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잿빛 새벽이었다. 칼바람이 찢어지는 비명처럼 잿골 마을의 낡은 지붕들을 할퀴고 지나갔다. 움츠린 몸으로 불씨 하나 없는 아궁이 앞에 앉아 있던 강휘는 뼈 속까지 스며드는 한기에 무심하게 몸을 떨었다. 밤새 내린 눈은 이미 더러운 발자국들로 짓밟혀 온통 회색빛으로 변해 있었다.

강휘의 낡은 외투 위로 어둠이 스미는 것 같았다. 그의 눈동자는 동굴 속 불꽃처럼 희미했지만, 그 속에는 결코 꺼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망설임, 분노, 그리고 지독한 절망. 이 모든 감정들이 뒤섞여 강휘라는 젊은 사내의 깊은 곳에 응어리져 있었다.

“강휘야, 일어났느냐.”

쉰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한서 영감이었다. 마을의 가장 오랜 어른이자, 강휘에게는 부모님보다 더 큰 존재. 영감은 가느다란 몸으로 차가운 마루에 앉아 희미한 새벽 공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속에는 수십 년을 짊어진 고통이 담겨 있었다.

“오셨어요, 영감님.”

강휘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창밖의 희뿌연 하늘에 박혀 있었다. 머지않아 해가 뜨면, 새로운 고통이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칼리온 제국의 징세관들이 다시 이 잿골 마을을 찾아올 것이었다.

제국은 거대했다. 한때는 번영과 평화의 상징이었으나, 이제는 탐욕과 폭정의 화신이 되어 대륙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전쟁, 사치를 위한 무자비한 착취, 그리고 평민들의 피땀을 쥐어짜는 세금. 잿골 같은 변방의 마을들은 제국의 거대한 톱니바퀴에 갈려나가는 마지막 조각들이었다.

이윽고, 먼지 섞인 눈밭 위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차갑고 날카로운 쇳소리. 강휘의 주먹이 저절로 쥐어졌다. 그의 손등 위로 굵은 힘줄이 솟아올랐다.

“온다.”

영감의 목소리가 덤덤하게 이어졌다. 강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익숙한 풍경이었다. 제국 기사단의 짙푸른 망토가 잿빛 마을과 대조적으로 선명하게 보였다. 그들의 갑옷은 새벽 햇살을 받아 번쩍였다. 그들의 뒤로는 마차 한 대가 끌려오고 있었다. 식량이나 물자를 싣는 마차가 아니었다. 사람을 싣는 마차였다.

기사단장 데미안이 거만한 표정으로 말에서 내렸다. 그의 발걸음은 마치 마을 전체를 짓밟는 것처럼 무거웠다. 그의 뒤를 따르는 병사들은 이미 이 모든 일에 익숙한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어이, 잿골의 쥐새끼들! 어서 나와라!”

데미안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자, 낡은 오두막들에서 하나둘씩 사람들이 기어 나왔다. 추위와 배고픔에 찌든 얼굴들. 어린아이들은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고 바들바들 떨었고, 노인들은 뼈만 남은 손으로 서로의 등을 토닥였다. 모두가 두려움과 절망을 머금은 눈으로 데미안을 응시했다.

“세금이 부족하다는 보고를 받았다. 칼리온 제국의 은혜를 입고 살면서, 이 정도의 공물도 바치지 못하다니. 불경하구나.”

데미안이 콧웃음을 쳤다. 그의 눈은 마을 사람들을 훑으며 마치 가축을 고르듯 물건처럼 대했다.

“지난번에는 곡식을 가져갔고, 그 전에는 철물을 가져갔소. 이제는 더 이상 바칠 것이 없소이다, 기사단장님.”

한서 영감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등은 굽었지만, 눈빛만큼은 흔들림이 없었다. 수많은 세월을 제국의 압제 아래에서 버텨온 자의 고집스러운 눈빛이었다.

“없다고? 흥, 칼리온 제국은 자비롭지. 바칠 것이 없다면, 너희 몸으로 대신하면 되지 않느냐.”

데미안이 손짓하자, 병사들이 마차의 덮개를 걷어냈다. 쇠창살 안에는 이미 몇몇 마을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모두 지난번 공물을 바치지 못해 끌려갔던 이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와 함께 체념이 가득했다.

“오늘 공물은, 젊은 일꾼 다섯 명이다. 당장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지난번처럼 마을 전체를 불태울 수도 있다.”

데미안의 협박에 마을 사람들이 술렁였다. 젊은 일꾼은 마을의 전부였다. 그들이 사라지면, 잿골 마을은 완전히 황폐해질 터였다.

“강휘야, 안 된다.”

강휘는 앞으로 나섰다. 그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의 눈은 데미안을 쏘아보고 있었다.

“기사단장님. 보십시오, 이 마을에 남은 곡식은 단 한 톨도 없습니다. 젊은이들을 데려가시면, 남아 있는 아이들과 노인들은 모두 굶어 죽을 것입니다.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강휘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그러나 데미안은 코웃음을 쳤다.

“자비? 제국에 반항하는 자들에게 자비는 사치다. 다섯 명이다. 당장 내놓지 못하면, 내가 직접 고르겠다.”

데미안의 시선이 마을 사람들을 스쳤다. 그리고 이내 한 곳에 멈췄다. 강휘의 옆에 서 있던, 이제 겨우 열두 살 남짓 된 어린 소년, ‘찬이’였다. 찬이는 한서 영감의 유일한 손자이자, 마을의 몇 안 되는 희망이었다. 찬이는 두려움에 질려 강휘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저 아이로군. 어려 보여도 뼈대가 굵으니, 광산에서 제 몫은 하겠지.”

데미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병사들이 찬이에게 달려들었다.

“안 돼! 멈춰라!”

강휘는 몸을 날려 찬이를 가로막았다. 그의 눈은 이미 이성을 잃은 짐승처럼 번뜩였다. 분노가 그의 심장을 집어삼켰다.

“이런 건방진 쥐새끼가! 감히 제국 기사에게 대항하려 드느냐!”

데미안의 검이 강휘의 얼굴 앞을 스쳐 지나갔다. 차가운 쇳덩이가 살을 찢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강휘는 비틀거렸지만, 찬이를 놓지 않았다.

“강휘야! 안 된다! 참아야 한다!”

한서 영감이 강휘를 붙잡았다. 그의 얼굴은 피가 몰려 붉게 달아올랐지만, 그는 강휘를 놓아주지 않았다. 영감의 팔은 가늘었지만, 그 속에는 오랜 인고의 힘이 담겨 있었다.

“영감님, 이대로 두면 찬이는…! 우린 모두 죽습니다!”

강휘는 절규했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린 자의 건조한 눈빛이었다.

“살아야 해, 강휘야. 언젠가는… 언젠가는 끝이 올 것이다.”

영감의 목소리에는 슬픔과 함께 알 수 없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병사들은 결국 찬이를 끌고 갔다. 찬이의 비명이 잿골 마을의 하늘을 찢었다. 그의 어머니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고, 마을 사람들은 고개를 떨군 채 흐느꼈다. 그들의 등은 모두 굽어 있었지만, 강휘는 그들의 눈 속에서 보았다. 굴종이 아닌, 차갑게 식어가는 분노의 불씨를.

강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그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눈은 데미안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 너머, 제국의 심장이 있는 곳을 향해 있었다.

한서 영감은 찬이를 실은 마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내 강휘의 어깨를 붙잡았다.

“찬이는…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돌아올 거야.”

영감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의 눈은 강휘를 꿰뚫었다.

“강휘야. 제국은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더 이상 이렇게는 살 수 없어. 사람들의 마음에, 이제는 절망보다 더 큰 것이 자라고 있어. 너는 그것을 보았을 것이다.”

강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 속에서, 희미했던 불꽃이 점차 강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절망은 그를 집어삼키지 못했다. 오히려 그에게 새로운 의지를 심어주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대로는 결코.

강휘는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자신처럼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 잿빛 하늘 아래에서, 그는 무언가를 시작하려 했다. 그것이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날 이후 잿골 마을의 밤은 더 이상 고요하지 않았다. 작은 속삭임들이, 거대한 제국을 뒤흔들 반란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

새로운 챕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암흑 속에 잠겨 있던 자들이 눈을 뜨고, 불가능해 보이는 싸움을 시작하려는 순간. 그들의 심장 속에는 절규 대신, 비로소 희망이라는 이름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비록 그것이 작은 불씨에 불과할지라도, 언젠가는 제국 전체를 삼킬 거대한 불길이 될 것이라는 예감과 함께. 강휘는 그 불길의 시작이 자신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