후였다. 그녀는 겨우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향했다. 비어 있는 냉장고 문을 열어 유일한 생존 물품인 인스턴트 커피를 꺼냈다. 끓는 물을 부어 휘휘 젓는 동안, 시선은 새하얀 벽지를 두른 낡은 타일 바닥을 배회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창문 틈으로 도시의 소음이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머그컵을 든 채, 다시 소파에 앉았다. 씁쓸한 커피 향이 코끝을 스쳤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탁자 위에 놓았던 머그컵이 아주 미세하게, 정말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옆으로 움직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놓을 때부터 비뚤어졌었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컵을 바로 잡았다. 피곤해서 헛것을 봤겠거니 싶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 부엌 쪽에서 아주 희미한, 마치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는 듯한 ‘똑똑’ 소리가 들려왔다.

“뭐지? 보일러 소리인가?”

두리번거렸지만, 텅 빈 부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사 첫날부터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건 아닌가 싶어, 서연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 옆집에서 뭘 하는 소리겠지.

며칠이 흘렀다. 박스들은 대부분 정리가 되었고, 칙칙했던 원룸은 서연의 손길을 거쳐 아기자기하고 포근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창가에는 작은 화분을 놓았고, 책장에는 좋아하는 책들을 빼곡하게 채웠다. 침대 머리맡에는 푹신한 구름 모양 인형이 놓였다.

그날 저녁, 서연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후 개운한 기분으로 책을 읽기 위해 침대에 기대앉았다. 막 책장 위에 꽂아두었던, 가장 아끼는 판타지 소설을 손에 쥐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손이 닿기도 전에, 그 책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툭’ 하고 책장 아래로 떨어졌다.

“어어?”

서연은 눈을 깜빡였다. 바람이 분 것도 아니었고, 책장 자체가 흔들린 것도 아니었다. 그저 책 한 권만이 중력의 법칙을 따라 묵묵히 바닥으로 향했을 뿐이다.

‘아니, 설마… 책장이 낡아서 그런가?’

다시 책을 주워 제자리에 꽂았다. 그리고 괜히 책장을 툭툭 두드려 보았다. 견고했다. 며칠 전의 머그컵과 ‘똑똑’ 소리가 떠올랐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저 오래된 아파트에서 일어나는 흔한 해프닝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해프닝은 점점 더 잦아졌다.
밤에는 아무도 없는 부엌에서 접시가 ‘딸그랑’ 하고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고, 아침에는 분명히 닫아두었던 베란다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샤워 후 화장실에서 나오면, 분명히 꺼두었던 화장실 전등이 깜빡깜빡거리는 기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서연은 처음에는 ‘피곤해서’, ‘건물 노후화’, ‘창문 틈새 바람’ 같은 합리적인 이유들을 찾아냈다. 하지만 합리화는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결정적인 순간은 어느 토요일 오후에 찾아왔다.
서연은 저녁 식사를 위해 간단한 파스타를 만들고 있었다. 막 삶은 면을 건져내 접시에 담고, 싱크대 옆 건조대에 칼을 놓아두었다. 잠시 뒤 소스 팬을 집으려 뒤돌아선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스륵.

건조대 위에 놓여 있던 식칼이 아주 천천히,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들린 것처럼 1센티미터 가량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내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건조대 위로 떨어졌다.

“히익!”

서연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심장이 미친 듯이 pounding 했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명백하고, 완벽하게, 부인할 수 없는 광경. 이건 더 이상 피곤해서 헛것을 본 것도 아니었고, 낡은 아파트의 해프닝도 아니었다.

“말도 안 돼… 이게 대체 무슨…”

몸이 덜덜 떨렸다. 공포에 질려 휴대폰을 움켜쥐고 황급히 방으로 도망쳤다. 침대에 몸을 웅크린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귀신? 폴터가이스트? 아니야, 아니야… 내가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보는 거야. 정신 차려, 이서연!’

아무리 스스로를 다독여도, 눈앞에서 칼이 떠올랐던 장면은 지워지지 않았다. 서연은 겨우 손을 떨쳐내며 휴대폰을 켰다. 검색창에 ‘이상한 현상 아파트’, ‘집에서 물건이 저절로 움직여요’ 같은 문구를 입력했다. 무수히 많은 공포 게시물과 도시 전설, 그리고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세요’ 같은 글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느 것 하나 그녀의 불안감을 해소해주지 못했다. 오히려 심장을 더욱 조여왔다.

잠들 수 없었다.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린 채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 온몸의 감각이 곤두서서 작은 소리 하나에도 반응했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때였다. 아주 희미하고, 간드러지는, 하지만 왠지 모르게 장난기가 느껴지는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어린아이의 속삭임 같기도 하고, 바람결에 실린 종소리 같기도 했다. 무서웠다기보다는, 묘하게 간지러웠다.

서연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침대 옆 협탁이 어렴풋이 보였다. 협탁 위에는 그녀가 가장 아끼는, 구름 모양의 푹신한 인형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 구름 인형이… 아주 천천히, 흔들흔들하더니… 협탁 가장자리에서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것도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공중에 잠깐 떠 있다가 스르륵 하고 부드럽게 침대 위, 서연의 가슴팍으로 내려앉았다.

‘…!’

서연은 숨을 멈췄다. 인형을 주워 온 것도 아니었고, 손대지도 않았다. 그런데 인형이 제 발로 걸어온 것처럼 품에 안긴 것이 아닌가.

인형을 든 채, 텅 빈 협탁을, 그리고 다시 인형을 번갈아 보았다. 이번에는 아까 들었던 그 작은 웃음소리 대신, 침대 옆 협탁 쪽에서 ‘똑똑’ 하는 소리가 아주 조용하게, 하지만 명확하게 두 번 들렸다. 마치 질문에 대답하듯, 혹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

더 이상 비명을 지르거나 도망칠 힘도 없었다. 공포보다는 기묘한 호기심이 그녀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 알 수 없는 존재가 무섭다기보다는, 오히려 장난기가 느껴졌다.

서연은 천천히 손을 들어, 품에 안긴 구름 인형을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하지만 조금은 부드러운 어조로 속삭였다.

“너… 누구니?”

그녀의 질문에 답하듯, 방 안에 작은 바람이 일었다. 차갑지 않고 오히려 따뜻하고 포근한 바람이었다. 그 바람은 서연의 뺨을 부드럽게 스쳤고, 어디선가 희미하게 오래된 책 냄새와 달콤한 들꽃 향기가 섞인 듯한 아련한 향기가 풍겨왔다.

그리고, 어깨가 으쓱하는 듯한, 아주 미세하고 장난스러운 움직임이 느껴졌다. 서연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녀의 첫 독립 공간은,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존재로 가득 찬 곳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밤은 깊어지고 있었지만, 서연은 더 이상 잠 못 이루는 밤이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이 방에서 벌어질 일들이 조금은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구름 인형을 꼭 끌어안은 채, 다시 한번 나지막이 속삭였다.

“너, 내 친구 할래?”

고요한 방 안, 보이지 않는 존재는 답하는 대신, 서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그녀의 새로운 일상은 기묘하고도 신비로운 존재와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