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협 (신선) 독립적인 단편 소설

밤은 항상 길었다. 특히 혼자 사는 도시의 아파트에서는 그 길이를 더욱 체감할 수 있었다. 김민준은 스물아홉, 평범한 그래픽 디자이너였다. 서울 한복판, 낡았지만 나름의 운치가 있는 아파트의 십삼 층에 살았다. 그가 이 아파트로 이사 온 건 반년 전이었다. 처음엔 그저 ‘지하철역 가깝고, 월세 적당하고, 창문 너머 도시 풍경이 제법 볼만하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뿐이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그의 평범한 일상은 기묘한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소했다.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아둔 책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거나, 분명 잠그고 나온 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민준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도 낡아서 문틈이 벌어졌나 보지,’ ‘내가 깜빡하고 놓고 간 거겠지,’ ‘잠결에 발로 찼나?’ 그렇게 넘겼다. 그러나 현상은 점점 더 빈번해지고, 도저히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새벽, 잠결에 목마름을 느껴 거실로 나섰을 때였다. 텅 빈 거실 한가운데,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유리컵이 공중에 둥실 떠 있었다. 얼음이 반쯤 녹은 물이 고요한 새벽 공기 속에서 은빛으로 반짝였다. 민준은 눈을 비볐다. 피곤해서 헛것을 봤나 싶었다. 하지만 컵은 여전히 그 자리에, 마치 투명한 손에 붙들린 듯 멈춰 있었다. 순간, 컵이 스르륵 기울어지더니, 안에 담긴 물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컵은 바닥으로 낙하해 산산조각 났다.

민준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오싹함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누구… 누구 없어요?” 떨리는 목소리가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대답은 없었다. 다만, 산산조각 난 유리 조각들이 서서히, 아주 천천히 바닥을 따라 미끄러지는 소리만이 그의 귀를 때렸다. 마치 누군가 그 조각들을 발로 미는 것처럼.

그때부터 민준의 삶은 악몽이 되었다.
밤에는 냉장고 문이 저절로 열렸다 닫혔고, 욕실에서는 수도꼭지가 세차게 틀어졌다가 다시 잠겼다. 텔레비전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채널이 제멋대로 바뀌었고, 한밤중에는 벽장에서 긁는 소리, 흐느끼는 소리, 심지어는 누군가 민준의 이름을 부르는 낮은 속삭임까지 들렸다.

처음에는 정신과 상담을 받았다. 의사는 스트레스성 환청이나 망상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하지만 민준은 확신했다. 이건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 이 집에 ‘무언가’가 있었다.
그는 이사를 고려했지만, 며칠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친구 집을 전전하다 돌아오면, 현상은 더욱 거세져 있었다. 마치 그를 기다렸다는 듯이.

하루는 퇴근하고 돌아와 문을 열자마자였다. 거실의 모든 가구가 뒤집혀 있었다. 소파는 천장을 향해 뒤집혀 있었고, 식탁은 한쪽 다리가 부러진 채 나뒹굴었다. 벽에 걸려 있던 그림 액자들은 산산조각 나 있었다. 공기 중에는 싸늘한 기운과 함께 흙먼지 같은 것이 떠다녔다.

“이건… 대체 뭐야!” 민준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그때였다. 부엌 쪽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는 접시가 아니라, 칼날이 길게 뻗은 식칼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식칼은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더니, 민준의 머리 위로 떨어지려는 듯 자세를 잡았다.

민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죽음의 공포가 온몸을 옥죄었다. 그러나 칼은 떨어지지 않았다. 대신, 챙!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바닥에 박혔다. 칼날이 박힌 곳은 민준의 발가락 바로 앞이었다. 그는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서 있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끄응… 젊은이, 거기서 뭐하는 겐가?”

그때였다. 뒤에서 들려오는 느릿하고 탁한 목소리. 민준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문득, 언제 열린 건지 모를 현관문 틈으로 키 작은 노인이 서 있었다. 흰색 한복을 입고, 길게 땋은 흰 수염을 가슴까지 늘어뜨린 채였다. 눈은 마치 오랜 세월 모든 것을 꿰뚫어 본 듯 깊고 형형했다. 손에는 마치 지팡이처럼 보이는, 오래된 나뭇가지 하나를 짚고 있었다.

“누구…세요?” 민준은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고, 이 난장판을 보고도 누구냐니. 하긴, 내가 자네에게 말을 걸었던 적은 없었지. 이 아래층에 사는 늙은이일세. 오씨라고 부르지. 사람들은 오 사범이라고 부르더군.” 노인은 민준의 집 안을 훑어보더니, 혀를 쯧쯧 찼다. “쯧쯧, 결국 터질 게 터졌구먼.”

“뭐가요? 뭐가 터졌다는 거죠? 혹시 아세요? 이 집에… 뭔가 있는 것 같아요. 저를 괴롭히고 있어요!” 민준은 다급하게 외쳤다.

오 사범은 민준의 말을 끊고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깨진 유리 조각과 뒤집힌 가구들을 개의치 않는 듯,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며 무언가를 감지하듯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언제부터 이런 기이한 일을 겪었나? 그리고… 자네 집안에 무언가 특별한 물건 같은 게 있나?”

민준은 어리둥절했다. “반년 전쯤 이사 오고 나서부터요. 특별한 물건이요? 딱히… 오래된 건 제가 가지고 온 조상님 제사 때 쓰던 향로 정도인데…”

“향로라고? 그 향로, 어디 있는가?” 오 사범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

민준은 옷방 한구석에 놓인 작은 나무 상자를 가리켰다. 오 사범은 그곳으로 다가가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고풍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작은 청동 향로가 들어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어딘가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오 사범은 향로를 들고 엄지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음, 예상했던 대로로군. 이 향로, 예사 물건이 아닐세. 자네 집안이 대대로 영험한 기운을 다루던 가문이었던가?”

민준은 어릴 적부터 어른들이 ‘조상님 중에 도사님이 계셨다’는 농담 같은 이야기를 했던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는 그런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글쎄요… 그냥 오래된 유물이라고 들었는데요.”

오 사범은 옅은 한숨을 쉬었다. “자네는 모르는군. 이 향로는 단순한 제기(祭器)가 아닐세. 수백 년 전, 자네 조상 중 한 분이 도를 닦으시며 영적인 기운을 담아두던 물건이지. 그리고 자네는… 그 조상의 피를 이어받아,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는 영근(靈根)을 지니고 있네.”

민준은 혼란스러웠다. “영근이요? 제가요? 그럼 이 폴터가이스트 현상이라는 게… 저 때문이라는 건가요?”

“정확히 말하면, 자네 때문만은 아닐세. 이 아파트가 지어진 터가 문제야. 원래 이곳은 고대에 영험한 기운이 흐르던 곳이었네. 하지만 현대에 들어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그 기운이 억눌리고 비틀렸지. 그 과정에서 오랜 세월 땅속에 갇혀 있던 원혼(怨魂) 하나가 깨어났네. 이 원혼은 지박령(地縛靈)과도 같아서 이 터를 벗어나지 못하고 떠돌았지.” 오 사범은 향로를 내려놓고 민준을 쳐다봤다. “그러다 자네가 이곳으로 이사 오면서, 자네의 잠재된 영적인 기운이 이 원혼을 자극하게 된 거야. 마치 메마른 땅에 단비가 내린 것처럼 말이야. 원혼은 자네의 기운을 흡수하며 힘을 키우고, 자네에게 계속해서 접촉하려 한 거지.”

“그럼… 저를 해치려는 건가요?” 민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해치려는 것보다… 존재를 알리고 싶어 하는 것에 가깝네. 하지만 그 과정이 너무 거칠고, 자네는 영적인 기운을 다루는 방법을 모르니 공포로 받아들인 것이지. 게다가 그 원혼이 오래도록 땅속에 갇혀 있었으니, 그 한(恨)과 원망이 상당할 걸세. 지금은 자네의 기운을 흡수하며 힘을 키웠으니, 이제는 단순한 폴터가이스트를 넘어 자네의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네.”

오 사범은 옷깃에서 낡은 천 조각에 싸인 부적 한 장을 꺼냈다. “이 부적은 나의 오랜 벗이 준 것일세. 기운이 강하니, 지박령을 잠시 제압할 수 있을 게야.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못 되네. 그 원혼의 한을 풀어주거나, 다시 봉인해야만 해.”

“어떻게요? 제가 어떻게 그런 걸 할 수 있죠?” 민준은 절망에 빠졌다.

“자네가 지닌 영근이 바로 해결책일세. 자네는 아직 잠들어 있을 뿐, 그 기운을 제대로 다룰 수 있다면 그 원혼을 달래거나, 이곳을 떠나게 할 수 있을 거야. 문제는… 그 원혼이 향로의 기운에 강하게 이끌려 있다는 걸세. 이 향로가 단순한 제기가 아니라, 선대의 도사가 영적인 통로로 사용하던 물건이기 때문이지. 자네의 영근과 이 향로가 만나면… 아마 그 원혼은 더욱 격렬하게 반응할 걸세.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기회가 될 수도 있어.”

오 사범은 침착하게 민준에게 향로를 들게 했다. “자, 이 향로를 들고 눈을 감게. 그리고 느껴봐. 이 집 안에 흐르는 차가운 기운을. 그리고 자네의 몸 안에 잠든 뜨거운 기운을.”

민준은 오 사범의 말에 따라 향로를 들고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공포감과 불안함만 가득했다. 하지만 오 사범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자, 등골을 타고 찌릿한 기운이 흘러들어 왔다. 순간, 그의 눈앞에 어둠이 아닌, 뿌연 안개 같은 것이 보였다. 안개 속에서 흐릿한 형체가 일렁였다.

그것은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의 형상이었다. 여인은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으로 민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인의 입술이 움직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민준은 그녀의 말이 머릿속에 울리는 것을 느꼈다. ‘내 땅… 내 삶… 빼앗겼어…’

“저기… 보여요… 여자가…” 민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보이는가? 그게 그 원혼일세. 그 여인은 원래 이 땅의 주인이었네. 수백 년 전, 전쟁 통에 가족을 잃고 홀로 남아 이 땅을 지키다, 외지인에게 무참히 살해당했지. 그 한이 땅에 스며들어 지박령이 된 거야.” 오 사범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자네가 그 한을 들어주고, 달래야 하네. 자네 안에 잠든 영적인 기운으로 그녀의 고통을 감싸 안아주게.”

민준은 여인의 형상에 더 집중했다. 여인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슬픔과 고통이 민준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때였다. 향로를 든 손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아나, 민준의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마치 몸 안에 거대한 에너지가 잠들어 있다가 깨어나는 듯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향로를 들어 여인의 형상 쪽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향로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푸른빛은 여인의 형상을 감싸 안으며, 그녀의 격렬한 분노를 조금씩 가라앉히는 듯했다. 여인의 얼굴에 서린 고통이 희미해졌다.

그때, 여인의 형상이 갑자기 거칠게 일렁이더니, 아파트의 벽을 향해 돌진했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아파트 전체가 진동했다. 벽에는 여인의 손자국 같은 검은 흔적이 섬뜩하게 남았다. 현상이 다시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거실의 유리창이 저절로 깨지며 산산조각 났고, 천장의 전등이 터져 불꽃이 튀었다. 공기 중의 차가운 기운이 칼날처럼 민준의 살을 파고들었다.

“안 돼… 다시 강해지고 있어!” 민준은 향로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내가…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자네 안에 있는 힘을 믿게! 자네의 영근은 그 원혼의 한을 달랠 수 있을 만큼 강하네! 그녀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고, 자네의 따뜻한 기운으로 감싸주게!” 오 사범의 목소리가 민준의 귓가에 맴돌았다.

민준은 다시 눈을 감고, 향로를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에 집중했다. 그 안에서 솟아나는 뜨거운 기운을 느꼈다. 그 기운은 민준의 온몸을 휘감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그는 그 기운을 여인의 형상이 있는 곳으로 보냈다. ‘편히 잠드세요…’ 그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이젠 편안해질 거예요…’

향로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그 빛은 여인의 형상을 완전히 감싸 안았다. 여인의 고통에 찬 비명 소리가 민준의 귓가를 찢어발기는 듯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모든 기운을 쏟아부었다.

점차 여인의 형상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에 서린 분노와 슬픔이 사라지고, 대신 평온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민준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는 듯했다. 그리고는 푸른빛과 함께 서서히 공기 속으로 녹아들었다.

아파트 전체를 뒤흔들던 소음과 진동이 멈췄다. 깨진 유리 조각과 부서진 가구들은 여전했지만, 공기 중의 싸늘한 기운은 사라지고 따뜻한 온기가 감돌았다. 민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떴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됐네… 됐어, 젊은이!” 오 사범이 민준의 어깨를 토닥였다. “자네가 해냈네. 그 원혼이 이제야 편안하게 이 땅을 떠날 수 있게 되었어.”

민준은 바닥에 주저앉아 떨리는 숨을 골랐다.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간 듯했다. 그는 자신이 방금 겪은 일이 믿기지 않았다. 현실 같지 않았다. 하지만 깨진 유리창, 뒤집힌 가구들, 그리고 손에 든 뜨거운 향로가 모든 것이 현실이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제가… 정말 이걸 해낸 건가요?” 민준의 목소리가 멍했다.

오 사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안에 잠들어 있던 영근이 깨어난 것이지. 이제 자네는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될 걸세. 어쩌면… 이 혼탁한 세상에서 자네가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

민준은 향로를 내려다보았다. 향로에서는 여전히 은은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는 더 이상 이 향로가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 아파트가, 이 도시가, 그가 알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수많은 기운과 존재들이 얽히고설킨 곳이라는 것을 어렴결에 깨달았다.

도시의 밤은 여전히 길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를 옥죄는 공포가 아니었다. 새로운 세상이 열린 듯한, 알 수 없는 설렘과 책임감이 뒤섞인 밤이었다. 김민준은 깨진 창문 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삶은 이제, 평범했던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어깨에는 가문의 영근, 그리고 새로운 길이 놓여 있었다. 오 사범은 말없이 그의 옆에 서서, 함께 도시의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조용히, 새로운 인연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