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은 축 늘어진 어깨를 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고단한 하루의 끝을 알리는 차가운 금속 손잡이의 감촉이 유난히 시렸다. 희미한 복도 등 아래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왠지 모르게 초라해 보였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음식물 쓰레기의 희미한 악취가 섞인 아파트 특유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하아…”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왔다. 현관 신발장에 발을 들이밀자, 덜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오래된 나무 냄새가 풍겼다. 습관처럼 구두를 벗어 가지런히 놓아두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거실로 향했다. 보일러를 튼 지 오래인데도 여전히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원룸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답답하게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시원하게 들이켰다. 꿀꺽꿀꺽 목울대가 울리는 소리가 적막한 방에 크게 울렸다. 갈증은 해소되었지만, 피로는 여전했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리모컨을 찾았다. 항상 두던 자리, 티테이블 위에는 리모컨이 없었다.
“어디 갔지…?”
고개를 갸웃하며 소파 틈새와 주변을 뒤졌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툭’ 하는 소리와 함께 플라스틱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리모컨이 등 뒤 벽과 책장 사이, 아주 협소한 틈새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이게 왜 여기 있어?”
지훈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덜렁거리는 자신이라지만, 리모컨을 저런 곳에 던져놓을 리는 없었다. 게다가 방금 전까지 티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것을 분명히 기억했다. 찝찝한 기분을 애써 무시하며 리모컨을 주워 들었다. 먼지가 앉아있었다.
“젠장,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피곤 때문일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TV를 켰다. 아무 채널이나 틀어놓고 잠시 멍하니 화면을 바라봤다.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의미 없는 소음이 그나마 적막감을 덜어주는 것 같았다. 그는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낡은 욕실 거울 속 그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초췌해 보였다.
따뜻한 물줄기가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자 긴장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피로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이제 좀 살 것 같았다.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나오려는데, 욕실 문이 ‘덜컹’ 하고 흔들렸다. 잠금장치를 걸어놓지 않아 바람이 들어왔나 싶었지만,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뭐지?”
문을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이상한 점은 없었다. 그는 그저 건물이 오래되어 문이 헐거워졌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거실로 나와 물을 마시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잠시 SNS를 훑어보았다. 재미없는 피드를 넘기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정면에 놓여있던 탁상시계가 ‘덜그럭’ 소리를 내며 옆으로 쓰러졌다.
“아, 진짜!”
지훈은 이제 제법 짜증이 치밀었다. 뭘 자꾸 넘어뜨리고 떨어뜨리는 거지? 그는 탁상시계를 세우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시계를 잡으려던 그의 손이 닿기도 전에, 시계가 스스로 ‘틱톡틱톡’ 소리를 내며 제자리로 바로 서는 것이 아닌가.
지훈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눈을 비볐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였을 리 없었다. 그는 분명히 시계가 제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공포가 온몸을 감쌌다.
“이… 이게 뭐야?”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탁상시계에 고정되어 있었다. 시계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여전히 ‘틱톡틱톡’ 소리를 내며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소리가 이제는 마치 누군가의 조롱처럼 들려왔다.
갑자기 방 안의 온도가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에어컨을 켜지도 않았는데 뼛속까지 시린 한기가 온몸을 감쌌다. 지훈은 팔을 문질러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소름이 돋았다.
그때, 방 저쪽 끝, 부엌 싱크대 쪽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였다. 지훈은 몸을 움찔 떨며 부엌 쪽을 바라보았다.
깨진 유리컵의 파편들이 싱크대 아래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그리고 싱크대 상부장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비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 분명히 닫혀 있었는데.
“누구… 누구 없어요?”
지훈은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어둠 속에 잠긴 부엌 한가운데서 마치 무언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 순간, 지훈의 뒤편, 그의 침대 위에서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혼비백산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몇 시간 전 읽다가 던져놓았던 소설책이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가 다시 침대 위로 떨어져 있었다. 그 책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격렬하게 흔들리는 것처럼 침대 위에서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리고 책장 한 귀퉁이에 얌전히 놓여있던 지훈의 졸업 사진 액자가 덜그럭거리더니, 스르륵, 아주 천천히 침대 쪽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액자의 유리 표면에는 희미한 연기 같은 것이 서서히 피어오르는 듯했다.
지훈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기이한 소리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공포가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피곤 때문이라고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 이 방에, 자신 말고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쿵! 쿵! 쿵!
거실 벽에서 둔탁한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심장이 뛰는 소리 같았다. 소리는 점점 더 빨라지고 강해졌다. 아파트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지훈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의 눈은 침대 위를 맴돌던 소설책에 고정되었다. 책은 이제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대신, 책의 겉표지가 서서히 위로 들리더니,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 한 장 한 장 넘어가기 시작했다.
바스락거리는 종이 넘기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책장이 멈춘 곳은, 아무것도 인쇄되지 않은 백지 페이지였다. 그 백지 위에, 마치 무형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처럼, 붉은색 글자들이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나가.’**
단 두 글자였다. 하지만 그 두 글자가 지훈의 심장을 산산조각 냈다. 그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이 모든 현상이 자신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이 방에, 자신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자신이 여기 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뒷걸음질 쳤다. 현관을 향해. 살기 위해. 그러나 그의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거실의 모든 불빛이 일제히 ‘팟!’ 하고 꺼졌다. 암흑이 찾아왔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부엌 쪽에서, 무언가 차가운 손이 그의 발목을 스윽, 하고 휘감았다.
지훈은 비명을 삼키며 발버둥 쳤다. 털썩! 그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어둠 속에서 차가운 감촉이 그의 발목을 더욱 세게 조여 왔다. 그는 필사적으로 발을 빼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리고 귓가에, 섬뜩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가지 마.”**
그것은 분명히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차갑고, 습하고, 심연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으스스한 음성이었다. 지훈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살려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몸은 무언가에 의해 서서히, 질질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어디로? 그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차가운 바닥만이 그의 등 뒤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이대로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그의 뇌리를 스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