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2화: 잿빛 도시의 섬광
메마른 먼지가 폐허가 된 도시의 핏빛 노을 속에서 춤을 추었다. 세라는 낡은 천 조각으로 입과 코를 가리고, 망가진 건물 잔해 사이를 조심스럽게 헤쳐나갔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그것’들이 활동을 시작할 테니, 그 전에 안전한 은신처를 찾아야 했다. 며칠째 식량도, 물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갈증으로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그녀는 축 늘어진 어깨에 짊어진 낡은 배낭의 무게를 견뎠다. 배낭 안에는 낡은 인형 하나와 비상용 구급상자가 전부였다.
“후으… 후으…”
거친 숨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무너진 고가도로 아래, 뼈대만 남은 버스가 뒹굴고 있는 곳을 지나쳐 갈 때였다. 한때는 번화했을 거리가 이제는 죽음의 그림자로 가득했다. 콘크리트 조각과 뒤틀린 철근,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균류들이 회색빛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지상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매 순간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았다. 특히 밤은 더욱 그러했다.
그녀의 시선이 저 멀리, 무너진 고층 빌딩들 사이에서 홀로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듯한 작은 상점 건물에 닿았다. 녹슨 간판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지만, 적어도 외벽은 멀쩡해 보였다.
‘어쩌면… 어쩌면 저 안에 아직 쓸 만한 것이 남아있을지도 몰라.’
세라는 일말의 희망을 붙잡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힘없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어 속도를 높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곳은 한때 작은 편의점이었던 곳으로 보였다. 유리창은 깨져 나갔지만, 안쪽은 비교적 깨끗했다. 그녀는 부서진 문을 조심스럽게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먼지가 자욱한 공기가 그녀를 맞았다. 부서진 선반들, 뒹구는 상품 잔해들. 약탈당한 흔적이 역력했지만, 깊숙한 곳 어딘가에는 아직 빛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그녀를 움직였다.
벽을 따라 조심스럽게 걷던 세라의 발이 무언가에 걸렸다. 삐그덕. 얇은 금속판이 바닥에 떨어지며 작은 소음을 냈다. 순간, 세라의 온몸이 굳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이 끔찍한 세상에서, 작은 소음 하나는 죽음을 부르는 징조가 될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어.”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중얼거렸지만, 심장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그때였다. 천장 어둠 속에서 무언가 번뜩이는 것이 포착되었다. 섬뜩한 붉은 안광. 거대한 몸집이 서서히 드러나며, 썩어가는 고기 덩어리 같은 형체가 그녀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변이체…’
세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편의점 내부의 어둠에 완벽하게 숨어 있던, 덩치 큰 변이체였다. 녀석의 몸에서는 불쾌한 악취가 풍겨왔고, 찢어진 입에서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나 있었다. 녀석은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낮게 으르렁거렸다.
“젠장…!”
세라는 급히 몸을 돌려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녀석의 속도는 예측을 뛰어넘었다. 거대한 앞발이 바닥을 짓밟으며 튀어나왔고, 천장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세라는 가까스로 몸을 날려 피했지만, 등 뒤로 섬뜩한 바람이 스쳤다.
‘이대로는 안 돼. 도망칠 곳이 없어.’
좁은 편의점 안, 부서진 선반들이 사방을 가로막고 있었다. 변이체는 그녀를 먹잇감으로 여기는 듯 집요하게 추격해왔다. 녀석의 날카로운 발톱이 벽을 긁으며 불꽃을 튀겼다.
세라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 낡은 배낭을 바닥에 내던지고, 주머니 속에서 작은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펜던트에는 조그마한 별 모양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부디… 이번 한 번만 더…”
그녀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마법소녀로 변신하는 것은 강력한 힘을 주었지만, 그 대가는 항상 혹독했다.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과 함께, 존재 자체가 마모되는 느낌. 그러나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변이체가 다시 한번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었다. 세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별이여… 속삭이는 빛이여… 저에게… 힘을!”
그녀의 손에 쥐인 펜던트에서 희미한 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빛은 점점 강렬해지며, 잿빛 공기를 가르고 그녀의 몸을 감쌌다. 빛의 폭풍 속에서 세라의 모습이 변해갔다. 낡은 옷은 순백의 드레스로 바뀌었고, 머리칼은 은은한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등 뒤에는 투명한 날개 형상의 빛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고, 손에는 별 모양의 지팡이가 쥐어졌다.
변이체는 순간 움찔했다. 예상치 못한 빛의 강렬함에 잠시 주춤한 것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세라—아니, 이제는 빛나는 마법소녀의 모습으로 변한 그녀가 재빨리 자세를 잡았다.
“너 같은 어둠이… 이 세상을 더럽힐 수는 없어!”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의 가녀린 음성보다 훨씬 또렷하고 강렬했다. 별 지팡이 끝에서 눈부신 빛의 구슬이 생성되었다. 그녀는 그 빛의 구슬을 변이체에게로 날렸다.
콰아앙!
빛의 구슬은 변이체의 거대한 몸에 정통으로 박혔고, 폭발과 함께 녀석의 비명소리가 편의점 안을 가득 채웠다. 녀석의 몸에서 썩어가는 살점들이 튀어 나갔고, 악취가 더욱 진해졌다. 변이체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사납게 날뛰었다. 선반들을 부수고 벽을 때려 부쉈다.
마법소녀는 숨을 고르며 다시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변신은 그녀에게 힘을 주었지만, 동시에 무거운 피로감을 안겨주었다. 온몸의 마력이 빠르게 소진되는 것을 느꼈다. 이 전투는 길어질수록 그녀에게 불리했다.
“끝내야 해… 빨리!”
그녀는 빛의 속도로 변이체에게 달려들었다.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의 검날이 녀석의 거대한 팔을 겨냥했다. 변이체는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황한 듯 몸을 틀었지만, 빛의 검날은 정확히 녀석의 팔을 꿰뚫었다.
크아아아!
변이체는 고통에 찬 포효를 지르며 마법소녀를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날카로운 발톱이 그녀를 덮쳤다. 마법소녀는 가까스로 몸을 비틀어 피했지만, 녀석의 발톱 끝이 그녀의 순백 드레스 자락을 찢어 놓았다.
아슬아슬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빛의 에너지를 모았다. 이제 마지막 일격을 날릴 시간이었다.
“어둠을 꿰뚫는… 별의 섬광!”
그녀의 지팡이 끝에서 황금빛 에너지가 회오리치며 모여들었다. 압축된 빛의 파동이 강력한 광선으로 변해 변이체를 향해 쏘아졌다. 광선은 어둠을 가르며 날아갔고, 녀석의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다.
키에에에엑!
변이체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굳어버렸다. 녀석의 거대한 몸은 서서히 빛의 입자가 되어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재와 악취뿐이었다.
전투가 끝났다. 마법소녀는 지팡이를 짚은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몸을 감싸던 빛은 빠르게 사라지고, 그녀는 다시 낡은 옷을 입은 세라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극심한 피로가 그녀의 온몸을 덮쳤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했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투의 여파로 편의점 내부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녀가 처음 들어왔을 때 발견했던 작은 상자들이 눈에 띄었다. 변이체가 부수지 못한 구석에 아직 남아있는 것들이었다.
몸을 이끌고 상자로 다가갔다. 박스를 열자,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찌그러진 통조림 몇 개, 그리고 비닐봉지에 싸인 채 보존된 듯한 마른 과일 조각들. 그리고 가장 귀한 것, 작은 플라스틱 생수병 두 개.
세라는 통조림 하나를 집어 들고 떨리는 손으로 따기 시작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얼마 만의 제대로 된 식량인가. 그녀는 한 모금 물을 마시고, 허겁지겁 통조림을 입에 넣었다. 짠맛과 비린 맛이 뒤섞였지만,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도 달콤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남은 식량과 물을 챙겨 배낭에 넣었다.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해는 완전히 저물었고, 별조차 보이지 않는 먹구름이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이제 은신처를 찾아야 했다.
그녀는 편의점 한쪽 구석에 있는, 아직 천장이 무너지지 않은 작은 창고를 발견했다. 쓰러진 선반들을 밀어 문을 막고, 낡은 박스들을 끌어모아 작은 잠자리를 만들었다.
배낭을 베개 삼아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오늘 밤도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내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그녀를 짓눌렀다. 언제까지 이렇게 싸워야 할까. 언제쯤 이 지옥 같은 생존이 끝날까.
세라는 배낭 속에서 낡은 인형을 꺼내 품에 안았다. 때 묻고 낡았지만, 그녀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였다. 인형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녀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버텨 줘, 세아.”
그 순간, 창고 밖, 어둠이 짙게 깔린 도시에서 섬뜩한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하나가 아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그것’들이 밤의 장막 아래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그 울음소리는 마치, 마법소녀의 빛이 이 도시의 어둠을 잠시나마 깨웠음을 조롱하는 듯 들렸다.
세라는 인형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그녀의 심장이 다시금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밤하늘을 수놓은 듯 멀리서 깜빡이는 붉은 안광들의 무리였다.
새로운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