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방문자
밤 11시, 지후는 낡은 아파트의 거실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희미한 스탠드 불빛만이 칙칙한 벽지를 겨우 밝히고 있었다. 도시의 소음은 창밖에서 아득히 멀어졌고, 이제 아파트 전체를 감싸는 건 낡은 건물의 나지막한 한숨과 같은 정적뿐이었다. 그는 맥주캔을 한 모금 마시며 눈을 감았다. 지친 하루 끝에 찾아온 이 평화가 얼마나 귀한지. 그러나 그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끼익.’
아주 작게, 하지만 분명하게, 주방 쪽에서 소리가 났다. 지후는 눈을 떴다.
“뭐야, 쥐인가?”
피곤해서 헛것이 들린 거라고 애써 생각했다. 이 낡은 아파트는 툭하면 어디선가 소리가 났다. 배관이 끓는 소리, 바람에 창문 틈이 흔들리는 소리, 옆집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생활 소음까지. 그러나 오늘 들린 소리는 좀 달랐다. 쥐가 긁는 소리라기보다는, 삐걱거리는 경첩 소리에 가까웠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소리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끼이익… 툭.’
뭔가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 같았다. 지후는 불안감에 스탠드 아래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시계는 11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지만,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누구 없어요?”
지후는 혹시 모를 침입자에게 경고하듯 나직이 물었다. 물론, 대답은 없었다. 거실의 어둠은 그의 목소리를 집어삼키는 듯했다. 그는 주방으로 향하는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낡은 마룻바닥이 발걸음마다 삐걱거렸다. 복도 끝, 주방은 여전히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그는 주방 스위치를 켰다. 형광등이 한두 번 깜빡이더니 이내 쨍한 백색 빛을 토해냈다.
싱크대 위에 놓인 컵, 그릇, 수세미.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특별히 달라진 점은 보이지 않았다. 지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환청이었나?”
그는 그렇게 결론 내리고 스위치를 끄려 했다. 그때였다.
딸깍.
싱크대 위쪽 찬장 문이 혼자서 스르륵 열렸다. 아주 천천히, 마치 누가 고의로 열기라도 한 듯이. 지후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분명히 그는 찬장 문을 닫았었다. 아니, 오늘 아침에 컵을 꺼낸 이후로는 주방 찬장 근처에 간 적도 없었다. 그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찬장 문을 닫았다. 낡은 나무 문이 뻑뻑하게 닫히는 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이게 뭐야… 씨.”
지후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피곤해서 신경이 날카로워졌다고 생각하며 다시 거실로 돌아갔다. TV를 켜고 시끄러운 예능 프로그램을 틀었다. 소음에 기대어 불안감을 잊으려 했다. 억지로 웃음을 지으려는 출연자들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거슬렸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거실 벽에 걸린 액자가 흔들거렸다. 그는 TV에서 눈을 떼 액자를 바라봤다. 액자는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끊임없이 진동했다. 마치 누군가 뒤에서 흔들고 있는 것처럼. 그러더니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액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리가 산산조각 났다.
지후는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삼켰다.
“젠장! 무슨…”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액자가 떨어진 곳으로 달려갔다. 낡은 아파트의 벽은 왠지 모르게 서늘한 기운을 내뿜는 것 같았다. 액자를 받치던 못은 멀쩡하게 박혀 있었다. 그렇다면 액자는 저절로 떨어진 게 아니었다. 누군가 떼어낸 것처럼.
“누구야?”
지후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오직 그의 거친 숨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공포가 그의 심장을 옥죄기 시작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다시 잡았다. 119를 눌러야 할까? 아니면 친구에게 전화해야 하나?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우리 집에 유령이 나타났어’라고? 미친놈 취급받을 게 뻔했다.
그는 거실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정상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그의 눈이 주방 입구의 어둠으로 향했다. 마치 무언가 그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파편들을 치우고 침실로 향했다. 불을 켜고 문을 잠갔다. 베개 밑에 숨겨두었던 야구방망이를 꺼내 들었다. 낡은 원목 방망이는 그의 손안에서 너무나도 가볍게 느껴졌다. 이대로는 안 된다. 뭔가 확실한 게 필요했다.
침대에 걸터앉아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건 꿈일 거야.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는 거라고.’
그러나 꿈이라고 하기엔 모든 감각이 너무나 생생했다. 액자가 깨질 때의 날카로운 소리, 바닥에 흩뿌려진 유리 파편의 차가운 감촉,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심장을 조여오는 섬뜩한 공포까지.
그는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어둠 속에서 찬장 문이 열리고 닫히는 모습이, 액자가 떨어져 깨지는 모습이 아른거렸다. 결국 그는 밤새도록 잠들지 못하고 침대에 앉아 야구방망이를 든 채 동이 트기만을 기다렸다.
새벽 5시. 창밖으로 희미하게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밤새 짖어대던 개 짖는 소리도 멈췄고, 도시는 다시 활기를 찾으려는 듯 미약한 소음들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그는 긴장이 풀린 듯 축 늘어졌다.
‘아침이 되면 괜찮아질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눈을 붙였다.
얼마나 잠들었을까. 짧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듯한 기분과 함께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눈을 뜨자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의 침대 바로 옆, 협탁 위에 놓인 액자였다.
그 액자는 어제 거실에서 떨어져 깨졌던 그 액자였다.
유리는 깨끗하게 원상 복구되어 있었고, 사진 속 그의 환하게 웃는 얼굴 또한 멀쩡했다. 그리고 액자 아래에는 작은 포스트잇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어서 와.]
단 두 글자였다. 하지만 그 단어는 지후의 심장을 얼음장처럼 차갑게 만들었다. 그는 아침 햇살이 비추는 침실에서 온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야구방망이는 이미 그의 손에서 떨어져 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느꼈던 불쾌함과는 차원이 다른, 명확한 섬뜩함이 그의 영혼을 갉아먹는 듯했다. 그것은 마치, 오랜 시간 그를 기다려온 누군가의 인사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방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침실 문틈 너머로 어둡고 텅 빈 복도가 지후를 응시하는 것 같았다. 그의 등골을 타고 차가운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는 목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침대 시트를 움켜쥔 채, 그저 눈앞의 공포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아파트에, 드디어 ‘진정한 손님’이 찾아온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