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깨어진 거울 조각
어둠이 짙게 깔린 재즈 클럽의 가장 은밀한 구석, 지훈은 투명한 위스키 잔을 만지작거렸다. 첼로의 묵직한 저음이 끈적하게 공간을 채우고, 샴페인 잔 부딪치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뒤섞였다. 그 모든 소음 속에서도, 그의 시선은 정확히 무대 중앙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남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서준. 빛나는 와인빛 수트, 자신감 넘치는 미소, 그리고 무심하게 흘러나오는 재치 있는 농담들. 그 모든 것이 그의 것이 되어버린, 탐욕스러운 도둑놈의 가면이었다.
지훈의 입술에 차가운 미소가 스쳤다. 오늘 밤은 서준이 회장으로 취임하는 기념 파티였다. 모든 언론과 관계자들이 서준의 이름을 외치며 그의 화려한 성공을 축하하고 있었다. 불과 3년 전, 그 모든 영광은 지훈의 것이었어야 했다. 아니, 사실 지훈이 이미 이룩해 놓은 것이었다. 서준은 그저 맨 마지막에 나타나,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지훈의 모든 것을 훔쳐 달아난 하이에나에 불과했다.
“지훈아, 오랜만이네?”
익숙하면서도 역겨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지훈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돌아보았다. 서준의 오랜 오른팔이자, 그 끔찍한 배신극에 작은 역할을 했던 강민이었다.
“강민 씨. 잘 지내셨습니까?”
지훈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감정 없는 평이한 인사에 강민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이고, 그럼요. 회장님 덕분에 저도 승승장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훈 씨는… 잘 지내셨어요? 그 이후로는 통 연락이 안 되시던데….”
‘그 이후’. 강민이 의미심장하게 강조한 그 짧은 단어는 지훈의 심장을 비수는 찢는 듯 파고들었다. 그때를 기점으로 지훈은 모든 것을 잃었다. 쌓아 올린 명예, 피 같은 연구 결과, 미래, 그리고 한때는 세상 전부라고 믿었던 친구까지. 그 모든 것을 서준이 무참히 짓밟고 올라섰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지훈은 투명한 위스키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알코올은 뜨거웠지만, 그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저도 회장님의 성공 소식을 익히 들었습니다. 대단하시더군요. 그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회사를 여기까지 키워내다니. 정말 감탄했습니다.”
지훈이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강조하자 강민의 얼굴에 아주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지훈은 놓치지 않았다. 그래, 너희들은 평생 그 죄책감의 꼬리표를 달고 살게 될 거다. 아니, 살게 만들어 줄 것이다.
“아, 예… 회장님께서 워낙 추진력이 좋으시지 않습니까.”
강민은 서둘러 말을 돌렸다. 지훈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특히 남의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추진력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하시죠.”
강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동공이 흔들리는 것을 지훈은 분명히 보았다. 작은 파동이었다. 하지만 그 파동은 곧 거대한 쓰나미가 되어 서준의 견고한 성을 집어삼킬 것이다.
“하하, 무슨 말씀을… 아무튼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저는 이만 회장님께 인사를 드려야 해서….”
강민은 거의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지훈은 등 돌려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금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겨우 첫 번째 조각이었다. 깨어진 거울은 날카로웠고, 그 조각들이 하나둘 모여 완전한 파멸을 만들어낼 터였다.
잠시 후, 서준이 단상에서 내려와 사람들의 환호 속에 걸어 나왔다. 지훈은 그가 가장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환하게 웃는 서준의 눈이 지훈과 마주쳤다. 순간, 서준의 미소가 굳었다. 당황, 그리고 희미한 불안감. 그 모든 감정이 한데 섞여 서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마치 그가 지훈을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것처럼.
“서준아.”
지훈은 나지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주변의 왁자지껄한 소리 속에서, 그 한마디는 마치 천둥처럼 서준의 귓가에 박혔을 것이다. 서준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다가왔다.
“지훈이? 너, 네가 여길 어떻게… 아니, 오랜만이네.”
말끝을 흐리는 서준의 눈빛은 불안정했다. 지훈은 그런 서준을 보며 속으로 비웃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해도, 이미 그의 심장은 불안으로 쿵쾅거리고 있을 것이다.
“오랜만이지. 네가 이렇게 크게 성공한 모습을 직접 보고 싶어서 말이야.”
지훈은 서준의 어깨를 살짝 톡톡 두드렸다. 그 가벼운 터치에 서준의 몸이 미세하게 경직되는 것을 지훈은 느꼈다.
“네가… 네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지. 정말 고맙다.”
서준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진심이라곤 털끝만큼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지훈은 그 말에 순간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눌렀다. 고맙다고? 네가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간 후에?
“고마울 것까지야. 그저… ‘네 것’을 네가 잘 써주고 있는 것뿐인데.”
지훈은 ‘네 것’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서준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지훈은 놓치지 않았다.
“아, 맞다. 하나 더 보고 싶은 게 있었어.”
지훈은 주머니에서 작은 USB를 꺼냈다. 반짝이는 은색 USB를 본 서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이거… 혹시 기억나? 우리가 한때 이 안에 우리의 꿈을 담았던 적이 있었지. 물론, 지금은 ‘네 꿈’만이 남아있지만.”
지훈은 USB를 서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서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USB 안에는 지훈이 밤낮없이 매달렸던 프로젝트의 초기 설계도와 연구 자료, 그리고 그들이 주고받았던 수많은 대화 기록이 담겨 있었다. 서준이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며 발표했던, 바로 그 모든 것의 원본이.
“그때처럼, 가끔 옛날 생각도 좀 하고 그래. 혼자서… 몰래.”
지훈은 서준의 귀에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했지만, 그 안에는 독사의 이빨이 숨겨져 있었다.
“난 이제 이만 가봐야겠다. 회장 취임, 다시 한번 축하해. 서준아.”
지훈은 서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마지막 말을 뱉었다. 그의 눈빛은 맹수처럼 번뜩였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클럽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은 당당했고, 그가 남긴 것은 서준의 손안에 쥐어진 차가운 USB와 함께, 그를 집어삼킬 거대한 불안감이었다.
클럽 문을 나선 지훈의 입가에는 비로소 진정한 미소가 걸렸다. 차갑고도 섬뜩한, 복수의 시작을 알리는 미소였다. 서준, 이제부터 네가 쌓아 올린 유리성은 내가 한 조각씩, 아주 천천히, 그리고 잔인하게 부숴 줄 테니까. 네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처절하게. 게임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