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무도회의 서막
찬란한 아침 햇살이 비룡문의 거대한 투기장을 비추었다. 수만 명의 인파가 뿜어내는 열기는 대기를 뜨겁게 달구었고, 그들의 웅성거림은 마치 성난 파도처럼 투기장 전체를 뒤덮었다. 중앙의 거대한 비무대는 흑요석처럼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었고, 그 위에는 각 문파와 세력을 상징하는 깃발들이 바람에 펄럭이며 마치 살아있는 용처럼 춤을 추고 있었다.
백리진은 그 왁자지껄한 소란 속에서도 고요한 호수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낡았지만 잘 관리된 검은 도포 자락이 희미한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그의 몸에 숨겨진 단단한 근육들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의 나이는 겨우 스물셋. 하지만 그의 눈빛은 이미 수많은 세월을 겪어온 노승처럼 깊고도 지쳐 보였다.
“후… 시작되는군.”
그의 옆에 선, 나른한 표정의 한 사내가 짧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강호에서는 ‘만독불침’이라 불리는 기인, 운룡이었다. 그는 온갖 독초와 독사를 다루는 이계(異界)의 기인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어째서인지 백리진의 곁에 그림자처럼 머물고 있었다.
“그래. 이 지옥 같은 연회가.” 백리진은 운룡의 말을 받았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하여, 주변의 소음을 뚫고 그의 귓속으로만 울리는 듯했다.
천하제일무도회. 평화의 가면을 쓴 전쟁.
이 대회가 열리게 된 지 벌써 백 년의 세월이 흘렀다. 과거, 끊이지 않는 무력 충돌로 황폐해진 대륙은 결국 피의 서약 아래 ‘무력 충돌 금지’ 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각 세력의 최강자들이 모여 무(武)로써 대륙의 향방을 결정하는 대회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승자는 향후 백 년간의 세력 판도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게 된다. 식량의 분배, 영토의 경계, 심지어는 천기(天氣)를 조종하는 비법까지. 모든 것이 승자의 손에 달려 있었다.
이번 대회는 역대 그 어느 대회보다도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북방의 철혈 기마민족, 서방의 신비로운 마법 문명, 동방의 은둔한 도사 문파, 그리고 백리진이 속한 중원의 정통 무림. 각 세력 간의 긴장감은 칼날 위를 걷는 듯 아슬아슬했다. 특히 중원 무림은 지난 대회에서 뼈아픈 패배를 겪어, 그 위세가 예전 같지 않았다. 이번에마저 패배한다면, 중원은 영원히 타 세력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될 터였다.
“저기 좀 봐.” 운룡이 턱짓으로 비무대를 가리켰다.
백리진의 시선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비무대 위에는 수십 명의 무림 고수들이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 하나하나가 강호에서 이름을 떨치던 전설적인 존재들이었다.
북방의 ‘천산검마’ 아샤르. 거대한 신장과 날카로운 눈매가 마치 사나운 늑대를 연상시켰다. 그의 등 뒤에는 전설적인 백호의 가죽이 휘장처럼 걸려 있었다.
서방의 ‘광명 교주’ 셀레네. 온몸을 희고 찬란한 갑옷으로 두르고 있었으나, 그 사이로 비치는 은빛 머리카락과 굳게 다문 입술은 그녀가 가진 무서운 집념을 드러냈다. 그녀의 주위에는 정체 모를 광채가 희미하게 일렁였다.
동방의 ‘구천도인’ 청룡. 얇은 비단옷을 입고 맨발로 서 있었지만, 그의 주변 공기는 마치 다른 세상인 양 고요하고 청명했다. 그의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얼어붙는 듯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중원의 대표, 백리진 자신.
그는 ‘천하제일’이라는 거창한 이름과는 거리가 먼 ‘무영문(無影門)’이라는 한미한 문파의 마지막 후계자였다. 무영문은 한때 중원 최고의 암살 문파였지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가 이 자리에 선 이유는 단 하나. 스승의 유지 때문이었다.
*“리진아. 너는 무영문의 마지막 빛이다. 이 대륙의 운명이 걸린 대회에서, 네 힘으로 우리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무영의 그림자가 세상을 구원하리라.”*
스승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백리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그는 영웅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세상의 어둠 속에서 조용히 임무를 완수하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에게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갑자기, 투기장 전체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징이 울렸다. 모든 웅성거림이 순간 멎었다.
비무대 중앙으로 한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흰 수염은 허리까지 내려왔고, 눈은 비록 늙었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광채를 품고 있었다. 그는 천하제일무도회의 심판장이자, 대륙의 모든 세력이 존경하는 유일한 중립 인물, ‘현무대사’였다.
“대륙의 모든 영웅들이여!” 현무대사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울림은 투기장 구석구석까지 명확하게 전달되었다. 마법이라도 부리는 듯한 신비로운 음파였다.
“백 년 만에 다시 모인 이 자리에서, 우리는 천하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비룡문의 천장이 열리며 눈부신 빛줄기가 비무대를 강타했다. 마치 하늘이 직접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듯한 장엄한 광경이었다.
“각 세력은 이미 지난 밤, 비무 순서를 결정하였으니… 이제 더 이상의 지체는 없다!” 현무대사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무도회의 첫 번째 대결을 선포한다!”
숨소리마저 삼켜진 정적 속에서, 백리진의 심장이 쿵, 하고 크게 울렸다. 그의 눈동자에 비무대 위를 수놓은 강력한 고수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비쳤다. 저들 중 한 명을 꺾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저들을 모두 꺾어야만, 스승의 유지를 잇고 중원을 구할 수 있다.
“백리진… 너의 차례다.” 운룡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백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서도 흔들림 없는 등대와 같았다. 하지만 그의 주먹은 여전히 꽉 쥐어져 있었다.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떼어 비무대를 향해 나아갔다.
대륙의 운명을 짊어진 채, 그림자처럼 고독한 발걸음이었다.
수만 개의 시선이 오직 그 한 사람에게로 집중되었다.
천하제일무도회의 서막이, 그렇게 강렬하게 막을 올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