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게 깔린 거실, 서진은 테이블에 엎드려 깜빡이는 비상용 랜턴 불빛 아래 낡은 지도 한 조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며칠째 수도꼭지에서 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배급받은 식수는 이미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고, 외부와 단절된 채 살아남는다는 것은 매일매일이 새로운 지옥을 경험하는 것과 같았다. 창밖에서는 한낮의 열기가 식어가는 것과 비례해 굶주린 이들의 끔찍한 울음소리가 더욱 선명해졌다. 그 소리는 마치 그의 아파트 건물 아래, 끈적이는 그림자처럼 들러붙어 서진의 심장을 갉아먹는 것만 같았다.
“젠장, 젠장….”
낮게 읊조린 욕설은 목구멍에서 서걱거리는 모래처럼 뱉어졌다. 지도의 한쪽 구석, 아파트 단지 인근에 표시된 작은 마트는 이미 수십 번도 더 수색했던 곳이다. 이제 더 이상 찾을 것도, 기대할 것도 없는 황무지였다. 마지막 남은 통조림을 따서 입에 넣었다. 밍밍하고 질척이는 맛이 비위 상했지만, 생존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가리지 않아야 했다.
그때였다.
‘달그락.’
정적을 찢고 들려온 소리에 서진의 몸이 경직됐다. 캔을 들던 손이 멈추고, 그의 시선은 소리가 들려온 곳, 주방 쪽으로 향했다. 분명, 아무것도 없었다. 닫힌 주방 문 너머, 어둠이 짙게 깔린 공간.
“뭐야….”
서진은 숨을 죽였다. 바람? 이 높은 층까지 바람이 들어올 리가 없었다. 환기구는 굳게 닫혀 있었다. 밖의 소음과는 확연히 다른, 날카로운 금속음이었다. 마치 숟가락이 식탁 위에서 미끄러지는 듯한 소리.
랜턴을 들어 주방 문 쪽을 비췄다. 좁은 빛줄기가 문고리를 간신히 비췄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서진은 천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혹시, 다른 생존자가? 이 아파트에?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미 며칠 전부터 이곳은 봉쇄되었고, 주변 지역은 ‘감염 지대’로 분류되어 정부의 어떤 지원도 끊겼다. 그렇다면, 저 소리는…
등골을 타고 오싹한 냉기가 기어올랐다. 극도의 스트레스와 영양 부족이 환청을 만들고 있나? 서진은 이마를 짚었다. 아니, 분명히 들었다.
조심스럽게 주방 문으로 다가섰다. 손잡이에 손을 얹으려는데, 문 안쪽에서 또 한 번 ‘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좀 더 크고 선명했다.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 서진은 순간 움찔하며 손을 뗐다. 문 너머의 어둠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구… 있어?”
갈라진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주방 안쪽에서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슥, 스슥….’
무언가 바닥을 질질 끄는 듯한 소리. 서진은 랜턴을 든 손을 꽉 쥐었다. 그 소리는 마치… 사람이 맨발로 바닥을 끄는 소리 같았다. 섬뜩한 상상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는 망설이다가, 문을 확 열어젖혔다.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랜턴의 불빛이 주방 내부를 훑었다. 텅 비어 있었다. 엉망진창으로 어지럽혀진 싱크대와 식탁. 하지만 그게 다였다. 아무도 없었다. 서진은 숨을 헐떡이며 주방 안으로 몇 발자국 들어섰다. 혹시 냉장고 뒤? 아니면 수납장 안?
식탁 위를 비추던 랜턴 빛이 멈췄다. 젓가락 하나가 식탁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놓여 있었다. 분명 그가 아까 통조림을 먹을 때 사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젓가락이 지금, 식탁의 끝에, 마치 누군가 일부러 밀어 떨어뜨리려 한 것처럼 놓여 있었다.
서진은 젓가락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순간, 식탁 맞은편 벽에 걸린 그림 액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마치 벽 속에서 누군가 그림을 밀어내는 것처럼.
‘쿠우웅….’
갑자기 아파트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둔탁한 진동이 울렸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발을 구르는 듯한 소리. 서진은 바닥에 손을 짚고 균형을 잡았다. 지진? 아니, 지진이었다면 진동은 훨씬 길고 불규칙했을 것이다. 이 진동은 명확했다. 특정 지점에서 시작해 퍼져나가는 파동처럼.
진동이 멈춘 후, 서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소음은 여전했지만, 그 진동은 분명히 건물 내부에서, 그것도 위층에서 시작된 것 같았다.
“설마… 위층에도 감염자가 있었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감염자들은 이런 둔탁한 진동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그들은 으르렁거리고, 긁고, 달려들 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건물을 울리는 힘은 없었다.
그때, 주방 바닥에 떨어져 있던 냄비 뚜껑이 ‘데구르르’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정확히 말하면, 서진의 발밑으로 굴러왔다. 마치 누가 발로 툭 찬 것처럼.
서진은 얼어붙었다.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건 환각이 아니었다. 환청도 아니었다. 물리적인 현상이었다.
“누구야… 도대체 누구야!”
그는 랜턴을 마구 휘두르며 소리쳤다. 불빛이 주방의 구석구석을 미친 듯이 스캔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느껴졌다. 시선. 누군가가 자신을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다는 섬뜩한 감각.
순간, 냉장고 문이 ‘쿵’ 하고 세게 닫혔다. 서진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냉장고 문은 분명 아까 그가 열어둔 채였다.
“하아… 하아…”
거친 숨소리가 폐부를 찢었다. 그는 비상 랜턴을 놓쳐 바닥에 떨어뜨렸다. 빛이 나뒹굴며 천장을 비췄다가, 바닥을 비췄다가 불규칙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 불빛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서진은 보았다.
주방 한쪽 벽에 걸려 있던 가족사진 액자가 거꾸로 뒤집혀 있었다. 사진 속 그의 아내와 딸이 흐릿한 조명 아래, 거꾸로 매달린 채 그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액자 유리에 맺힌 물방울들. 그건 마치… 눈물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액자 속 딸의 얼굴에서 희미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았다. 착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미소는 점점 더 선명해졌다.
“안 돼….”
서진은 기어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앞에서, 거꾸로 뒤집힌 액자 속 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서진은 읽을 수 있었다.
‘아빠… 보고 싶어.’
그리고 액자 속 딸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랜턴 불빛이 ‘치직’ 소리를 내더니, 완전히 꺼져버렸다.
암흑.
완벽한 어둠 속에서, 서진은 차가운 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덜덜 떨었다.
그때,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혼자가 아니야.’
그리고 그의 등 뒤에서, 차가운 손길이 느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