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벽장 속의 미궁**
지훈은 컵라면 국물을 후루룩 들이켰다. 밤 열한 시. 오늘따라 유난히 고요한 자정의 기운이 낡은 원룸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며칠 전부터 시작된 기괴한 일들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지만, 허기진 배는 그조차 잠시 잊게 만들었다. 텅 빈 방 안, 오직 컵라면의 김만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젠장, 또야?”
주방 선반 위, 그가 방금 전에 꺼내 둔 포크가 스르륵, 불길한 미끄럼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둔탁한 금속음이 텅 빈 방 안을 길고 음산하게 울렸다. 식탁에 엎드려 꾸벅꾸벅 졸던 고양이, ‘삼색이’가 화들짝 놀라며 털을 곤두세웠다. 녀석의 동그란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야, 삼색아, 괜찮아. 그냥 포크가 떨어진 거야.”
지훈은 억지로 밝은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삼색이는 이미 잔뜩 겁을 먹은 듯, 꼬리를 바짝 세우고 지훈의 무릎에 매달려 “미야옹!” 하고 울어댔다. 녀석의 울음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날카롭고 절박했다. 며칠 전부터 삼색이도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한밤중에 허공을 향해 하악질을 하거나, 아무도 없는 방구석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몸을 웅크리는 식이었다. 그 작은 짐승조차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처음에는 그저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했다. 열쇠가 사라졌다가 전혀 엉뚱한 곳에서 발견되거나, 보지 않던 TV가 저절로 켜지는 정도였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건망증이나 오작동이라고 애써 치부했다. 그러나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생각은 떨쳐버릴 수 없었다. 어제는 달랐다. 분명히 잠그고 나갔던 현관문이 밤늦게 돌아왔을 때 활짝 열려 있었다. 겨울바람이 들이쳐 방 안은 뼛속까지 시려웠다. 다행히 없어진 물건은 없었지만, 그 섬뜩함은 지훈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누군가 침입한 흔적도 없었다. 그저 문만 열려 있었을 뿐.
“이게 다 내가 너무 민감해서 그런 거야. 스트레스성 환각일 뿐이라고.”
지훈은 중얼거리며 주워 올린 포크를 다시 선반에 올려놓았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런데 그 순간, 등 뒤에서 차가운 한기가 훅 끼쳐왔다. 마치 누군가 바로 뒤에서 숨을 들이쉬는 듯한 느낌. 차가운 공기가 목덜미를 훑고 지나가는 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지훈은 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복도를 지나 거실이 보였다. 평범한 그의 낡은 소파, 저렴한 중고 책상, 그리고 벽 한쪽을 가득 채운 붙박이장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건물이라 그런지 붙박이장은 유난히 크고 투박했다. 짙은 갈색 나무문은 낡아서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있었고, 문고리도 삐걱거렸다. 닫아도 왠지 모르게 틈이 벌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늘 장롱 속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퀴퀴한 냄새가 스며 나오는 것 같았다. 언젠가부터 그 냄새는 곰팡이 냄새를 넘어, 흙냄새와 비릿한 금속 냄새까지 섞여들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삐이익-
귀청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붙박이장 문이 제 혼자서 아주 천천히,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문고리를 잡고 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스르륵 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 이내 손바닥만 한 틈, 그리고 점차 더 넓게. 열리는 문 틈새 사이로 짙은 어둠과 함께 끈적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지훈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심장이 발밑으로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있던 삼색이가 털을 세운 채 “쉬이익! 크르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을 향해 앞발을 휘둘렀다. 마치 그 장롱 속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녀석의 눈동자는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닫혀 있던 장롱 안은 원래 어두컴컴해야 했다. 켜켜이 쌓인 옷가지와 잡동사니들이 있어야 할 공간. 하지만 지금, 그 틈새 사이로 희미한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장롱 안이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의 입구라도 되는 것처럼, 이질적인 빛이 어둠 속에서 아른거렸다.
“말도 안 돼… 이건…”
지훈의 목소리가 바싹 말라붙었다. 침을 삼키려 했지만 목구멍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는 홀린 듯 한 걸음, 한 걸음 붙박이장으로 다가갔다. 심장이 거세게 울렸다. 쾅, 쾅, 쾅. 귀 속에서 북을 치는 것 같았다. 이성과 본능이 팽팽하게 맞서 싸우고 있었다. 도망치라고 외치는 본능과, 저 안의 미스터리가 너무나 궁금한 이성.
문이 완전히 열리자, 지훈은 눈을 의심했다. 장롱 안은 그의 예상대로 좁은 옷가지들로 가득 차 있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가 알던 장롱이 아니었다. 어둡고 축축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어둠이 그를 집어삼킬 듯 응시하고 있었다. 푸른빛은 그 어둠의 끝자락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마치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처럼, 혹은 깊은 심연 속에서 유혹하는 미끼처럼.
“이게 뭐야… 꿈인가? 설마… 영화에서나 보던 던전이… 우리 집에 생겼다고?”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장롱 안으로 들이밀었다. 차가운 공기가 손끝을 스쳤다. 마치 얼음물을 만지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때, 장롱 안쪽 깊숙한 곳에서 뭔가가 지훈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듯한 강렬한 압박감.
“크악!”
지훈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빼냈다. 날카로운 손톱 같은 것에 긁혔는지 손목에서 선홍색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순간, 푸른빛이 더욱 강렬해지더니, 장롱 안에서 섬뜩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 어서 와… 잊혀진 길로… 잊혀진 공간으로…
속삭임은 지훈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인간의 언어라고는 볼 수 없는, 긁는 듯하면서도 비단처럼 부드러운, 그러나 뼛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두려움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이끌림이 그를 지배했다. 마치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무언가를 찾아야 할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그의 무의식 깊은 곳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어가야 한다’고 속삭이는 듯했다.
삼색이가 다시 “미야옹! 으르릉!” 하고 울며 지훈의 다리에 몸을 비볐다. 녀석의 울음소리가 공포에 질린 지훈의 귓가에 현실을 상기시켰다. 이건 현실이었다. 분명 현실인데, 그의 아파트 장롱이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 빌어먹을… 던전이 내 집에 생겼다고?”
지훈은 피 묻은 손목을 부여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눈앞에는 평범한 아파트가 아닌, 어둠과 미스터리로 가득 찬 기괴한 던전의 입구가 펼쳐져 있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어 보였다. 이 모든 기이한 현상들의 원인이 저 안에 있을 터였다. 도망친다 한들, 이 현상이 멈출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어쩌면 이미 그는 이 사건의 한가운데에 놓여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두려웠지만, 그만큼 강렬한 호기심이 그의 마음을 지배했다. 어쩌면, 어쩌면 이 안에서 그의 평범한 삶을 뒤흔드는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망설임 끝에, 어둠 속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차가운 공기가 발끝부터 온몸을 감쌌다. 뒤에서 삼색이의 걱정스러운 울음소리가 들렸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의 몸이 완전히 장롱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삐이익- 소리를 내며 무거운 장롱 문이 다시 닫히기 시작했다. 지훈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갔다. 차가운 공기와 함께,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이형의 냄새가 그의 코끝을 스쳤다. 곰팡이 냄새와 흙냄새, 그리고 어렴풋한 금속 비린내까지.
콰앙!
문이 완전히 닫히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빛은 완전히 사라졌다. 지훈은 발아래 푹신한 흙을 느끼며 휘청거렸다. 바닥은 딱딱한 마룻바닥이 아니었다. 축축한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 어디야 여기?”
더듬거리며 주머니 속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을 켜자 희미한 불빛이 주변을 밝혔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좁은 복도였다. 복도 양옆으로는 마치 오래된 동굴처럼 울퉁불퉁한 암석 벽이 이어져 있었다. 거미줄이 잔뜩 엉겨 붙어 있었고, 천장에서는 축축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스마트폰 불빛에 비친 벽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상형문자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그 문양들은 흡사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뒤에는 장롱 문이 있을 터였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자, 빽빽한 암석으로 막힌 벽이 나타났다. 마치 애초에 문 같은 건 없었던 것처럼, 매끄럽게 연결된 돌덩이들만이 그의 시야를 채웠다.
“이런 미친…!”
지훈의 심장이 다시 한번 크게 요동쳤다. 이제 되돌아갈 길은 없었다. 그는 진짜 던전에 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그의 아파트 벽장 속에서 말이다. 과연 그는 이 기괴한 미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의 눈앞에는 끝없이 이어지는 어둠만이 존재했다. 오직 스마트폰의 희미한 불빛만이 그의 유일한 길잡이가 되어주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