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막: 그림자의 맹세
비가 내렸다. 도시의 회색빛 속으로 스며드는 차가운 물방울들이, 마치 내 심장 속의 냉기를 형상화한 듯했다. 높이 솟은 마천루들의 실루엣은 먹물을 흩뿌린 수묵화처럼 흐릿했고, 빌딩 숲 사이를 가로지르는 도로 위로 차량들의 불빛이 길고 끈적한 뱀처럼 기어 다녔다. 나는 그 모든 풍경 속에 숨어, 나만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한때는 나도 저 빛 속에서 웃고 떠들었다. 세상이 가진 경이로움에 눈을 반짝이며, 함께 미래를 꿈꿨다. ‘친구’라고 믿었던 그 녀석과 함께. 그 녀석을 처음 만난 건, 낡은 훈련장 구석이었다. 땀 흘리며 웃던 얼굴, 서로의 등을 맡기며 미지의 위험에 맞서던 시절. 그때는 몰랐다. 그 미소 뒤에, 얼마나 깊은 나락이 숨어있을 줄은. 그 녀석의 손에 쥐어진 칼날이, 내 등 뒤를 얼마나 처참하게 갈라놓을 줄은.
생사의 경계에서 헤맬 때, 내 안에서 무언가가 깨어났다. 부서지고 조각난 조각들이 모여, 어둡고 뒤틀린 형태로 재탄생했다. 이제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과거의 강민준은 죽었다. 오직 복수를 위해 숨 쉬는, 그림자 속의 괴물만이 남았다.
축축한 골목을 따라 걸었다. 하수구에서 솟아나는 비릿한 냄새와 빗물에 젖은 쓰레기들의 악취가 코를 찔렀다. 발자국 소리조차 내지 않고, 나는 어둠 그 자체가 되어 움직였다. 목표는 저 앞에 있었다. 폐쇄된 철공소 건물, 녹슨 셔터 너머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불빛. 김도윤. 네 녀석은 어땠을까. 그날, 내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을 때, 너는 무슨 생각을 했지? 그 녀석의 편에 서서, 네가 얻어낸 대가는 무엇이었을까.
철공소 셔터 틈새로 내부를 엿봤다. 낡은 작업대에 비스듬히 앉아 불안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남자가 보였다. 김도윤. 한때는 함께 훈련하며 웃고 떠들던 동료. 이제는 그 녀석의 충실한 개가 되어, 내 심장을 파고든 칼날에 힘을 보탠 배신자. 그의 얼굴에는 피로와 초조함이 역력했다. 뭔가 중요한 거래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좋아. 그 거래, 내가 대신 받아주지.
나는 조용히 셔터를 들어 올렸다. 삐걱이는 쇳소리가 적막을 찢었다. 김도윤의 몸이 흠칫 떨리더니, 고개가 천천히 이쪽으로 돌아왔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처음에는 낯선 침입자인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빗물을 머금은 내 검은 코트와, 그림자 속에 가려진 내 얼굴을 본 순간, 그의 안색은 잿빛으로 변했다.
“민… 민준이 형?”
그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렸다. 마치 유령을 본 것처럼. 그래, 나는 너희에겐 유령과 다름없겠지. 죽었다고 생각했을 테니.
“오랜만이군, 도윤아.”
내 목소리는 메마르고 차가웠다. 마치 얼음 조각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 같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내 눈동자가 그의 공포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형… 형이 어떻게… 살아있었어요?”
김도윤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등 뒤로 손을 뻗어 허리춤에 찬 짧은 날붙이를 움켜쥐려 했다. 나는 그의 행동을 예상이라도 한 듯,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였다.
쉬이이익!
어둠의 잔재가 내 손끝에서 끓어올랐다. 마치 내 안의 모든 절망이 형상화된 것처럼, 칠흑 같은 기운이 공기를 일렁였다. 형체를 알 수 없는 어둠의 촉수들이 순식간에 그의 손목을 휘감았다. 녀석의 손에 닿기도 전에, 그가 허리춤에서 칼을 뽑으려던 움직임이 뚝 끊겼다.
“크악!”
김도윤은 비명을 질렀다. 어둠의 촉수는 그의 살을 파고들었고, 피부 위로 검은 그림자가 번지는 것이 보였다.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젠장! 이건… 뭐야?!”
“네가 한 짓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나는 한 발짝 더 다가섰다. 내 발걸음마다 바닥의 물웅덩이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김도윤은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올려다봤다. 그의 눈에는 공포와 함께, 미약한 후회 같은 감정마저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아니, 착각일 것이다. 너희에게 후회 따위는 없어.
“형… 제발… 살려주세요! 저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그 녀석이… 이현수가…!”
이현수. 그 이름이 나오자, 내 심장 저 밑바닥에서 뜨거운 불꽃이 타올랐다. 복수를 향한 갈증이 온몸을 휘감는 듯했다.
“그 녀석의 이름은 함부로 입에 담지 마라.”
내 목소리가 더 낮고 위협적으로 변했다. 어둠의 촉수가 김도윤의 목까지 기어 올라가 조여들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콜록… 콜록… 제발… 말할게요… 다 말할게요…!”
나는 그의 목을 조이던 어둠의 압력을 조금 풀었다. 그는 기침을 콜록이며 허겁지겁 공기를 들이마셨다.
“현수는… 현수는 지금 새로운 ‘구역’을 손에 넣으려고 하고 있어요! 강남 뒷골목에 있는… 오래된 봉인 구역이에요! 거기를 장악하면… 막대한 힘을 손에 넣을 거라고…!”
봉인 구역. 그곳에는 고대부터 봉인된 강력한 존재나 유물들이 잠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현수는 그 힘을 노리고 있었다. 늘 그랬다. 남을 짓밟고 올라서서, 더 큰 힘을 쟁취하려는 욕망. 그 욕망 때문에 나를 배신했고, 이제는 도시 전체를 위협하려 드는군.
“그 구역의 위치는? 그리고 그곳을 봉인 해제할 방법은?”
내 질문에 김도윤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듯했다.
“위치는… 구 한성병원 지하예요! 그리고 해제 방법은… 몰라요! 하지만 현수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오랫동안 추적해온 고문서가 있어요! ‘묵룡비록’이라고… 그걸 손에 넣으려고…!”
묵룡비록. 잊고 있던 이름이었다. 한때 우리 모두가 그 존재를 추적했었다. 강력한 고대 마법의 지식이 담겨 있다고 알려진 위험한 문서. 이현수가 그토록 원하던 것이 그것이었군.
“그 고문서는 어디에 있지?”
내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김도윤은 공포에 질려 눈을 감았다.
“몰라요… 현수만 알아요! 하지만… 하지만 최근에 현수가 그 고문서를 해독할 수 있는 자를 찾았다고 했어요! 고서 연구가… 이름은 모르겠는데… 그 사람을 강남에 있는 자기 은신처로 데려갔어요!”
강남의 은신처. 구 한성병원 지하의 봉인 구역. 묵룡비록. 모든 조각이 맞춰지는 듯했다. 이현수는 그 고문서를 이용해 봉인 구역의 힘을 해제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계획은, 곧 절정에 달할 터였다.
“좋은 정보 고맙다, 도윤아.”
나는 피식 웃었다. 내 얼굴에 스치는 싸늘한 미소는 김도윤에게는 지옥의 그림자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는 공포에 질려 몸을 떨었다.
“형… 약속한 거죠? 살려주신다고…!”
“약속?”
나는 어둠의 촉수로 그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내가 너희에게 약속 따위를 지킬 거라 생각했나?”
어둠의 촉수가 그의 목을 다시금 조였다. 이번에는 더욱 강하게, 단숨에. 김도윤의 두 눈이 번쩍 뜨이더니, 그대로 축 늘어졌다. 그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검은 촉수는 마치 영양분을 흡수하듯 그의 몸을 잠시 휘감았다가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차갑게 식어가는 시체만이 남았다.
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빗소리는 여전히 거셌고, 도시의 불빛은 무심하게 빛나고 있었다. 김도윤은 그저 시작일 뿐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이현수, 그리고 그 녀석의 그림자 뒤에 숨어있던 모든 배신자들.
내 안의 어둠이 속삭였다. **끝을 내야 할 때다.**
강남의 하늘, 그곳에 드리울 핏빛 그림자를 예고하며, 나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복수의 맹세가, 내 심장을 불타오르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