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하늘은 여전히 찌푸린 얼굴이었다. 금방이라도 무언가를 쏟아낼 듯했지만, 아무것도 내리지 않았다. 재하는 낡은 건물 잔해 위를 조심스럽게 기어 올라갔다. 발아래 부스러지는 콘크리트 조각들이 위태로운 소리를 냈다. 뒤따르던 유리가 숨을 헐떡이며 그를 올려다봤다.
“이쪽은 아닌 것 같아, 재하 오빠. 너무 위험해.”
유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가늘게 떨렸다. 며칠 전 겪었던 일 때문이리라.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봤고,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재하는 뒤돌아보지 않고 낮게 말했다.
“다른 길은 없어. 저 아래 놈들이 계속 쫓아오고 있어. 여기가 마지막이야.”
그의 시선은 저 멀리, 폐허가 된 도시의 심장부를 향했다. 검은 흉터처럼 늘어선 고층 건물들 사이로, 유일하게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거대한 돔형 구조물이 보였다.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인류 최후의 보루이자 미지의 장소, ‘안전 구역’. 하지만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지옥보다 더 끔찍했다.
간신히 건물 옥상에 도달하자, 사방에서 불어오는 매캐한 바람이 폐부를 찔렀다. 재하는 주변을 살폈다. 낡은 창고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절반은 무너져 내렸지만, 지붕 일부는 간신히 남아 있었다.
“저기. 저 안으로 들어가자.”
유리가 주저하며 말했다. “저 안에 뭐가 있을 줄 알고? 차라리 이쪽으로 돌아가는 게….”
“돌아갈 곳은 없어. 놈들은 우리가 가진 마지막 식량을 노리고 있어. 여기 아니면 끝장이야.”
재하는 대답 대신 굳게 다문 입술로 창고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유리는 더 이상 반박하지 못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그녀는 이제 알았다. 이 지독한 세상에서 재하의 판단은 때로는 자신의 생존 본능보다 더 정확하다는 것을.
창고 내부는 예상보다 넓고 어두웠다. 눅눅한 공기가 코를 찔렀고, 먼지와 곰팡이 냄새가 뒤섞여 역겨움을 유발했다.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줄기 사이로 거미줄과 정체 모를 잔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한때 무엇인가를 보관했던 선반들은 텅 비어 있거나, 녹슨 철골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아무것도 없어. 쓸 만한 건 전부 털어갔어.” 유리가 실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재하는 대답 없이 손전등을 켜 주위를 비췄다. 그의 시선은 바닥에 흩어진 낡은 상자 조각들과 벽면에 희미하게 남은 낙서들을 훑었다. 이곳은 단순한 창고가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낯설면서도 기이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마치 누군가 급하게 떠난 듯, 모든 것이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그때, 재하의 손전등 불빛이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장치에 닿았다. 먼지가 두껍게 앉아 있었지만, 언뜻 보기에도 복잡한 회로와 여러 개의 단자들이 박혀 있었다.
“이건… 발전기인가?” 유리가 신기한 듯 다가갔다.
재하는 장치 주변을 면밀히 살폈다. 흙먼지 아래로 희미하게 빛나는 케이블들이 벽을 타고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케이블이 향하는 곳은, 창고 한쪽에 자리한 굳게 닫힌 강철 문이었다.
“강철 문… 이건 예사롭지 않은데.” 재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발전기에 손을 댔다. 차갑고 단단한 금속의 감촉. 놀랍게도 먼지 아래로 보이는 제어판에는 전원 공급을 나타내는 작은 녹색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전력이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이게 아직 작동하고 있다고?” 유리가 놀라 되물었다. “대체 누가… 언제부터?”
재하는 아무 말 없이 강철 문으로 향했다. 손전등 빛이 문에 새겨진 마크를 비췄다. 낯선 문양이었다. 복잡하게 얽힌 나선형 무늬 안에, 중앙에는 삼각형이 박혀 있었다. 문 옆에는 낡은 키패드가 붙어 있었지만, 숫자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지워져 있었다.
“누군가 이걸 쓰고 있었어. 최근까지.” 재하는 문고리를 잡고 살짝 돌려보았다. 잠겨 있었다.
유리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폐허가 된 이 세상에서, 인적이 끊긴 창고 안에 살아있는 발전기와 잠긴 강철 문이라니. 마치 영화에서나 볼 법한 불길한 장면이었다.
“오빠, 그냥 가지 않으면 안 될까? 여기 뭔가… 기분 나빠.”
“기다려봐.” 재하는 발전기 쪽으로 돌아가서 제어판을 만졌다. 노련하게 몇 개의 버튼을 누르자, 발전기에서 낮고 웅웅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초 후, 강철 문 근처의 키패드에 붉은색 불빛이 들어왔다.
“이런 오래된 기계를 아직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니.” 재하는 중얼거렸다.
그는 키패드를 다시 한번 살폈다. 지워진 숫자들 사이에서, 특이하게 마모된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특정 숫자 버튼만 반복적으로 눌린 흔적이었다. 재하는 기억을 더듬었다. 예전 도시의 보안 시스템에서 자주 쓰이던 방식이었다. 그는 마모가 심한 버튼들을 조합해 비밀번호를 추측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시도. 실패.
두 번째 시도. 실패.
세 번째 시도. 삑-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붉은 불빛이 녹색으로 바뀌었다. 굳게 닫혔던 강철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스르륵 열렸다.
문 안쪽은 또 다른 어둠이었다. 재하는 손전등을 켜고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유리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그의 뒤를 따랐다.
안은 생각보다 협소했다. 작은 복도가 이어져 있었고, 그 끝에는 또 다른 문이 보였다. 그 문을 열자, 마치 시간 여행을 온 듯한 공간이 나타났다.
컴퓨터 단말기와 모니터들이 놓인 작업 공간이었다. 먼지는 쌓여 있었지만, 모든 장비가 놀랍도록 정돈되어 있었다. 마치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것처럼. 한쪽 벽에는 세계 지도가 걸려 있었는데, 오래되어 색이 바래긴 했어도 여러 군데에 알 수 없는 표시들이 되어 있었다. 특히 ‘안전 구역’이라고 표시된 큰 원 주변에 작게 그려진 또 다른 상징이 재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삼각형과 나선형 무늬가 결합된, 문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기원지’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적혀 있었다.
“이게 대체… 뭐야?” 유리가 넋을 잃은 듯 중얼거렸다.
재하는 가장 큰 모니터가 놓인 단말기로 다가갔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화면이 잠시 깜빡이더니 이내 흐릿한 글자들이 나타났다. 오래된 운영체제였지만,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
그는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손가락이 닿는 순간, 스크린에 갑자기 알 수 없는 문자열이 빠르게 지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누군가 외부에서 접근하려 시도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거… 해킹당하는 건가?” 유리가 불안하게 물었다.
“아니… 아니야.” 재하의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이건… 누군가 시스템에 접속하려고 하는 게 아니야. 누군가 *안에서* 이걸 조작하고 있었어. 아니, 조작 *당하고* 있었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화면에 새로운 창이 떴다. 암호로 잠겨 있는 데이터 파일 목록이었다. 그 중 가장 상단에 있는 파일의 이름은 ‘프로젝트_블랙_썬.log’였다.
“블랙 선…?” 유리가 파일 이름을 읽었다.
재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 파일을 클릭했다. 비밀번호 입력 창이 떴지만, 재하는 망설이지 않고 아까 문을 열었던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경고음과 함께 파일이 열렸다. 화면 가득히 알 수 없는 좌표와 보고서들이 빼곡히 채워졌다. 내용은 난해했지만, 마지막 부분에 날짜가 찍힌 짧은 메시지가 재하의 눈에 들어왔다.
`…결과 예측 실패. 통제 불능. 모두에게 알린다. 기원지는… 안전 구역은… 그들은…`
메시지는 거기서 끊겨 있었다. 미처 완성되지 못한 문장들이 혼란스럽게 이어졌다. 마지막 문장이 끝나지 않은 채로, 화면은 검게 변했다.
“이게 뭐야? 대체 무슨 소리야?” 유리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때였다.
쿵. 쿵.
아주 희미하게, 저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둔탁한 진동이 발아래로 전해졌다.
재하는 숨을 들이켰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그는 직감했다. 이건 단순한 폐허의 소음이 아니었다.
쿵… 쿵…!
진동이 훨씬 더 가까워졌다. 작업실 안의 낡은 의자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먼지가 천장에서 우수수 떨어졌다.
“재하 오빠, 무슨 소리야?” 유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조용히 해….” 재하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저 소리는… 크고, 무거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살아있는* 소리였다.
쿵!! 쿵!! 쿵!!
이제는 건물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강력한 진동이었다. 바로 옆방에서 들려오는 듯한 굉음에, 재하는 모니터에 연결된 낡은 USB 메모리 스틱을 거칠게 뽑아들었다. 지도를 찍은 사진과 함께 저장된 파일을 옮겨 담을 시간은 없었다.
“뛰어, 유리! 빨리!”
재하는 유리의 손목을 잡고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렸다. 강철 문을 통과하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 눅눅한 창고 안으로 나왔다.
쿵!!!
창고 바깥쪽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충격음. 창고 벽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이쪽이야!” 재하는 무너진 창고 벽의 틈새로 몸을 던졌다. 유리가 비명처럼 재하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따랐다.
그들이 폐허 바깥으로 겨우 몸을 빼냈을 때, 뒤에서는 거대한 포효가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
귀를 찢는 듯한 소리였다. 재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유리의 손을 더욱 꽉 잡고, 무너지는 잔해들과 먼지 구름 속을 뚫고 달렸다.
그들은 달리고 또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겨우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바위 틈새에 몸을 숨겼을 때, 재하는 비로소 숨을 몰아쉬며 손에 쥔 USB를 내려다봤다.
낡은 USB는 희미한 파란 불빛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가 급히 빼내느라 파일이 온전히 저장되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마지막 메시지, 그리고 지도에 찍힌 ‘기원지’라는 글자가 계속 맴돌았다.
소문에 불과했던 ‘안전 구역’은 어쩌면 거대한 함정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기원지’는… 도대체 무엇의 시작점이라는 말인가?
그때, 저 멀리 폐허 속에서 다시 한번 끔찍한 포효가 울려 퍼졌다.
재하는 눈을 감았다.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알 수 없는 미스터리의 끝은 어디일까?
그리고 저 끔찍한 괴물들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