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원형 경기장의 상공을 쩌렁쩌렁 울리는 함성이 대지를 뒤흔들었다. 수십만 관중의 열기는 숨 막히는 압력처럼 아레나를 짓눌렀고, 그들의 눈동자는 오직 중앙에 우뚝 선 거대한 강철 무인(鋼鐵武人)들에게만 박혀 있었다. 이곳은 천하의 운명을 건 대결, 제17회 천하제일 무신회(天下第一武神會)의 개막을 알리는 성스러운 투기장이었다.
“크하하하! 드디어 때가 왔는가!”
광기 어린 목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옥좌에 앉은 심판장이자 무림맹주(武林盟主)인 철혈신군(鐵血神君)의 두 눈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의 옆으로는 각 문파의 수장들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들의 시선 또한 투기장 너머,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강철 무인들의 거대한 그림자에 닿아 있었다.
어둠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다. 인간의 탐욕과 증오가 빚어낸 거대한 균열이 세계를 집어삼키려 들었다. 그때마다 무림은 무신회를 열어 천하의 영웅을 가려냈고, 그 영웅의 지혜와 무력으로 균열을 메워 왔다. 그러나 이번 균열은 달랐다. 너무도 깊고 넓어, 인류의 존망까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승자는 천하를 이끌 영웅이 되리라.
패자는… 그저 덧없는 희생양이 될 뿐.
“개막전, 동방제국 ‘청룡의 후예’ 문파의 수호 무인, 『천뢰(天雷)』와 서역 마교 ‘혈광단(血光團)’의 심판 무인, 『멸마(滅魔)』의 대결입니다!”
강철신음 같은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투기장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격정적인 열기로 들끓었다. 마치 거대한 용암 덩어리가 끓어오르는 듯한 장관이었다.
아레나 중앙에는 두 대의 강철 무인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한 기는 푸른 비늘처럼 섬세한 장갑으로 덮인 유선형의 『천뢰』. 그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동방 무림의 정교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다른 한 기는 붉은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비정형적인 형상의 『멸마』. 거친 근육질의 팔과 다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흡사 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귀를 연상케 했다.
“크크크… 동방의 어리석은 청룡이여, 네놈의 비늘을 뜯어내 피바다를 만들고 말리라!”
『멸마』의 조종석에서 혈광단 단주의 광기 어린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기세는 강철 무인의 외형만큼이나 사나웠다.
“건방진 오랑캐 같으니! 천뢰(天雷)의 이름으로 네놈의 더러운 피를 정화시켜주마!”
『천뢰』의 조종석에서는 청룡의 후예 문주가 차가운 비수를 날리듯 응수했다.
팽팽한 기싸움이 허공을 갈랐다. 무인들의 표면 장갑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내부 에너지가 충전되고 있음을 알렸다.
관중석 한켠, 조용한 청년이 고요한 눈으로 아레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진(李眞). 겉보기엔 그저 평범한 청년이었지만, 그의 내면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심(武心)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두 거대 무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담긴 무공(武功)의 흐름을 꿰뚫고 있었다.
“저 정도인가…”
나지막한 그의 중얼거림은 거대한 함성 속에 파묻혔다. 그는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강철 무인은 다른 무인들처럼 화려하거나 거대하지 않았다. ‘묵혼(墨魂)’이라 불리는 그의 무인은, 검은색 무광의 장갑으로 덮여 있었으며, 여느 무인들보다 한참 작은 체구였다. 마치 그림자처럼 존재감을 지우는 그 무인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고철 덩어리인가 착각하게 만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진은 알고 있었다. 묵혼의 진정한 가치를.
‘묵혼은 화려한 기술보다 실전의 움직임에 특화된 무인. 무공의 본질을 담은 기체지.’
그가 묵혼을 만든 것은, 잃어버린 무(武)의 진수를 되찾기 위함이었다. 이진은 무신회에 대한 기대보다, 무신회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암흑의 그림자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천하의 운명을 건 대회라지만, 이진의 눈에는 거대한 위협을 눈 가리고 아웅하는 기만극으로 보였다.
그때, 아레나에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천뢰』와 『멸마』가 드디어 격돌한 것이다.
콰아아앙!
『천뢰』가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손바닥에서 푸른 기탄(氣彈)을 쏘아냈다. 『청룡파천장(靑龍破天掌)』. 강철 무인이 구현하는 장법(掌法)은 그 위용부터가 달랐다. 거대한 기탄이 『멸마』의 가슴팍을 강타했고, 멸마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뒤로 밀려났다.
하지만 『멸마』는 이내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붉은 광선을 발사했다. 『혈마광선(血魔光線)』. 그 광선은 『천뢰』의 팔을 스치며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건 단순히 기계적인 반응이 아니군. 조종사의 무공 심득이 강철 무인의 움직임을 좌우하고 있어. 저들의 무공은 이미 강철 무인과 하나가 되어 있다.’
진정한 무신회의 본질이었다. 무인이 강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탑승한 무인이 강한 것이었다. 무인의 조종간을 잡은 손에서 무형의 기운이 흘러나와 강철 무인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거대한 철골들이 살아 숨 쉬듯 무공을 펼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두 무인은 수십 합을 주고받았다. 『천뢰』의 발차기가 『멸마』의 다리를 강타하자, 『멸마』는 휘청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천뢰』가 공중으로 솟구치며 필살기를 준비했다.
“받아라! 『청룡열풍참(靑龍烈風斬)』!”
공중에서 회전하며 내려찍는 『천뢰』의 거대한 손날에는 푸른 회오리 바람이 감돌았다. 마치 거대한 용이 발톱으로 대지를 찢으려는 듯한 기세였다.
하지만 『멸마』는 무릎을 꿇은 채로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세에서 몸을 비틀어 검붉은 기운을 온몸에 집중시켰다.
“건방진!”
피를 토하듯 외치는 멸마 조종사의 목소리와 함께, 『멸마』의 손아귀에서 거대한 검은 칼날이 솟아났다. 『혈마단혼도(血魔斷魂刀)』.
콰콰콰쾅!
하늘에서 내려찍는 『천뢰』의 손날과 땅에서 솟구치는 『멸마』의 칼날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경기장 전체가 거대한 폭발에 휩싸였다. 모래먼지와 파편들이 하늘로 치솟았고, 관중들의 함성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모든 것이 가라앉았을 때, 경기장 중앙에는 처참한 모습의 『멸마』가 서 있었다. 한쪽 팔은 완전히 부서져 너덜거렸고, 몸체는 깊게 파인 상처로 가득했다. 하지만 『멸마』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옆에는 『천뢰』가 가슴팍에 깊은 구멍이 뚫린 채 고철처럼 쓰러져 있었다.
승자는 『멸마』였다.
숨을 헐떡이는 멸마의 조종사는 승리의 포효 대신,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사력을 다한 싸움이었다.
이진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 대결! ‘흑림맹(黑林盟)’의 수장, 『강철 표범(鋼鐵豹)』과… 낙향 무가(落鄕武家) 이진의 『묵혼(墨魂)』!”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이진의 이름을 호명하자, 관중석에서는 작은 술렁임이 일었다. 흑림맹의 『강철 표범』은 유명한 강자였다. 거대하고 육중한 체구에 민첩한 움직임을 자랑하며 수많은 강자들을 쓰러뜨린 괴물 같은 무인이었다. 그러나 ‘낙향 무가 이진의 묵혼’은…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누구냐 저 녀석은?”
“묵혼? 이름부터가 후져 보이는군.”
“강철 표범에게 한입 거리도 안 될 것 같은데.”
야유와 조롱이 섞인 시선들이 이진에게 쏟아졌다. 이진은 그 모든 것을 무시한 채 묵묵히 경기장 입구로 향했다. 그의 시선은 오직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저 거대한 아레나,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강철 표범』.
묵혼의 조종석에 앉아 모든 시스템을 가동하자, 검은색 장갑이 닫히며 이진을 감쌌다. 묵혼은 마치 이진의 생각과 동시에 반응하는 듯, 그의 의지에 따라 움직일 준비를 마쳤다. 이진의 손이 조종간에 닿자, 묵혼의 검은 눈동자에 푸른빛이 일렁였다.
“크하하하! 쥐새끼 한 마리가 기어들어 왔군!”
거대한 『강철 표범』이 사납게 포효하며 이진의 묵혼을 노려봤다. 묵혼은 강철 표범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왜소한 크기였다. 마치 거대한 산맥과 작은 돌멩이가 마주한 듯한 모습이었다.
이진은 그 포효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의 무심은 이미 묵혼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어차피… 시작에 불과해.’
천하의 운명을 건 대결. 무신회의 진짜 막은, 이제 막 오르고 있었다.
“자… 시작해볼까.”
이진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묵혼의 검은 외장은 미세한 진동과 함께 신비로운 기운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투박해 보이던 고철 덩어리가,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꿈틀거렸다. 경기장의 정적이 흐르고, 다음 순간, 심판의 개전 신호와 함께 거대한 강철 무인들의 춤이 시작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