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찢는 섬광**
새벽은 어둠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어둠의 시작이었다. 매서운 바람이 갈라진 흙벽 틈을 파고들어 온기를 앗아갔다. 시아는 낡은 담요를 여동생에게 더 단단히 여며주며 앙상한 팔로 품에 끌어안았다. 작은 어깨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창문 없는 흙벽 오두막 너머로 들려오는 건, 제국군 병사들의 고함과 채찍 소리, 그리고 비명이었다.
“더! 더 가져와! 이 게으른 촌뜨기들 같으니!”
“곡식은 한 톨도 남기지 마라! 황제 폐하의 것이니라!”
엘리아 제국의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붉은 바탕에 검은 독수리 문양은 언제나처럼 마을 사람들의 피를 연상케 했다. 올해는 가뭄이 극심했고, 작년의 수확도 변변치 않았다. 남은 것이라곤 텅 빈 창고와 굶주림에 지쳐가는 얼굴뿐이었다. 그런데도 제국군은 기어이 남아있는 모든 것을 긁어모아 갔다.
“오라버니… 배고파…”
여동생 라나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속삭였다. 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배고프다는 말조차 사치인 세상이었다. 제국군은 매달 약탈을 일삼았고, 그들에게 반항하는 자는 가차 없이 끌려가거나 즉결 처분되었다.
쾅!
바깥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리더니, 곧바로 “안 돼! 이것만은 안 돼!”라는 간절한 절규가 이어졌다. 시아는 라나를 꼭 안은 채 조심스럽게 문틈으로 바깥을 엿봤다.
마을 광장. 제국군 기사단장 ‘발리안’이 거대한 검을 땅에 박고 서 있었다. 그의 갑옷은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채 빛나고 있었지만, 그가 내뿜는 냉혹함은 수많은 피를 갈구하는 듯했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쌀 한 줌을 지키려던 젊은 부부가 무릎 꿇린 채 끌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리온.
리온은 시아의 어릴 적 친구이자, 낡아빠진 나무 칼을 들고 제국군을 향해 달려들던, 무모하지만 정의로운 청년이었다.
“더 이상은 안 돼! 우리에게 남은 게 뭐가 있다고 더 가져가려는 거냐!”
리온의 외침은 거대한 성벽에 부딪히는 작은 돌멩이와 같았다. 발리안 기사단장은 피식 웃었다.
“하찮은 벌레 같은 놈. 네놈의 주제를 알아라.”
그의 손짓 한 번에 제국군 병사들이 달려들어 리온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리온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시아의 심장이 차가운 얼음처럼 굳어졌다. 그들의 비참한 현실을 외면하며 숨어 지냈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굶어 죽어가는 라나, 제국군에 끌려간 아버지, 그리고 지금 눈앞에서 무자비하게 짓밟히는 리온. 더 이상은, 더 이상은…!
그때였다.
시아의 손에 쥐여 있던, 늘 지니고 다니던 낡은 나무 펜던트에서 알 수 없는 온기가 피어올랐다. 온기는 점차 뜨거워지더니, 펜던트 전체가 영롱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붉은 독수리의 깃발이 내리쬐는 어둠 속에서, 그것만이 유일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게… 뭐야…?”
시아의 눈앞에서 빛은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다. 오두막의 낡은 문이 산산조각 났다.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낡은 옷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은은한 밤하늘을 닮은 푸른색과 반짝이는 별빛 같은 흰색이 어우러진 신비로운 드레스가 나타났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은 은빛으로 빛나며 허리까지 닿았고, 손에는 별이 박힌 듯한 영롱한 수정 지팡이가 쥐어져 있었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변화였다. 하지만 몸 안을 가득 채우는 강력한 힘의 감각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저게… 뭐야?”
“마녀인가?!”
병사들의 웅성거림과 경악에 찬 시선이 시아에게 향했다. 발리안 기사단장의 냉혹한 눈빛마저 잠시 흔들렸다.
시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라나의 떨림, 리온의 고통, 마을 사람들의 절망이 그녀의 심장을 채찍질했다.
“더 이상… 더 이상은 빼앗기지 않아!”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마을 광장에 울려 퍼지는 쩌렁쩌렁한 메아리처럼 강렬했다.
시아는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별빛 같은 마력이 지팡이 끝에서 응축되며 순식간에 구체화되었다.
“별의 섬광!”
하늘에서 쏟아지는 유성처럼 강력한 빛줄기가 제국군 진영으로 쏟아져 내렸다. 빛은 병사들의 갑옷을 후려쳤고, 방패를 짓눌렀으며, 무기를 녹여내렸다. 비명과 함께 병사들이 사방으로 나동그라졌다. 하지만 치명상은 없었다. 시아는 그들을 죽이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멈추게 하고 싶었을 뿐.
“무엄하도다! 네 이놈! 감히 황제 폐하의 군대에 맞서려 하는가!”
발리안 기사단장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치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검은 흑철로 만들어져 있었고, 검날에서는 희미하게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제국군 최정예 기사단장답게 그 또한 어느 정도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전사였다.
그가 거대한 검을 휘두르자 검은 기운이 시아를 향해 덮쳐왔다.
시아는 지팡이를 땅에 박았다.
“별의 방패!”
투명하고 영롱한 보호막이 시아와 리온,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감쌌다. 발리안의 검은 기운은 방패에 부딪혀 산산이 흩어졌고, 오히려 반동으로 발리안이 잠시 휘청거렸다.
“이런 어린아이에게 이런 마력을…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녀 같으니!”
발리안이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돌진했다. 그의 움직임은 빠르고 강력했다. 제국군의 병사들도 정신을 차리고 다시 시아를 포위하려 들었다.
하지만 시아는 더 이상 겁먹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별의 전령’ 시아였다.
“물러서!”
그녀는 지팡이를 휘둘러 빛의 채찍을 만들어냈다. 채찍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병사들의 갑옷을 두들겼고, 그들을 튕겨내 땅바닥에 굴러 떨어뜨렸다.
발리안은 시아의 빈틈을 노려 일격을 가하려 했다. 검이 시아의 심장을 향해 맹렬히 꽂혔다.
하지만 시아는 그의 공격을 가볍게 피하며, 지팡이 끝으로 발리안의 갑옷을 툭 쳤다.
“별의 속박!”
별빛 기운이 발리안의 몸을 감싸며 그의 움직임을 멈췄다. 그는 마치 거미줄에 걸린 거대한 곤충처럼 버둥거렸지만, 꼼짝할 수 없었다.
“감히 이 몸을…!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널 처단하리라!”
발리안이 발악했다.
시아는 지팡이를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이곳은 더 이상 너희의 놀이터가 아니다. 이 밤을, 너희의 어둠을, 찢어버릴 것이다!”
밤하늘의 별들이 그녀의 외침에 화답하듯 반짝였다. 무수한 별빛들이 지팡이 끝에 모여들어 거대한 빛의 구체를 형성했다. 그것은 마치 작은 태양처럼 빛났다.
“별의 맹세!”
빛의 구체는 굉음과 함께 제국군 병사들의 진영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폭발은 없었다. 대신, 강력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가 병사들을 튕겨냈고, 그들이 가져왔던 약탈 물품과 수레, 심지어 발리안의 거대한 검마저도 산산조각 내버렸다. 병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기절하거나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광장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별빛으로 가득했던 시아의 드레스는 다시 낡은 담요처럼 변했고, 지팡이는 사라졌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며 그녀는 휘청거렸다. 무리하게 마력을 사용한 탓이었다.
“시아!”
라나가 달려와 그녀를 부축했다.
쓰러진 리온에게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리온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떴다. 그의 눈은 놀라움과 혼란으로 가득했다.
마을 사람들은 침묵했다. 그들은 방금 전 자신들을 구원한 소녀를, 마치 신비한 존재라도 본 것처럼 경외심과 두려움이 뒤섞인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 떨어진 숲속.
두터운 망토를 두른 사내, 카이저가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지만, 눈빛만은 날카롭게 빛났다.
“드디어… 그분이 움직이셨군.”
그의 옆에 서 있던 젊은 반군 병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카이저 대장님… 저 소녀는 대체…?”
카이저는 피식 웃었다.
“별의 전령. 전설 속에서만 존재하던 빛의 수호자. 새벽의 그림자가 그토록 기다리던 희망이다.”
그의 시선은 다시 어둠이 깔린 마을을 향했다. 제국군이 도망쳤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엘리아 제국은 이제 ‘별의 전령’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절대로 가만있지 않을 터였다.
밤은 깊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시아의 마법이 찢어놓은 어둠의 틈새로, 새로운 새벽의 기운이 희미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그것은 절망 속에서 피어난, 아주 작은 희망의 불씨였다.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