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하늘은 언제나처럼 무겁게 짓눌러 있었다. 한때 번화했을 도시는 이젠 철골과 콘크리트 잔해만이 앙상하게 드러난 유령의 미궁이었다. 부서진 아스팔트 틈새로 독기 품은 덩굴 식물들이 뻗어 나와 건물 전체를 집어삼킬 듯 뒤덮고 있었다. 그 독한 풀들 사이를 헤치며, 유리와 미나는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언니, 목말라…”
작은 손이 유리의 치맛자락을 당겼다. 미나의 얼굴은 먼지와 땀으로 얼룩져 있었고, 메마른 입술은 파르르 떨렸다. 유리는 낡은 배낭에서 겨우 찾아낸 물병을 꺼냈다. 바닥에 깔린 물은 한 모금도 채 되지 않았다.
“미안해, 미나. 이게 전부야.”
유리는 물 한 방울이라도 더 먹이려는 듯 병을 기울였지만, 미나는 고개를 저었다.
“언니가 더 마셔. 언니 힘내야 하잖아.”
가슴이 저릿했다. 겨우 일곱 살밖에 안 된 동생은 이 끔찍한 세상에서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렸다. 유리는 억지로 웃어 보이며 물을 조금만 입에 축인 뒤, 다시 미나에게 건넸다. 미나는 마지못해 남은 물을 조심스럽게 삼켰다.
“조금만 더 가면 돼. 저기, 저 빌딩 잔해… 거기 안에 뭐가 있을지 몰라.”
유리가 가리킨 곳은 날카롭게 부서진 유리 조각들이 거미줄처럼 박혀 있는 거대한 건물이었다. 한때는 누군가의 꿈이었을, 아름다운 주상복합 건물이 지금은 그저 거대한 무덤처럼 서 있었다. 희망보다는 절망이 더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발걸음은 무거웠다. 며칠째 제대로 된 식량은 입에 대지도 못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미나의 작은 체온만이 유리가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원동력이었다. 이곳, 우리가 ‘어둠의 땅’이라 부르는 곳에서는 희망이란 사치에 불과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킨 ‘황혼의 재앙’ 이후, 세상은 마물들의 놀이터가 되었고, 인간은 그저 연약한 먹잇감일 뿐이었다.
그때였다.
삭막한 정적을 찢는 날카로운 울음소리. 동시에 땅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미나!”
유리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본능적으로 미나를 끌어당겨 거대한 잔해 뒤로 몸을 숨겼다. 등 뒤로 미나의 작은 몸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유리는 이를 악물었다.
저것은… ‘그림자 사냥개’. 재앙 이후 나타난 최악의 포식자 중 하나였다. 어둠 속에서 태어난 듯한 검은 털과 핏빛으로 빛나는 눈동자, 그리고 날카로운 송곳니는 공포 그 자체였다. 한때는 인간의 친구였을 개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 더 기괴했다.
끼이이잉-!
사냥개가 잔해 더미를 파헤치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코를 킁킁거리며 인간의 미약한 체취를 쫓는 것이 분명했다. 유리의 심장이 발아래까지 떨어지는 듯했다. 이곳에서 이 녀석과 마주친다면…
‘젠장, 미나…!’
유리는 이를 악물었다. 피할 수 없다면, 싸워야 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미나, 언니가 신호하면 달리는 거야. 알았지?”
유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미나는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는 허리춤에 찬 낡은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펜던트에서는 언제나 그녀에게 힘을 주었던 따뜻한 온기가 흘러나왔다.
끼이이잉!
사냥개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거친 숨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놈의 핏빛 눈동자가 잔해 틈새로 유리의 시선을 찾고 있었다.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지금이야, 미나! 달려!”
유리가 소리치는 동시에 몸을 날려 잔해 뒤에서 뛰쳐나왔다. 사냥개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하는 순간, 유리는 펜던트를 높이 치켜들었다.
“빛이여, 나의 검이 되어라!”
차갑고 딱딱한 금속성 목소리가 폐허 위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펜던트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은 유리의 몸을 감싸 안았고, 낡고 해진 옷은 순식간에 눈부신 순백의 전투복으로 변했다. 짧은 치마와 망토, 그리고 빛나는 부츠. 무엇보다, 손에 쥐어진 것은 한 줄기 빛으로 이루어진 투명한 활이었다.
마법소녀, ‘루미나’.
사냥개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잠시 주춤했다. 놈의 핏빛 눈동자에 혼란이 스치는 듯했다. 하지만 곧 이성을 되찾고,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유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빨이 번뜩였다.
유리는 활시위를 당겼다. 빛으로 된 화살이 활시위에 걸리고, 그녀의 의지에 따라 빛을 응축했다.
“하아압!”
쉬이이익-!
화살은 번개처럼 날아가 사냥개의 옆구리를 정확히 꿰뚫었다. 그림자 같은 털이 흩날리며 놈이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놈은 보통 짐승이 아니었다. 상처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더욱 사납게 유리를 향해 돌진했다.
‘젠장, 재생력이 이렇게 빠르다니!’
유리는 발로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사냥개의 공격을 피했다. 놈의 발톱이 아까 유리가 서 있던 곳을 파고들며 콘크리트 조각들을 튀겼다. 위협적이었다. 루미나의 힘은 강했지만, 이 마물들은 보통의 물리 법칙을 무시했다.
유리는 다시 활시위를 당겼다. 이번에는 화살 끝에 더욱 강력한 빛 에너지를 담았다.
“섬광탄!”
화살은 사냥개의 눈앞에서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 사방을 뒤덮었고, 사냥개는 괴로운 듯 앞발로 눈을 가리며 휘청거렸다.
이때였다.
유리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활을 버리고, 양손에서 빛 에너지를 끌어모았다. 그녀의 손바닥에 순수한 빛의 구체가 형성되었다.
“정화의 빛!”
그녀는 구체를 사냥개의 머리에 정면으로 던졌다. 놈의 눈이 감겨져 있는 틈을 노린 것이다. 빛의 구체는 놈의 머리에 닿자마자 폭발했고, 사냥개의 몸을 집어삼킬 듯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놈의 검은 몸이 빛에 휩싸여 마치 녹아내리는 듯 일그러졌다. 끔찍한 비명소리가 폐허에 울려 퍼졌다.
빛이 사그라들고, 사냥개가 있던 자리에는 검은 재만 남았다. 유리는 겨우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피로감이 밀려왔다. 마법소녀의 힘을 사용하는 것은 그녀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일이었다. 순백의 전투복이 흐릿해지며 다시 낡은 옷으로 돌아왔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언니!”
미나가 잔해 뒤에서 달려 나와 유리를 껴안았다. 작은 몸이 유리의 허리에 매달렸다.
“괜찮아… 미나, 괜찮아… 언니는 괜찮아.”
유리는 애써 웃으며 미나의 등을 토닥였다. 하지만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방금 전의 위협이 얼마나 아찔했는지 실감했다. 그녀는 이 작은 아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어디까지 몰아붙일 수 있을까.
해가 지고 있었다. 붉고 탁한 노을이 먼지 가득한 하늘을 물들였다. 잿빛 건물 잔해들이 길고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밤이 오면 마물들은 더욱 활개를 칠 것이다.
“언니, 우리… 어디로 가야 해?”
미나의 질문에 유리는 대답할 수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이 황폐한 세상에서, 안전한 곳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할까?
그때, 유리의 시선이 저 멀리, 폐허 너머에 있는 무언가에 닿았다.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우뚝 솟아있는, 거대한 통신탑의 잔해였다. 탑의 꼭대기에서, 아주 희미하게, 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유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환각일지도 몰랐다. 혹은 또 다른 함정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나, 저기 봐.”
유리는 미나의 작은 손을 잡고 통신탑을 가리켰다.
“저곳이라면… 어쩌면, 어쩌면 사람들이 있을지도 몰라.”
희미한 빛. 어쩌면 그 빛이 희망의 마지막 조각일 수도 있었다. 절망밖에 없던 세상에서, 유리는 다시 한번 발걸음을 내딛었다. 비록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할지 알 수 없어도, 그녀의 작은 동생 미나가 손을 잡고 있는 한, 그녀는 계속 걸어야 했다. 빛을 쫓아서. 미약한 희망을 쫓아서.
“가자, 미나. 우리에게 내일이 있다면, 저곳에 있을 거야.”
유리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러나 떨리는 손과 지친 얼굴은 그녀의 결의 뒤에 숨겨진 불안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어쩌면 그곳은 또 다른 지옥일지도 모르지만, 이대로 멈춰 설 수는 없었다. 절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