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하늘은 언제나처럼 무겁게 짓눌러왔다. 썩어 들어가는 콘크리트 잔해와 뒤틀린 철골들이 앙상하게 드러난 풍경. 이곳은 한때 마법의 정수를 배우던 찬란한 학문의 전당, ‘아테아 마법 학원’의 폐허였다. 지금은 그저 살아남은 자들이 간신히 숨통을 붙이고 있는 거대한 무덤에 불과했다.
강하준은 무너진 도서관 건물의 잔해 위에 쪼그려 앉아 망원경을 들었다. 렌즈 너머로 보이는 것은 녹슨 철골 사이를 기어 다니는 ‘탐식자’ 한 마리.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른 몸통과 칼날 같은 팔다리가 햇빛에 번들거렸다. 놈은 학원 운동장이었던 곳을 무심하게 배회하다가, 이따금씩 고개를 쳐들어 비릿한 포효를 내뱉었다.
“젠장, 저놈이 아직도 저기 박혀있네.”
하준은 이를 갈았다. 원래 계획은 저놈을 피해 옛 생활관 지하로 진입하는 거였다. 생활관 지하엔 아직 건질만한 비상 식량이나 물자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탐식자가 그 길목을 막고 있었다.
옆에서 숨죽이고 있던 유나가 속삭였다. “다른 길은 없어, 하준아. 중앙 통제실 쪽은 무너져서 막혔고, 도서관 후문 쪽은 ‘망령’들이 득실거려.”
망령. 육신은 없지만 마력의 잔재에 이끌려 떠도는 악령 같은 존재들. 탐식자보다 처리하기는 쉽지만, 수가 너무 많으면 답이 없었다. 그나마 탐식자는 마법 한 방이면 될 일이었다.
“진우는?” 하준이 물었다.
“진우는 북쪽 외곽 순찰 중. 예정보다 한 시간 정도 늦고 있어. 아마 길목이 막혔을 거야.”
하준은 망원경을 내리고 한숨을 쉬었다. 이 폐허는 매일매일 새로운 변수를 만들어냈다. 어제 안전했던 길은 오늘 무너지고, 어제 없던 괴물은 오늘 갑자기 나타났다.
“어쩔 수 없지. 탐식자를 치우고 간다.” 하준이 중얼거렸다.
유나가 눈을 크게 떴다. “하준아, 마력 많이 남았어? 지난번 ‘분쇄자’ 처리할 때…”
“괜찮아. 정령탄 딱 한 발이면 돼.”
하준은 품에서 낡은 마력 응축기를 꺼냈다. 고대 마법 시대의 유물로 만들어진 이 기계는 그가 가진 유일한 강력한 무기였다. 파란색 마력석이 옅은 빛을 발했다. 그는 응축기를 망원경 옆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검푸른 빛을 띠는 마법석 하나를 꺼내 들었다.
“유나, 엄호해. 놈이 쓰러지면 바로 생활관 지하 입구로 달려.”
유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낡은 석궁을 장전했다. 하준은 마법석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주변 공기가 미미하게 일렁였다. 마법석이 심장처럼 쿵쾅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눈부신 푸른빛을 뿜어냈다.
“간다.”
하준의 손에서 푸른 섬광이 뿜어져 나갔다. ‘쉬이이잉- 콰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탐식자의 몸통이 사정없이 터져 나갔다. 검붉은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고, 놈은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땅에 고꾸라졌다. 곧 거대한 몸뚱이가 썩어가는 시체 더미 위로 쓰러졌다.
“뛰어!”
두 사람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탐식자의 시체를 지나 생활관 건물 쪽으로 내달렸다. 건물 입구는 잔해로 반쯤 막혀있었지만, 간신히 기어들어갈 틈은 있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흙먼지 속에서 유나가 손전등을 켰다.
“이쪽이야.”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은 캄캄한 심연 같았다. 삐걱거리는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가자, 눅눅하고 서늘한 공기가 폐부를 파고들었다. 곳곳에 널브러진 낡은 침대와 부서진 가구들이 과거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음… 식량 보관소는 저쪽이었지?” 유나가 맵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하준은 주위를 경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서고 쪽으로 가지 않게 조심해. 거긴 망령들이 좋아했어.”
그때, 유나의 손전등 불빛이 한쪽 벽을 비췄다. 낡은 콘크리트 벽 한가운데에 뭔가 이질적인 것이 박혀있었다. 쇠로 된 낡은 문. 하지만 일반적인 문과는 달랐다. 육각형 문양들이 촘촘히 새겨져 있었고, 그 문양들 사이에는 빛바랜 마법 문자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문 전체에서 기묘하고 불쾌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이건…?” 유나가 멈춰 섰다.
하준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생활관 지하에 저런 문은 없었다. 아니, 적어도 그가 기억하는 학원 도면에는 없었다.
“누가 여기다 이런 문을 설치했지?” 하준이 문에 손을 대려 하자, 유나가 다급히 그의 팔을 잡았다.
“잠깐만, 하준아! 이 문양… 이건 ‘봉인’이야. 고대 마법 시대에 사용되던 봉인 문양들인데… 왜 여기에?”
유나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학원 입학 전부터 고대 마법학에 관심이 많았던 소녀였다.
“봉인? 뭘 봉인하려고?” 하준이 물었다.
유나가 손전등을 들어 문양들을 더 자세히 비췄다. 그녀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이내 새파랗게 질렸다.
“이, 이건… 금기 주문이야. 저주받은 자들의 봉인. 함부로 열거나 건드려서는 안 돼. 학원 설립 초기에 사라졌다고 알려진 마법인데…”
그녀의 시선은 문 위쪽에 새겨진, 다른 문양들보다 훨씬 크고 흉측한 문양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여러 개의 눈동자를 합쳐놓은 듯한, 기괴하고 비틀린 형상이었다. 그 형상에서 희미하게 불쾌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저주받은 자들의 봉인… 그게 뭔데?” 하준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유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전설에 따르면… 학원 지하 깊은 곳에 ‘어둠의 태동’이 숨겨져 있다고 했어. 학원장이 직접 봉인하고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명했던… 일종의 ‘금기’ 같은 거.”
“금기?”
바로 그때, 뒤쪽에서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생활관 입구 쪽에서 흙먼지가 다시 피어오르고 있었다.
“누군가 온다!” 유나가 다급히 외쳤다.
발자국 소리가 아니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질질 끌려오는 듯한 소리. 마치 축축하고 끈적한 살덩이가 바닥을 스치는 듯한 불쾌한 소리였다.
하준은 재빨리 응축기를 다시 꺼내 들었다. “숨어!”
두 사람은 재빨리 낡은 사물함 뒤로 몸을 숨겼다. 어둠 속에서 그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눅눅한 공기가 한층 더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윽고, 손전등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희미한 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길고 검은 촉수들이 꿈틀거리며 바닥을 기어오는 모습. 불빛이 닿는 순간, 그것은 더욱 명확해졌다. 수십 개의 촉수가 얽히고설켜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 덩어리 한가운데에는 찢어진 천 조각과 뼈대가 보였다. 인간의 잔해였다. 그것은 느릿하게, 그러나 끈질기게 봉인된 문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저, 저건…” 유나의 목소리가 공포에 질려 떨렸다.
하준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저것은 단순한 돌연변이가 아니었다. 마법적인 힘으로 인해 기형적으로 변이된 존재. 그리고 그 존재는 봉인된 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에 이끌리는 듯했다.
덩어리는 봉인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놈의 촉수들이 봉인 문에 새겨진 육각형 문양을 더듬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문양의 의미를 아는 것처럼. 놈의 중앙에 위치한 인간의 잔해가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끄으으… 흐으으…’
그것은 신음 소리였다. 인간의 목소리였지만, 비틀리고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뼈와 살이 뒤틀리는 고통 속에서 겨우 쥐어짜내는 듯한 소리.
그리고 놈이 문양 하나를 짚는 순간, 문에 새겨진 마법 문자 하나가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봉인이 풀리는 듯한 불안한 징조였다.
하준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것을 가만히 놔두면 안 된다. 저 끔찍한 금기가 풀리는 순간, 이 학원 지하에 숨겨진 진정한 재앙이 세상 밖으로 터져 나올지도 모른다.
“물러서, 유나!” 하준이 외치며 응축기를 겨눴다. 마력석이 다시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하, 하준아… 저건… 너무 위험해…” 유나가 경고했지만, 하준의 눈은 이미 결의에 차 있었다.
‘설마… 이 끔찍한 존재가 저 봉인문 안에 갇혀 있던 건가? 아니면… 봉인을 지키는 수호자? 아니, 그럴 리 없어. 저건… 봉인을 풀려고 하고 있어.’
푸른 마력탄이 응축기에서 뿜어져 나가기 직전, 덩어리가 멈칫했다. 그리고 수십 개의 촉수들이 일제히 하준과 유나가 숨어있는 사물함 뒤를 향해 뻗어오는 것을 보았다.
‘젠장, 들켰어!’
하준은 마력탄을 발사하며 급히 몸을 피했다. ‘콰아앙!’ 마력탄이 덩어리의 중앙을 강타했지만, 놈은 기괴한 소리와 함께 일부 촉수만 터져나갈 뿐, 마치 무한히 재생되는 듯 다시 꿈틀거렸다.
“도망쳐, 유나! 지금 당장!”
하준은 다시 마력 응축기를 장전하며 소리쳤다. 이 괴물은 탐식자보다 훨씬 강했다. 그리고 저 놈이 봉인을 푸는 것을 막아야 했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봉인 문 위쪽의 기괴한 눈동자 문양이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마치 경고하듯이, 혹은… 무언가 깨어나고 있다는 듯이.
폐허가 된 아테아 마법 학원 지하에 숨겨진 금기. 그것은 단순히 무언가를 봉인한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봉인된 것 자체가 이 폐허가 된 세상의 진정한 시작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진실은 이제 막 그 얼굴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두려움이 하준의 심장을 옥죄어 왔다. 이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아니, 먼저 저 괴물을 막고 이 문을 영원히 잠가야 했다. 이곳은… 인류에게는 너무 위험한 비밀을 품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