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독립적인 단편 소설

대학교 본관 뒤편, 미로 같은 통로 끝에 자리한 ‘고서적 특별 자료실’은 정지아에게 도피처이자 동시에 지루한 감옥이었다. 스물여섯의 그녀는 이곳에서 먼지 쌓인 책들 사이에 파묻혀 시간을 보냈다. 유리창 너머로 간간이 보이는 캠퍼스의 활기찬 풍경은 그녀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사랑? 로맨스? 그런 건 판타지 소설에나 나오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현실은 그저 낡은 장갑을 끼고 수백 년 된 양피지를 뒤적이며 고문서의 습도를 체크하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정말 지루함의 미학이 뭔지 제대로 보여주는군.”

지아는 중얼거리며 삐걱거리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가장 높은 선반, 거의 천장에 닿을 듯한 곳에는 지난 백 년간 아무도 손대지 않았을 법한 책들이 빼곡했다. 고서적 목록에는 없지만, 버리자니 아까워 보이는 애매한 책들. 오늘 그녀의 임무는 그 책들을 분류하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낡은 고문서 더미 뒤에서 뭔가 둔탁한 소리가 났다. 툭! 지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촛대처럼 생긴 오래된 램프를 밀어냈다. 그 뒤에는 닳고 닳아 나무결조차 희미해진 작은 상자가 숨어있었다. 먼지가 앉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상자를 들어 올리자, 왠지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쩌면 전설 속 보물 지도가 들어있을지도? 아니면 엄청난 금화가?

지아는 기대 반, 설렘 반으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화려한 보석이나 금화는커녕, 손바닥만 한 매끄러운 검은 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밤하늘의 조각을 잘라낸 것 같았다. 차갑고 단단한 질감. 아무런 문양도, 장식도 없었지만 묘하게 시선을 끄는 오묘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뭐야, 그냥 돌멩이잖아.”

실망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그래도 어딘가 끌리는 마음을 부정할 수 없어, 지아는 그 돌을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어차피 아무도 찾지 않을 물건이었다.

그날 오후. 늘 그렇듯 고요한 자료실의 정적을 깨고 문이 열렸다. 척 봐도 ‘엘리트’ 티가 나는 남자가 들어섰다. 날렵한 콧날, 지적인 안경, 그리고 늘 완벽하게 정돈된 헤어스타일. 이현우. 역사학과 박사 과정생으로, 이 자료실의 거의 유일한 단골손님이었다. 그는 고풍스러운 문헌들 사이에서만 편안함을 느끼는 듯한 사람이었다. 지아에게는 그저 ‘고고학 덕후’ 또는 ‘걸어 다니는 박물관’ 같은 이미지였다.

“정지아 씨,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고대 주술 문화의 이해』라는 책, 혹시 그 책장에 있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완벽한 표준어였다. 지아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아, 그 책. 분명히 그쪽 구석에 있었는데.’

하지만 선뜻 “없어요”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건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지아는 겉으로는 평온한 척하며 그 책이 있을 법한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온갖 짜증이 솟구쳤다. 왜 하필 이 시간에? 저 까다로운 인간은 왜 또 저 책을 찾는 거야? 그가 찾는 책들은 하나같이 먼지투성이거나 손으로 필사된 난해한 것들이었다.

그녀가 낡은 책장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던 그때였다. 그녀의 주머니 속에 있던 검은 돌멩이가 왠지 모르게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선반 위에 아슬아슬하게 쌓여있던 책 더미가 삐걱거리더니…

콰당탕!

거대한 소리와 함께 책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하필이면 이현우가 서 있던 바로 코앞이었다. 그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고, 몇몇 책은 그의 발치에 떨어졌다.

“어어… 저, 저기! 괜찮으세요?!”

지아는 망연자실해서 외쳤다. 맙소사, 분명히 그렇게 불안하게 쌓여있지 않았는데.

“괜찮습니다. 다만… 갑자기 왜 이렇게 무너지는지 모르겠군요.” 현우는 안경을 고쳐 쓰며 의아한 표정으로 무너진 책들을 바라봤다. “혹시 책장을 흔들었습니까?”

“아니요! 제가 왜 책장을 흔들어요! 저도 놀랐다구요!”

지아는 억울함에 눈꼬리가 치솟았다. 분명 자기가 한 짓이 아니었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며칠 후, 이상한 일들은 계속되었다.

지아는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먹으며 이현우가 고대 언어로 쓰인 두루마리 앞에서 골똘히 고민하는 모습을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정말 저런 게 재밌을까? 맨날 저렇게 심각하게. 누가 보면 온 세상을 구하는 줄 알겠네.’

그녀의 속마음은 그를 비웃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의 집중한 옆모습이 왠지 모르게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이현우가 들고 있던 두루마리가 갑자기 스르륵, 말려들어 가더니 팽팽하게 감겨버렸다. 그가 당황한 얼굴로 두루마리를 펼치려 했지만, 이미 완벽하게 돌돌 말려 더는 펴지지 않았다.

“이런… 이게 왜 이렇죠?” 현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지아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때 문득 주머니 속 검은 돌멩이가 또다시 미지근해진 걸 깨달았다. 설마?

그날 이후, 지아는 검은 돌멩이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진실과 마주했다. 돌멩이는 그녀의 강렬한 감정, 특히 당황스러움, 짜증, 혹은 숨기고 싶은 비밀스러운 감정이 솟아날 때마다 반응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주변의 물건들이 그녀의 감정을 ‘대신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현우가 자료실에 들어설 때마다, 지아가 속으로 ‘아, 저 남자 또 왔네’ 하고 생각하면 자료실 문이 ‘끼이이익-!’ 하는 음산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녀가 현우의 말에 은근히 기분 나빠하면, 선반 위의 작은 먼지들이 일제히 그의 쪽으로 ‘스윽’ 날아갔다. 그녀가 이현우를 몰래 훔쳐보며 ‘오늘따라 왜 저렇게 잘생겼지?’ 하고 생각하면, 그가 읽던 책의 페이지가 갑자기 ‘스르륵’ 저절로 넘어가면서 왠지 모르게 더 극적인 순간을 연출했다.

정신병인가? 지아는 자기 자신을 의심했다. 하지만 주머니 속 돌멩이는 언제나 그녀의 강력한 감정들에 솔직하게 반응했고, 주변 물건들은 그녀의 마음을 여과 없이 표현했다.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한 주 뒤에 벌어졌다.

자료실에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이 있었다. 도서관장이 귀빈들을 모시고 희귀본 컬렉션을 소개하는 날이었다. 지아는 보조로 서서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현우도 그 자리에 함께했다. 그는 중요한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며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었다.

지아는 내심 그가 자랑스러웠다. 동시에, 늘 자신에게만 딱딱하게 대하는 그가 얄밉기도 했다.

‘저렇게 멋있는 사람이 왜 나한테는 맨날 딱딱할까? 나도 좀 봐주면 어디 덧나나? 아, 진짜 짜증 나!’

그녀의 속마음은 순식간에 복잡한 감정들로 뒤엉켰다. 그때였다.

휘이이이잉-!

자료실 한가운데, 수십 년 된 벽시계가 갑자기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태엽 돌아가는 소리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이어서 선반 위의 작은 장식품들이 공중에 붕 뜨기 시작하더니, 이리저리 부딪히며 불안하게 흔들렸다. 귀빈들의 얼굴에는 공포가 서렸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도서관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소리쳤다.

지아는 패닉에 빠졌다. 주머니 속 돌멩이는 마치 불덩이처럼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녀의 감정이 너무 강해지자, 마법이 폭주한 것이다.

그녀의 눈에 이현우가 들어왔다. 그는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지아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뭔가 깊은 곳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정지아 씨! 그 돌!” 현우가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말에 지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돌멩이는 너무 뜨거워서 잡고 있을 수 없을 정도였다. 물건들은 더욱 격렬하게 떠다녔다.

“이, 이걸 어떻게…!” 지아는 어쩔 줄 몰라했다.

“집중하세요! 진정하세요! 당신의 감정입니다!” 현우가 그녀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냉철함 대신 다급함이 섞여 있었다.

지아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감정?

“당신이 느끼는 감정을 보세요! 지금 가장 강렬한 감정은 무엇입니까?”

지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두려움, 짜증, 혼란… 그리고… 현우를 향한 복잡한 마음. 그가 자신을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그리고… 어쩌면… 그를 좋아하는 마음.

그 감정들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치자, 공중에 떠다니던 모든 물건이 우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단 하나, 이현우의 앞에 있던 오래된 잉크병만이 지아의 눈높이까지 스르륵 떠올랐다. 그리고 병마개가 저절로 열리더니, 잉크가 한 방울, 한 방울… 그의 잘생긴 얼굴 위로 떨어졌다.

팟, 팟, 팟.

현우의 안경알에, 코끝에, 그리고 입술에 잉크 방울이 튀었다.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먹물 화장이라도 한 듯 얼룩덜룩해졌다.

자료실은 한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도서관장의 비명과 귀빈들의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이현우는 눈을 감고 잉크 방울을 맞다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얼굴은 잉크 범벅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오직 지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좋아하는군요.”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차분했다. 마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발견한 학자처럼.

지아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붉어졌다. “네?! 뭘요? 뭐가요?!”

그녀가 당황하자,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잉크병이 또다시 솟아올라 그의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현우는 잉크 범벅이 된 얼굴로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은 평소의 냉철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딘가 장난스럽고, 동시에 깊은 이해가 담겨 있었다.

“당신이 나를 ‘좋아하는’ 그 감정 때문에, 주변 사물들이 이렇게 반응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정지아 씨?”

그의 말에 지아의 얼굴은 터질 듯 뜨거워졌다. 그녀의 주머니 속 돌멩이는 이제 미지근한 온도를 되찾았다. 공중에 떠 있던 잉크병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어… 어떻게… 그걸…!” 지아는 더듬거렸다.

현우는 손등으로 잉크 묻은 입술을 닦아내며 그녀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섰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지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당신이 나를 볼 때마다, 나를 향한 당신의 감정이 주변 사물들에 반영되는 것 같더군요. 처음에는 단순한 우연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젠 확신합니다.”

그는 다시 한번 씨익 웃었다. 잉크가 묻은 그의 얼굴이 왠지 모르게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이제 보니, 당신의 마음은 꽤나 다채롭군요. 짜증, 호기심, 그리고… 저 잉크병이 말해주듯, 저를 향한 아주 솔직한 호감까지.”

지아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숨겨진 감정들이 이 고대의 마법에 의해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날 줄이야! 게다가 상대방이 눈치챌 줄이야!

“그래도… 이렇게까지 대놓고 고백할 줄은 몰랐습니다.” 현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고대의 마법을 빌려 고백이라니, 꽤나 독특하군요, 정지아 씨.”

지아는 망연자실했다. 이것은 고백이 아니었다. 이건 그냥 마법의 대형 사고였다. 하지만 그의 말에서 왠지 모를 설렘이 피어올랐다. 잉크 범벅이 된 그의 얼굴이, 그의 웃음이, 그녀의 심장을 쿵쾅거리게 했다.

“…이현우 씨는… 제가 이렇게 잉크를 뿌려도… 화가 안 나세요…?” 지아는 겨우 용기를 내어 물었다.

현우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글쎄요. 어차피 당신의 감정이 그렇게 만들었다면… 어쩔 수 없죠. 오히려… 당신의 숨겨진 면모를 알게 된 것 같아 흥미롭습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잉크 묻은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지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정지아 씨. 마법의 힘으로 이렇게 솔직하게 드러난 마음인데… 이젠 숨기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 지아의 얼굴은 다시 한번 뜨거워졌다. 주머니 속 검은 돌멩이는 이제 차분하게, 그리고 아주 미약하게 온기를 품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새로운 감정들이 자라나고 있음을 알리는 듯했다. 어쩌면 이 고대의 마법은, 지루했던 그녀의 삶에 가장 로맨틱한 코미디를 선사하러 온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가장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 시작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아주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