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의 심장은 언제나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하진의 가슴은 달랐다. 차가운 돌벽에 손을 짚었다. 축축한 이끼가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지하 27층, ‘잊혀진 자들의 미궁’. 이곳은 언제나 그랬듯 고요했지만, 그의 심장은 폭풍 전야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단순한 기다림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고요함 속에 숨겨진, 세상의 모든 규칙을 거스르는 금단의 맹세 때문이었다.
“하아….”
낮게 내쉬는 한숨이 짙은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탐험가 길드에서 내려온 의뢰는 명목일 뿐이었다. 고대 유물의 조각을 찾아 오라는 지시 따위는 지금 그의 머릿속에 없었다. 오직 그녀. 비늘 한 조각마다 달빛 같은 은은한 광택이 감돌고, 붉은 눈동자가 세상을 집어삼킬 듯 깊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의 모습만이 하진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몇 분, 혹은 몇 시간. 영원에 가까운 침묵의 틈을 비집고, 저 멀리서 희미한 물결 소리가 들려왔다. 차르륵, 차르륵. 마치 거대한 뱀이 물속을 가르며 다가오는 듯한 소리. 하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동시에 등골을 타고 오르는 긴장감은 여전했다. 발소리조차 용납되지 않는 이곳에서, 그녀는 항상 그렇게 예고 없이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 흐르는 물처럼 미끄러지듯, 하나의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유려한 몸체, 푸른색과 은색이 오묘하게 섞인 비늘들이 던전의 희미한 마나 광석 빛을 받아 반짝였다. 상체는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아름다웠지만, 허리 아래로는 거대한 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하진을 향하자,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멎는 듯했다.
“리나.”
하진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그리움과 안도감이 뒤섞인 부름이었다.
“하진.”
그녀의 목소리도 낮고 촉촉했다. 물방울이 맺힌 듯한 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간질였다. 기다림에 지친 하진의 얼굴을 비늘이 덮인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차가운 온기가 피부에 닿자, 그의 불안감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았다.
“늦었잖아. 걱정했어.”
하진은 그녀의 손을 잡아 제 입술에 가져갔다. 비늘의 거친 감촉이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졌다.
“미안해, 하진. 예상치 못한 순찰대가… 이젠 그들의 그림자조차 나를 숨 막히게 해. ‘심연의 감시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이 영역까지.”
리나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녀의 종족, 고대 나가족의 심장부와 가까운 이곳까지 인간이 드나드는 것을 감시하는 특수 부대였다. 동시에, 리나와 같은 ‘이단적인’ 존재들을 감시하는 역할도 했다. 종족 간의 교류를 엄격히 금지하는 그들의 법도 속에서, 하진과의 만남은 그 자체로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행위였다.
“심연의 감시자라니… 길드에서도 그들의 활동이 심상치 않다고 했어. 인간 침입자들을 색출하는 건 물론이고, 너희 내부의 반역자들을 찾아낸다고.”
하진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길드의 탐험가들은 나가족을 단순한 ‘던전 몬스터’로만 취급했지만, 하진에게 리나는 그 어떤 인간보다도 소중한 존재였다. 그들의 적대적인 시선이 리나에게도 향하고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죄어왔다.
“반역자라… 아마 나 같은 존재를 말하는 거겠지. 우리 종족의 법도를 어기고, 너희 ‘지상의 피’와 교류하는.”
리나의 목소리에는 자조적인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 슬픔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하진은 그녀의 비늘 덮인 어깨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차갑고 단단한 비늘 아래, 리나의 심장이 격정적으로 뛰는 것이 느껴졌다.
“언제쯤 우리는 이 그림자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렇게 숨어 만나지 않아도 될 날이 올까?”
하진의 질문에 리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뱀 꼬리가 바닥을 스치며 애달픈 소리를 냈다.
“모르겠어, 하진. 우리 종족은 지상의 너희를 믿지 않아. 너희는 우리 땅을 침범하고, 우리의 마력을 앗아가고, 우리의 생명을 위협한다고 믿지. 반대로 너희도 우리를 몬스터로만 보잖아. 공존이라는 단어는 우리 둘만의 사치일 뿐이야.”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틀렸다는 건 아니야.”
하진은 힘주어 말했다. 그의 눈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난 너 없이는 안 돼, 리나. 네가 없는 세상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
리나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얼굴에 차가운 비늘이 있었지만, 그 아래로 뜨거운 감정이 흐르는 것이 하진에게는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몸을 기울여 하진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었다. 차갑고도 부드러운 감촉.
“나도 그래, 하진. 너야말로… 나의 유일한 빛이야.”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두 연인의 목소리는, 금단의 사랑이 품고 있는 위험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냈다. 그 순간, 그들의 심장을 뒤흔드는 거친 진동이 던전 전체를 울렸다.
쿠구궁! 쾅!
“무슨 소리지?”
하진이 검에 손을 올렸다. 던전의 벽이 흔들리고 천장에서 작은 돌조각들이 떨어져 내렸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강력한 마나의 파동이 느껴졌다.
“이건… ‘심연의 파열’이야! 보통 이 심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현상인데!”
리나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녀의 눈이 붉게 빛나며 주변을 살폈다.
“하진, 숨어! 그리고 도망쳐야 해! 이건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리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시커먼 그림자가 솟구쳤다. 마치 암흑 그 자체가 형상을 얻은 듯한 괴물이었다. 날카로운 발톱이 공기를 갈랐고, 흉측한 입에서는 독성 물질을 뿜어내는 듯한 김이 피어올랐다.
“그림자 포식자! 저 녀석은 마나를 흡수해!”
하진은 본능적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오한 속에서도, 리나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우선이었다.
“리나, 뒤로 물러서! 내가 시간을 벌게!”
“아니, 하진! 혼자서는 안 돼! 저 녀석은 일반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아!”
그림자 포식자는 맹렬하게 돌진했다. 하진은 검을 휘둘러 방어했지만, 괴물의 발톱은 검날을 긁으며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냈다. 육중한 힘에 몸이 밀려났다. 그 틈을 노려 그림자 포식자는 두 번째 공격을 가했다.
그 순간, 리나의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의 길고 유려한 뱀 꼬리가 바닥을 박차고 솟아올라, 그림자 포식자의 몸통을 강하게 후려쳤다. 콰앙! 금속성 소리와 함께 괴물이 비틀거렸다.
“하진! 저 녀석은 형체가 없지만, 마나를 집중시킨 공격에는 약해!”
리나의 붉은 눈동자가 푸른 마나로 번뜩였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고대 나가족의 언어가 흘러나왔고, 손에서 푸른색 마나 덩어리가 생성되어 그림자 포식자에게 날아갔다. 맹렬한 기세로 날아가던 마나 덩어리는 괴물의 몸을 꿰뚫고 지나갔다.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함께 괴물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마나 집중 공격… 알았어!”
하진은 리나의 조언을 듣자마자, 검에 자신의 모든 마나를 집중시켰다. 푸른색 마나의 기운이 검날을 휘감았다. 그는 그림자 포식자가 다시 리나에게 달려들기 직전, 몸을 날려 괴물의 약점을 노렸다. 그림자 포식자의 몸통 중앙, 마나가 가장 약하게 흐르는 곳.
“신속의 검!”
하진의 검이 섬광처럼 번뜩이며 괴물의 몸을 가로질렀다. 푸른 마나의 칼날이 그림자 포식자의 비물질적인 몸을 갈라버렸다. 괴물은 길고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어둠 속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남은 것은 역겨운 유황 냄새뿐이었다.
하진은 숨을 헐떡이며 검을 내렸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리나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둘은 서로를 마주봤다. 땀과 피, 그리고 던전의 먼지가 뒤섞인 채, 그들의 시선은 절박하게 얽혔다.
“괜찮아, 하진? 다친 곳은 없어?”
리나의 손이 하진의 얼굴을 감쌌다. 걱정으로 가득 찬 눈빛. 하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덕분이야. 리나. 네가 아니었으면 위험했을 거야.”
그는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단단하면서도 유연한 비늘의 감촉. 죽음의 위협 속에서 함께 싸운 그들의 유대가 더욱 단단해진 기분이었다.
“우린… 이렇게 헤어져야 하는 건가?”
하진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짙게 깔렸다. 그림자 포식자와의 전투로 인해 이 근방의 마나 흐름이 불안정해졌다. 분명 ‘심연의 감시자’들도 이 변화를 감지했을 터였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무는 것은 위험했다.
“응. 더 이상은 무리야. 이제 곧 순찰대가 올 거야. 내가 시간을 벌게. 너는 안전한 길로 도망쳐야 해.”
리나는 하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강렬했지만, 이별의 아쉬움을 숨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다음에 만날 땐, 더 이상 이 어두운 던전의 심연이 아닌 곳에서 너를 보고 싶어, 리나.”
하진의 말에 리나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도 그래, 하진.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까?”
그녀의 질문에 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제 입술을 그녀의 차가운 비늘 덮인 입술에 포개었다. 짧지만 뜨거웠던 입맞춤. 종족을 뛰어넘는, 세상의 모든 금기를 깨부수는 사랑의 맹세였다.
입술이 떨어지자, 리나는 빠르게 몸을 돌렸다. 그녀의 긴 뱀 꼬리가 바닥을 가르며 미끄러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때까지, 살아남아야 해, 하진.”
멀리서 들려오는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
“너도.”
하진은 텅 빈 어둠 속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의 가슴에는 그녀가 남긴 온기만이, 금지된 사랑의 증거처럼 시리게 아려왔다. 던전의 고요함은 다시 찾아왔지만, 하진의 심장은 여전히 폭풍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검을 고쳐 잡고, 또 다른 거짓된 탐험의 길을 찾아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언젠가, 빛 속에서 그녀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