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 덮인 황야는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잿빛 하늘 아래, 한때 위용을 자랑했을 거대한 도시의 잔해들이 거대한 뼈대처럼 앙상하게 솟아 있었다. 먼지는 코를 찌르고, 매번 들이쉬는 숨은 칼날처럼 폐부를 긁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숨 막혀 죽어버린 듯한 정적 속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은 고작 카인 자신뿐이었다.
카인의 발걸음은 지치고 무거웠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며칠째 입에 넣은 것이라고는 흙먼지 섞인 물 한 모금뿐이었다. 타는 듯한 갈증과 뱃속에서 울려 퍼지는 공허한 아우성은 그를 계속 앞으로 밀어붙였다. 그의 눈은 잿빛 폐허 속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한 조각의 식량, 한 모금의 물, 혹은 적어도 오늘 밤을 버틸 수 있는 안전한 은신처.
저 멀리, 한때 대륙의 중심이라 불렸던 ‘아르카나’의 상징이었을 거대한 탑의 잔해가 보였다. 꼭대기는 부러져 사라졌지만, 그 육중한 하반부는 여전히 거대한 비석처럼 황야에 박혀 있었다. 그곳에는 분명 사람이 살던 흔적이 있을 터. 어쩌면 아직 남아있는 것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희망이 카인의 마른 심장을 간신히 뛰게 했다.
발아래, 삭막한 돌무더기 사이로 낯선 형태의 덩굴이 뻗어 있었다. 검은 핏줄처럼 꿈틀거리는 덩굴은 닿는 모든 것을 마르게 하는 듯, 주변의 잔해들은 마치 오랜 시간 수액을 빨린 것처럼 바싹 말라 있었다. ‘어둠의 덩굴.’ 대파국 이후 황야를 뒤덮기 시작한 저주받은 식물. 건드리면 신경을 마비시키고 결국엔 심장까지 멈추게 하는 독성을 지녔다. 카인은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멈추고 덩굴을 피해 빙 돌아갔다. 생존은 곧 위험을 인지하고 회피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오랜 걸음 끝에, 카인은 탑의 그림자 아래에 자리한 작은 건물 잔해 앞에 섰다. 한때는 시장이었을 법한 곳. 온갖 물건들이 널브러진 채 부서져 있었다. 그곳에서 카인의 눈길을 끈 것은, 잔해 더미 사이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작은 조각이었다. 푸른색, 아니, 에메랄드빛에 가까운 광채. 마치 살아있는 숨을 내쉬는 듯 미세하게 깜빡였다.
카인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돌멩이와 먼지 속에 반쯤 파묻혀 있는 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수정 조각이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죽은 듯 고요한 황야에서, 이 조각만이 생생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런 것을 본 적은 없었다. 아니, 대파국 이전의 기록에서나 볼 수 있었던 ‘마나석’이라는 존재가 아닐까? 전설 속의 이야기가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마나석… 정말 이런 게 존재했단 말이야?”
카인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메말라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조각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돌의 감촉과 달리, 조각에서는 미약하게나마 온기가 느껴졌다. 손에 쥐자, 빛은 더욱 선명해졌다. 그의 지친 몸에 희미한 기운이 돌았다. 착각일까? 아니면… 이 조각이 정말로 생명의 힘을 담고 있는 것일까?
이 세계에서 마나석은 귀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 가치를 제대로 활용할 방법은 몰랐다. 그저 막연한 희망일 뿐이다. 어쩌면 팔아서 식량을 구할 수도… 아니, 누가 이런 황폐한 세상에서 이런 물건을 돈 주고 살까? 돈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해진 지 오래였다. 생존에 필요한 것은 오직 현실적인 물건뿐이었다. 식량, 물, 무기, 은신처.
그때였다.
카인의 귀에 낯선 소리가 포착되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것은 바람 소리도 아니었고, 잔해가 무너지는 소리도 아니었다.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
카인은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고 주변을 살폈다. 그의 눈은 빠르게 움직이며 황폐한 시장의 잔해들을 훑었다. 먼지 덮인 상점 간판, 부서진 마차, 뒤집힌 좌판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검게 그을린 벽 너머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였다.
그림자는 길고 앙상했다. 분명 사람의 형상은 아니었다. 네 발로 기어 다니는 짐승, 하지만 평범한 짐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기괴했다. 비틀린 몸뚱이, 뼈가 튀어나온 사지, 그리고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도 번득이는 붉은 눈.
‘황야의 포식자.’ 대파국 이후 나타난 변종 생명체. 그들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잡아먹고, 심지어 죽은 자의 시체마저도 뜯어먹는 잔혹한 존재들이었다. 카인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찾은 마나석을 꽉 쥐었다. 마나석에서 나오는 희미한 온기가 그의 손바닥을 지졌다.
그림자가 벽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뼈만 남은 듯 앙상한 몸뚱이는 검은 털로 뒤덮여 있었고, 척추를 따라 뾰족한 가시가 돋아 있었다. 녀석은 코를 킁킁거리며 카인의 냄새를 쫓는 듯했다. 축축한 코에서 튀어나온 송곳니는 썩은 살점과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카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달아날 길은 없었다. 녀석의 속도는 인간의 그것을 훨씬 초월했다. 싸워야 했다. 하지만 빈손이나 다름없는 그가 어떻게 저런 괴물을 상대할 수 있을까.
그때, 손에 쥐고 있던 마나석이 더욱 강렬하게 빛을 내뿜었다. 푸른 광채가 주변을 일순간 환하게 밝혔다. 놀란 황야의 포식자는 잠시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 찰나의 순간, 카인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게… 내 마지막 희망인가.”
카인은 마나석을 쥔 채, 온몸의 힘을 쥐어짜 폐허 더미 사이로 몸을 던졌다. 포식자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등 뒤에서 터져 나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