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 전생 (Isekai)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사방이 온통 회색이었다.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자마자 느낀 감각은 낯선 질감의 바닥과 코를 찌르는 역한 비릿함, 그리고 한기가 스며드는 싸늘함이었다. 지호는 희미하게 깜빡이는 시야를 가누려 애썼다. 분명 방금 전까지 퇴근길 만원 지하철 안에서 피곤에 절어 졸고 있었는데. 이 지독한 악취는 뭐고, 이 싸늘한 돌바닥은 또 뭐란 말인가.

“으읍…….”

신음이 새어 나왔다. 온몸의 근육이 뒤틀리고, 뼛속까지 시린 냉기가 파고들었다. 마치 수십 시간 동안 걷고 또 걸은 후에 찾아오는 고통과 흡사했다. 간신히 상체를 일으키자,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의 머릿속에 각인된 ‘일상’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었다.

폐허. 거대한 도시의 잔해가 바람과 시간 속에 녹아내린 듯한 모습이었다. 삭막한 회색빛 하늘 아래, 뼈대만 남은 고층 빌딩들이 부러진 이빨처럼 삐죽이 솟아 있었다. 건물 외벽은 검은 곰팡이와 알 수 없는 덩굴 식물로 뒤덮여 있었고, 부서진 유리창은 텅 빈 눈처럼 그를 응시하는 듯했다. 아스팔트 도로는 거대한 균열과 웅덩이로 망가져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기괴한 형태의 잡초들이 끈질기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지호는 헛숨을 삼켰다. 꿈인가? 아니, 이런 생생한 고통과 냄새가 꿈일 리 없었다. 혹시 사고라도 당한 건가? 지하철이 전복되거나 폭발이라도 해서, 혼수상태에서 이런 악몽을 꾸는 건 아닐까?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사고의 파편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지루한 일상이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출근, 무의미한 야근, 그리고 피곤에 찌든 퇴근길. 그것이 전부였다.

그때였다. 귓가에 쨍한 금속음과 함께, 투명한 푸른색 창이 허공에 덧씌워졌다.

[‘생존자’에게 알립니다. 새로운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당신의 모든 정보가 초기화되었습니다. 생존을 위해 투쟁하십시오.]
[기본 스탯 창을 개방합니다.]

* **이름:** 김지호
* **종족:** 인간
* **직업:** 없음
* **레벨:** 1
* **체력:** 10/10
* **마력:** 0/0
* **근력:** 5
* **민첩:** 5
* **지능:** 7
* **정신력:** 6
* **행운:** 3
* **스킬:** [생존 본능(패시브) – Lv.1] [위기 감지(패시브) – Lv.1]

지호는 눈을 비볐다. 다시 봐도 투명한 창은 그 자리에 선명하게 떠 있었다. 마치 AR(증강현실) 게임을 하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손을 뻗어 만져봐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공중에 떠 있는 홀로그램처럼, 오직 그의 시야에만 존재하는 듯했다.

“시스템? 스탯? 레벨?”

낯선 단어들이 뇌리를 스쳤다. 마치 온라인 게임에서나 보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게임 속이 아니었다. 발밑의 돌멩이도, 코를 찌르는 쇠 비린내도, 부서진 도시의 풍경도 모두 현실이었다.

그럼, 이건 대체 뭐란 말인가? ‘이세계 전생’이라는, 소설 속에서나 보던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 것이란 말인가? 말도 안 돼. 이성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지만, 눈앞의 이 모든 상황은 그가 현실에서 벗어났음을 웅변하고 있었다.

새로운 세계. 황폐해진 세상. 그리고 ‘생존을 위해 투쟁하라’는 잔혹한 메시지.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심장이 격렬하게 두근거렸다. 공포가 온몸을 덮쳐왔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자신은 이곳에 오게 된 걸까. 그리고 이곳은 대체 어디일까.

그 순간, 지호의 머릿속에 강렬한 경고음이 울렸다.

[‘위기 감지’ 스킬이 발동됩니다!]
[위험! 접근하는 생명체가 있습니다. 은신하거나 대피하십시오!]

쿵, 쿵, 쿵.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낡은 상점가의 잔해 사이, 어두컴컴한 골목 끝에서 무언가가 번뜩였다.

“크르르르….”

짐승의 낮은 으르렁거림. 그리고 곧이어 어둠 속에서 기어 나온 것은, 쥐였다. 하지만 평범한 쥐가 아니었다. 보통 강아지만큼이나 거대한 몸집, 털이 빠진 붉은 피부는 군데군데 굳은 피딱지로 얼룩져 있었다. 날카로운 이빨은 길게 튀어나와 있었고, 특히 눈은 섬뜩한 핏빛으로 번뜩였다. 무엇보다, 등에는 낡은 갑옷 조각 같은 단단한 철판이 불규칙하게 돋아나 있었다.

철갑쥐. 시스템 창에 자동으로 떠오른 정보였다.

지호는 숨을 멈췄다. 녀석의 핏빛 눈동자가 정확히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사냥감을 발견한 포식자의 시선이었다.

공포에 질려 얼어붙은 몸을 움직이려 애썼지만, 다리는 말을 듣지 않았다. 도망쳐야 해! 여기서 벗어나야 해! 하지만 패닉에 빠진 그의 몸은 돌덩이처럼 굳어 버렸다.

철갑쥐가 서서히 그에게로 다가왔다. 녀석의 발톱이 부서진 콘크리트 바닥을 긁어대며 섬뜩한 소리를 냈다. 육중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썩은 내와 비린내가 지호의 코를 마비시켰다.

“젠장…….”

털이 곤두서는 공포 속에서, 지호의 시선은 본능적으로 바닥을 훑었다. 무기. 뭔가 방어할 것이 필요했다. 폐허가 된 도시의 바닥에는 온갖 잔해들이 널려 있었다. 녹슨 철근 조각, 부서진 벽돌, 깨진 유리 파편….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길게 뻗은 녹슨 파이프 조각이었다. 길이가 대략 1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한쪽 끝이 날카롭게 부러져 있는 파이프.

이게 마지막 희망이었다.

철갑쥐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녀석의 핏빛 눈동자에는 명백한 살의가 담겨 있었다. 놈은 더 이상 으르렁거리지 않고, 마치 먹이를 발견한 뱀처럼 조용히 몸을 웅크렸다. 언제든 달려들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지호는 정신을 집중했다. 차가운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손을 뻗어 파이프를 움켜쥐었다. 금속 특유의 서늘한 감촉과 녹슨 표면의 거친 질감이 손바닥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제법 묵직했지만, 이걸로 과연 저 괴물을 상대할 수 있을까?

[‘생존 본능’ 스킬 레벨이 상승합니다! Lv.1 -> Lv.2]
[‘위기 감지’ 스킬 레벨이 상승합니다! Lv.1 -> Lv.2]

갑자기 스킬 레벨이 올랐다는 메시지가 떴지만, 지호는 지금 그딴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살아남아야 했다.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했다.

콰앙!
마침내 철갑쥐가 튀어 올랐다. 녀석의 속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붉은 그림자가 순식간에 지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날카로운 이빨이 번뜩이며 그의 목덜미를 노렸다.

‘젠장!’

지호는 몸을 뒤로 젖히며 겨우 공격을 피했다. 동시에 손에 든 파이프를 휘둘렀다. 쩌억! 하는 소리와 함께 파이프 끝이 녀석의 단단한 철갑등에 부딪혔다.

“크아아악!”

예상과 달리 놈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철갑은 파이프에 긁혀 희게 변했지만, 부러진 파이프의 날카로운 단면이 녀석의 철갑 사이로 깊숙이 파고들었던 것이다.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철갑쥐는 분노했다. 녀석은 더욱 맹렬하게 지호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앞발의 날카로운 발톱이 지호의 어깨를 스쳤다.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지호는 짧은 비명을 질렀다. 피가 솟구쳤다.

[체력: 10/10 -> 8/10]

젠장, 겨우 스쳤는데 벌써 체력이 줄어들다니! 이대로라면 죽는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긴장감 속에서, 지호는 미친 듯이 파이프를 휘둘렀다. 철갑쥐는 덩치는 컸지만 움직임이 둔했다. 몇 번의 공격이 녀석의 머리와 옆구리를 강타했다. 녀석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지만, 지호는 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머리! 머리를 노려야 해!

놈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지호는 온 힘을 다해 파이프를 휘둘러 녀석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콰직!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녀석의 머리가 옆으로 꺾였다. 핏빛 눈동자에 빛이 사라졌다. 철갑쥐는 경련하듯 몇 번 몸을 뒤척이더니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하아… 하아….”

지호는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땀으로 축축했고, 어깨는 지독한 통증을 뿜어냈다. 죽었다. 방금 전까지 눈앞에서 이빨을 드러내던 괴물이 정말로 죽어 있었다.

[‘철갑쥐’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근력’ 스탯이 1 상승합니다.]
[‘민첩’ 스탯이 1 상승합니다.]
[‘전투 숙련’ 스킬을 획득합니다. Lv.1]

또다시 시스템 메시지들이 떴지만, 지호는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손에 들린 파이프의 무게만이 현실처럼 느껴졌다.

몸을 일으켜 폐허 너머의 수평선을 바라봤다. 붉고 거대한 태양이 서서히 지고 있었다. 저녁놀에 물든 폐허의 모습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더 음산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이곳이 어디든, 이제 그의 삶은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그는 괴물을 죽였고, 피를 흘렸다. 이제 그의 눈앞에는 오직 생존만이 남았다.

살아남아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호는 녹슨 파이프를 더욱 단단히 움켜쥐었다. 낯선 세계의 차가운 바람이 그의 찢어진 어깨 위를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