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낡은 책방, 새로운 손님**
“여기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랑… 이거… ‘고양이의 낮잠’ 세트 맞죠? 같이 주세요!”
경쾌한 목소리가 낡은 책방 겸 카페, ‘오늘의 이야기’ 안을 가득 채웠다. 한소리는 바쁜 손놀림으로 주문을 받아 적으며 고개를 들었다. 늘 그렇듯, 단골 손님인 여대생 박하영 씨가 환한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네, 하영 씨. 오늘도 도서관 탈출하셨네?”
소리가 장난스럽게 묻자, 하영은 히히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어휴, 도서관은 너무 답답해요. 여기 오면 맛있는 커피도 있고, 책 냄새도 좋고, 무엇보다… 소리 언니가 있잖아요!”
칭찬인지 놀림인지 모를 말에 소리는 픽 웃었다. 햇살 좋은 오후 두 시, 원래 같으면 파리만 날릴 시간이지만, 하영 덕분에 잠시나마 활기가 돌았다. ‘오늘의 이야기’는 소리가 2년 전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곳이었다. 오래된 서가에는 고서들이 빼곡했고, 삐걱이는 나무 바닥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낡은 에스프레소 머신과 몇 개의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사실 카페 부분은 책방의 부수입을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덕분에 단골들은 종종 책을 빌려 가거나,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복합문화공간’이라며 농담을 하곤 했다. 물론 복합문화공간치고는 너무 적적하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소리가 능숙하게 커피를 내리는 동안, 하영은 벽 한쪽을 장식한 손님들의 낙서판을 보며 중얼거렸다.
“언니, 근데 이 근처에 새로 이사 온 사람 없어요? 요즘 이상하게 잘생긴 사람이 자주 보여요.”
“잘생긴 사람? 여긴 어르신들 아니면 대학생밖에 안 다니는데?”
소리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녀의 세계에서 ‘잘생긴 남자’는 그저 먼 나라 이야기 속 존재였다. 현실은 늘 대출 독촉장과 낡은 에스프레소 머신의 수리비였다.
“아니, 진짜! 완전 연예인 뺨쳐요. 길 가다가 눈 마주치면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진다니까요? 뭔가 분위기도 되게… 뭐라고 해야 하지? 세상 모든 고뇌를 혼자 짊어진 미스터리한 왕자님 같아요!”
하영의 오버액션에 소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한때 그녀도 저런 감성으로 소설을 읽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그저 믹스커피 두 개를 타 먹어야 겨우 버틸 수 있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있을 뿐이었다.
“자, 여기 아메리카노랑 샌드위치. 오늘도 즐거운 시간 보내.”
“네! 감사합니다, 언니!”
하영은 싱글벙글 웃으며 창가 자리로 향했다. 소리는 다시 카운터에 기대앉아 느릿하게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늘 그렇듯, 오늘 매출은 턱없이 부족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대로 가다가는 할아버지의 유산인 책방마저 사라질 판이었다.
그때였다. 낡은 종이문이 달린 출입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오후의 햇살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의 실루엣을 잠시 가렸다가, 이내 걷혔다.
소리는 저도 모르게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하영의 말이 허풍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검은색 코트를 입은 남자는 키가 컸고, 어깨가 넓었다. 새카만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야성적인 느낌을 풍겼다. 날카로운 콧날, 얇게 다문 입술, 그리고… 마치 깊은 호수처럼 고요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동자. 그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 마치 만화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 완벽함은 동시에 어딘가 이질적이었다. 그의 주변을 감도는 묘한 분위기가, 마치 이곳의 시간과 다른 리듬으로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남자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시선은 곧장 소리가 서 있는 카운터로 향했다. 그리고 그 눈과 마주친 순간, 소리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영이 말했던 ‘심쿵’이 이런 것일까. 아니, 이건 그냥 심장이 놀라서 발버둥 치는 느낌이었다. 살면서 저런 눈빛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마치 탐색하듯, 혹은 꿰뚫어 보려는 듯한 시선이었다. 섬뜩하면서도 묘하게 홀리는 기분.
“어… 어서 오세요.”
겨우 입을 뗀 소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높게 튀어 올랐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카운터 앞에 섰다. 그리고 그의 눈은 소리를 지나쳐, 그녀 뒤편에 놓인 낡은 에스프레소 머신을 잠시 응시했다. 그리고는 다시 소리에게로 향했다.
“주문하시겠어요?”
소리가 애써 태연한 척 물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 보였다. 그의 표정은 시종일관 무표정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듯한 미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따뜻한 것.”
낮게 깔린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목소리마저 완벽했다. 소리는 순간 멍해졌다. 따뜻한 것? 따뜻한 게 뭔데? 아메리카노? 라떼? 차?
“저… 어떤 걸로 드릴까요? 커피요? 아니면 차요?”
그는 소리의 질문에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마치 무언가를 이해하려는 듯, 혹은 기억해내려는 듯한 행동이었다.
“…향이, 강한 것.”
이번에는 더 모호한 주문이었다. 향이 강한 것이라니. 세상에 향이 강한 음료가 얼마나 많은데? 소리는 이런 주문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단골들 사이에서는 ‘오늘의 이야기’의 괴짜 손님으로 소문날 법한 인물이었다.
“향이… 강한 거요? 혹시… 에스프레소 좋아하세요? 아니면, 원액 그대로 드시는 걸 즐기시나요?”
소리는 최대한 친절하게, 그러나 속으로는 당황하며 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아주 살짝 갸웃했다. 그 작은 동작마저도 그림 같았다.
“이것.”
그는 카운터 위 메뉴판을 가리켰다. 소리의 시선이 그가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오늘의 드립 커피’라고 쓰인 작은 글씨가 있었다. 오늘의 드립 커피는 그날그날 들어오는 원두에 따라 달라지는, 소위 말하는 ‘사장님 맘대로’ 메뉴였다. 오늘은 에티오피아 예가체프였다. 물론 메뉴판에 품종까지 자세히 적혀 있지는 않았다.
“아… 오늘의 드립 커피 말씀이시죠? 네, 따뜻하게 내려드릴까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소리는 숨을 후 내쉬었다. 첫 주문부터 진땀을 뺐다.
소리가 드립 커피를 준비하는 동안, 남자는 조용히 카페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은 낡은 책장과 꽂혀 있는 책들, 그리고 창가에 앉아 친구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하영에게로 향했다. 뭔가 유심히 관찰하는 듯한 느낌에, 소리는 괜히 등골이 서늘했다. 사람이 아니, 이토록 잘생긴 사람이 이렇게까지 존재감이 없을 수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그는 기척 없이 움직였다.
따뜻한 드립 커피 한 잔이 그의 앞에 놓였다. 소리가 “오천 원입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지갑을 꺼냈다. 지갑 안에는 두둑한 오만 원권 지폐가 가득했다. 어딘가 위화감이 들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현금을 이렇게 많이 들고 다니는 경우는 드물었다. 게다가 지폐가 새것처럼 빳빳했다. 방금 은행에서 뽑아왔거나, 아니면… 아주 오래전부터 쓰지 않던 돈을 꺼내온 것 같았다.
그는 오만 원권 한 장을 내밀었고, 소리는 거스름돈을 건넸다. 남자는 커피잔을 들었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그는 커피잔에 코를 가까이 대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흡사 와인 전문가가 향을 감별하듯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소리는 저도 모르게 그의 표정을 살폈다. 맛이 없나? 너무 쓰려나? 그녀의 드립 커피는 꽤 평이 좋은 편이었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읽을 수 없었다.
“…이 향.”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이 다시 소리에게로 향했다. 순간, 소리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눈동자에 언뜻, 붉은빛이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착각이었을까?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건가?
“뭐… 뭔가 이상하신가요?”
소리가 긴장하며 물었다.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테이블에 놓인 의자를 빼고 앉았다. 창가 자리에서 하영이 슬쩍 남자를 훔쳐보며 친구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모습이 보였다. ‘대박! 그 잘생긴 남자! 우리 카페에 왔어! 언니가 대접 중!’ 같은 내용이 분명했다.
소리는 남자가 앉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남자가 앉은 자리, 그의 허리춤 부근에서 아주 짧게, 뭔가가 빠르게 스쳐 지나간 듯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마치… 마치 털이 북슬북슬한 무엇인가가 사라지는 듯한 착시. 소리는 눈을 비볐다. 분명 잘못 본 것이리라. 오후 햇살에 눈이 부셨던 탓이겠지.
하지만 그의 옆모습을 볼수록,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들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어딘가 고풍스럽고… 아련한 느낌. 마치 오래된 신화나 전설 속에서 방금 막 걸어 나온 존재 같았다.
“맛있게 드세요.”
소리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남자는 고개를 까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는 말없이 커피를 마셨고, 소리는 애써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하지만 한 번 신경 쓰이기 시작하자, 모든 것이 신경 쓰였다. 그의 움직임, 그의 숨소리, 그가 커피잔을 잡는 손가락. 너무나 섬세하고 우아했다. 마치 모든 행동이 오랜 수련 끝에 완성된 예술 작품 같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남자는 커피를 다 마셨지만,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창밖을 멍하니 응시할 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멀리, 빌딩 숲 너머의 푸른 하늘에 닿아 있는 듯했다. 마치 오랜 고향을 그리워하는 듯한, 알 수 없는 쓸쓸함이 그의 뒷모습에서 뿜어져 나왔다.
소리는 문득 깨달았다. 그의 눈빛, 그의 행동, 그의 모든 것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느낌. 처음 느껴보는 기묘한 이끌림과 함께, 잊고 있던 설렘이 가슴 한구석에서 피어올랐다. 이 낡고 작은 책방에, 아주 오래된 이야기가 걸어 들어온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경계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의 눈동자에 스쳐 지나갔던 붉은빛, 그리고 허리춤에서 본 기묘한 움직임.
‘설마… 설마 아니겠지.’
소리는 고개를 흔들며 애써 생각을 지워냈다. 그래, 피곤해서. 어제도 늦게까지 재고 정리하느라 잠을 설쳤잖아. 하지만 그 잘생긴 남자는,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카운터로 다가왔다. 그리고 소리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낮고, 묘하게 힘이 실려 있었다.
“…내일, 다시 오겠다.”
그 짧은 한마디에, 소리는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깊은 호수 같았지만, 그 속에는 무언가 단단한 결의가 서려 있는 듯했다.
소리가 겨우 “네?” 하고 되물을 틈도 없이, 남자는 몸을 돌려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그는 오후의 햇살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아직 다 식지 않은 커피잔과 함께 묘한 향기가 남아 있었다. 분명 예가체프의 상큼한 향이었다. 그런데 그 향 사이로, 아주 희미하게, 비릿하면서도 달콤한… 짐승의 냄새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소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짐승이라니… 내가 미쳤지.”
스스로를 다그치며 애써 웃음을 지으려 했지만, 그녀의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오늘 이 책방에 들어선 손님은, 박하영 씨의 말대로 ‘세상의 모든 고뇌를 짊어진 미스터리한 왕자님’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이 세상 것이 아닌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에 사로잡힌 채였다.
창가에 앉아있던 하영이 어느새 달려와 소리의 팔을 흔들었다.
“언니! 대박! 그 남자 누구야? 완전 내 스타일! 번호 땄어요?”
소리는 멍하니 하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어설프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아마… 아주 오래된, 그리고 아주 특이한 손님인 것 같아.”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남자가 사라진 문밖을 향했다.
어떤 이야기가 시작될지는, 아직 아무도 몰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