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연의 낙인
새벽은 오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왔는데도 내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차가운 돌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온몸의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고, 살갸은 찢기고 쓸려 나뒹구는 파편들에 무참히 짓이겨졌다. 폐부 깊숙이 스며든 먼지 섞인 피 비린내가 역겨웠지만, 구토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왼쪽 눈은 부어올라 감겨 있었고, 오른쪽 눈만 간신히 실눈을 뜨고 흐릿한 시야를 붙잡았다. 붉고 검은 잔상이 어둠 속에서 춤을 췄다. 그 잔상들이 내가 쓰러져 있는 장소 – 한때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망각의 심장’이 잠들어 있던 그곳 – 의 끔찍한 진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석실은 폭삭 주저앉아 있었다. 웅장했던 벽화들은 갈가리 찢겨 나가 알 수 없는 기호들과 함께 뒤엉켰고, 천장은 거대한 이빨이 씹어 삼킨 것처럼 일그러진 틈새를 드러냈다. 그 틈새 너머에는, 밤하늘이라기엔 너무나 기괴한, 보랏빛과 초록빛이 뒤섞인 불길한 빛이 희미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별들이 아니었다. 저것은 별이 아니었다.
그리고 강민준.
그 이름이 머릿속을 꿰뚫고 지나가자마자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격렬한 통증이 뒤따랐다. 단순한 분노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고통, 절망, 그리고 지옥의 가장 깊은 나락에서부터 기어 올라온 증오가 뒤섞인, 검고 날카로운 파편이었다.
“진우야, 넌 너무… 평범해.”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차분하면서도 비릿했던 그 웃음소리, 기어이 심연의 틈을 열어젖히고 ‘그것’을 불러들이던 순간의 황홀경에 젖은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우리는 함께 탐험했다. 미친 고대 문명의 흔적을 쫓았고, 금지된 지식의 조각들을 그러모았다. 망각의 심장.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들의 비밀이 담겨 있다고 전해지던, 단지 소문에 불과했던 유물. 우리는 그걸 찾기 위해 10년의 세월을 바쳤다.
나는 순수하게 지식에 대한 갈증 때문에 그를 따랐다.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는 즐거움, 인류가 감히 알 수 없는 경계를 넘나드는 짜릿함. 하지만 민준은 달랐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힘’만을 원했다. 그리고 결국, 그 힘을 얻기 위해 나를 제물로 바쳤다.
망각의 심장이 잠들어 있던 제단이 산산조각 나며 솟구쳐 오르던 붉은 섬광. 그 섬광 속에서 나는 보았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태고의 어둠 속에서 잠자던 거대한 그림자가 깨어나는 것을. 형언할 수 없는 그 형태에 나의 이성은 한계에 부딪혔고, 영혼은 산산이 부서지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리고 그 순간, 민준은 나를 그 심연의 틈새로 밀어 넣었다.
“이건,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야. 그리고 네가 그 첫 번째 제물이 될 거야, 진우야.”
그의 미소는 너무나 평온하고, 너무나 아름다웠기에 더욱 잔혹했다. 나는 허공으로 몸이 붕 뜨는 동시에 엄청난 압력에 짓눌리는 것을 느꼈다. 뼈가 삐걱거리고, 정신이 갈가리 찢기는 듯했다. 의식의 마지막 순간, 나는 민준의 눈 속에서 섬광 너머의 무언가와 교감하는 듯한, 광기 어린 황홀경을 보았다.
이제 나는 겨우 살아남았다. 아니, 살아남았다고 말하는 것이 맞는 표현인지도 의문이었다.
간신히 손을 뻗어 바닥을 짚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돌멩이 사이로 섬뜩한 감촉이 느껴졌다. 끈적하고, 미지근하며, 역한 비린내가 났다. 손가락을 오므려 움켜쥐자 그것은 형체를 잃은 채 으스러졌다. 찢겨진 나의 살점과 뒤섞인, 낯선 존재의 피. 혹은 살. 아니면… 그 너머의 무언가.
몸을 일으키려 발버둥 쳤지만, 근육은 내 의지를 배반했다. 왼쪽 허벅지에서는 끔찍한 통증이 전신을 마비시키듯 울려 퍼졌다. 칼에 베인 상처와는 달랐다. 무언가에 짓눌리고, 뜯겨 나간 듯한, 난자된 고통이었다.
그때였다. 귓가에, 아니, 머릿속 가장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속삭임이 들려왔다.
— *그는 너를 버렸다… 너의 영혼을 바치려 했다…*
— *가여운 자여… 절망 속에서 몸부림치는구나…*
나는 숨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도 극한의 고통과 상실감에 갇혀 있었는데, 이 소리는 또 무엇인가. 환청인가? 아니, 너무나 선명했다. 마치 내 안의 또 다른 존재가 직접 말을 거는 듯했다.
— *힘을 원하느냐…? 되갚아줄 힘을…*
— *네가 보았던 것… 너의 친구가 깨운 것…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 속삭임은 분명히 나를 향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내 영혼을 파고들어 무언가를 심으려는 듯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공포스러웠다. 그러나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함이 있었다.
되갚아줄 힘.
그렇다. 나는 그게 필요했다.
나는 다시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아까와 달랐다. 내 안에서 알 수 없는, 낯선 에너지가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망각의 심장이 폭주할 때 내 몸을 덮쳤던 그 기운과 유사했지만, 훨씬 더 응축되고, 차가웠다. 마치 내 안의 가장 깊은 곳에 얼어붙은 분노가 그 에너지를 통해 뜨겁게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간신히 무릎을 세우고, 이어서 휘청이며 일어섰다. 내 몸은 끔찍한 몰골이었지만, 더 이상 아까처럼 무기력하지 않았다.
“강민준…”
쉰 목소리가 겨우 터져 나왔다. 그 이름은 단순한 친구의 이름이 아니었다. 배신자, 광신도, 그리고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린 악마.
나는 고개를 들어 주저앉은 석실의 잔해를 둘러보았다. 폭발의 흔적은 여전했지만, 내가 쓰러져 있던 곳의 돌무더기 일부가 마치 정교하게 도려내진 듯 사라져 있었다. 그곳에는 새까맣고 불길한, 오로지 어둠으로만 이루어진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구멍 너머에서, 방금 전 나를 유혹했던 속삭임이 다시 들려왔다.
— *그가 열어젖힌 문은… 오직 광기와 파멸만을 가져올 것이다…*
— *그를 막고 싶다면… 우리를 받아들여라…*
“너희는… 대체… 무엇이냐…?”
내가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 구멍 너머의 존재는 나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단지 내 안의 광기가 만들어낸 환청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나에게 심어준 분노와 복수심은 너무나 선명했다.
내 손끝이 나도 모르게 그 검은 구멍을 향해 뻗어갔다. 손끝에 닿으려는 찰나, 구멍 안에서 아주 작고 검은 파편 하나가 튀어나와 내 손바닥에 박혔다.
“크악!”
피부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이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검은 파편은 내 피부 속으로 스며들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마치 심연의 잉크로 새겨진 듯한, 작고 불길한 검은 문양이었다.
아픔은 잠시였고, 이내 사라졌다. 오히려 그 문양이 박힌 자리에 알 수 없는 힘이 넘쳐나는 것을 느꼈다. 파편이 박히기 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차가우면서도 격렬한 에너지. 그리고,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흐릿했던 시야는 선명해졌다. 부서진 석실의 벽면에 새겨진, 한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고대 문자들이 이제는 희미하게나마 그 의미를 드러내는 듯했다. 부서진 돌 틈 사이에서 기어 다니는, 눈에 보이지 않던 미세한 존재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내 귀에는 바람 소리나 물 흐르는 소리가 아니라, 저 멀리, 이 세상의 가장자리에서부터 들려오는 듯한, 알 수 없는 울림과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 *좋다… 너의 증오가 우리의 문을 열었으니…*
— *이제 너는 혼자가 아니다…*
그 목소리는 더 이상 유혹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승리에 찬, 혹은 잔혹한 즐거움이 담긴 소리였다.
나는 손바닥에 새겨진 검은 문양을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망각의 심장이 폭주하던 순간 보았던, 형언할 수 없는 존재의 파편과 닮아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민준이 나를 밀어 떨어뜨리던 그 순간, 내 영혼에 새겨진 배신의 낙인과도 같았다.
고통과 공포, 그리고 기이한 힘이 뒤섞인 채, 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부서진 석실을 벗어났다. 이미 날이 밝았는지, 차가운 공기와 함께 희미한 햇살이 바깥의 세계를 비추고 있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 햇살마저도 죽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상은 이제 더 이상 내가 알던 그 세상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이전과는 다르게 일그러져 보였다. 벽 너머의 세상에 숨겨져 있던 균열들이 드러나는 듯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불길한 보랏빛과 초록빛은 사라졌고, 평범한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내 안의 어떤 감각은 저 푸른색 너머에 숨겨진, 거대한 눈동자가 나를 주시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속삭였다.
“강민준… 넌… 나를 지옥에 던져 넣었다.”
나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내 목소리에는 인간적인 슬픔이나 분노보다는, 어둡고 차가운, 짐승 같은 결의가 실려 있었다. 내 안의 깊은 곳에서 깨어난, 이름 없는 존재의 그림자가 나를 감싸는 듯했다.
“하지만… 난 그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다. 그리고… 너를 다시 그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내 손바닥의 검은 문양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파편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새로운 존재로 변모시켰고, 복수를 향한 나의 길을 밝혀줄, 심연의 낙인이었다.
이젠 도망치지 않는다. 숨지 않는다. 나는 지옥에서 돌아온 자가 되어, 나를 배신한 친구의 모든 것을 짓밟고, 그가 감히 열어젖힌 문 너머의 광기를 다시 잠재울 것이다. 설령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이 더 큰 괴물이 된다 할지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