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엎드린 채, 강하준은 숨죽이며 눈앞의 풍경을 살폈다. 잿빛 하늘은 언제나처럼 칙칙했고, 멀리 보이는 고층 빌딩들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거대한 유령처럼 서 있었다. 폐허가 된 도시의 적막은 귀를 찢을 듯한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의 예민한 청각은 아주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았다. 저 멀리 부서진 잔해 더미 속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흐느낌*.
“젠장….”
그는 나지막이 욕설을 읊조렸다. 배낭의 낡은 어깨끈이 어깨를 파고들었다. 며칠째 제대로 된 식사는커녕 깨끗한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목은 바싹 타들어 가고, 위장은 이미 자신을 갉아먹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굶주림보다 더 위험한 건, 이 세상이 변해버린 이후부터 줄곧 그를 따라다니는 ‘환영’이었다. 벽의 얼룩이 웅크린 형체로 보이고, 바람 소리가 속삭임으로 들리는 착란. 그는 애써 정신을 붙들었다.
손에 든 낡은 망원경을 조심스럽게 조작하며, 하준은 흐느낌의 근원지를 다시 살폈다. 폐허가 된 병원의 외곽, 철골이 엿가락처럼 휘어진 건물 잔해 틈새였다. 뭔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작고, 마른 실루엣. 설마… 아이?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작은 돌멩이가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툭*.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본능적으로 몸을 돌리려는 순간, 차가운 금속성 물체가 그의 관자놀이를 강하게 압박해왔다.
“꼼짝 마.”
낮고 거친 목소리였다. 그는 얼어붙었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 낡은 볼트액션 소총의 총구가 그의 머리에 닿아있는 것이 느껴졌다.
“손 들어. 천천히.”
하준은 그대로 양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낡은 군복 차림의 여인이었다. 턱은 날카롭게 깎여 있었고, 눈은 경계심으로 가득했다. 나이는 스물 초반쯤 되었을까,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이미 수십 년은 더 살아온 사람처럼 피로에 찌들어 있었다. 등에 멘 낡은 배낭과 허리에 찬 나이프, 그리고 손에 들린 소총까지. 전형적인 생존자의 모습이었다.
“뭐 하는 놈이야? 여긴 내 구역이야.” 여인이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하준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구역? 이 폐허에 구역이 어딨어.”
여인의 눈매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까불지 마. 지금 네 목숨은 내 손에 달렸으니까.”
“알아.” 하준은 담담하게 답했다. “난 그냥… 먹을 걸 찾고 있었을 뿐이야. 네 구역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며칠 째 아무것도 못 먹었으니까.”
그의 말이 끝나자, 여인의 시선이 그의 배낭으로 향했다. “네 배낭엔 뭐가 있지?”
“아무것도 없어. 진짜야.”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있었다면 진작 먹었겠지.”
여인은 잠시 침묵하더니, 소총을 살짝 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경계는 풀지 않았다. “내가 저 애를 먼저 발견했어.”
하준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다시 병원 잔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 보았던 작은 실루엣. 그는 그제야 여인의 시선이 자신에게 오기 전에 이미 그녀가 그곳을 살피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애?” 하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슨 애?”
“저기, 저 폐허 속에. 여자애가 있어. 기절한 것 같기도 하고….” 여인의 목소리에 미묘한 불안감이 스쳤다. “근데 뭔가 이상해.”
하준은 다시 망원경을 들어 그곳을 비춰보았다. 더 가까이. 흐느낌은 멈췄지만, 여전히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그런데… 정말 이상했다. 그 작은 몸 주변으로, 마치 어둠이 일렁이는 듯한 그림자가 맴돌았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지만, 그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어둠처럼 움직였다.
“저게 뭐야…?” 하준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섞였다.
여인이 낮게 읊조렸다. “모르겠어. 다가가려 했는데, 뭔가… 헛것이 보이고, 이상한 소리가 들렸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귓가에 자꾸 누가 속삭이는 것 같아. ‘거둬라… 거둬라…’”
하준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세상이 변해버린 뒤, 그들을 괴롭히는 것은 굶주림이나 돌연변이 괴물만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정신적인 공격.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 그것은 인간의 이성을 갉아먹고, 결국에는 광기로 몰아넣었다.
“젠장, 또 그건가….” 하준은 이를 악물었다. “그 애 주변에 있는 게 저거 때문인가.”
“아마도. 저 애가 저기 쓰러진 것도 저것 때문일 거야.” 여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저 애를 그냥 둘 순 없어.”
하준은 여인을 돌아보았다. 이름조차 모르는 이 여인의 눈 속에는 공포와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연민이 깃들어 있었다. 이 미쳐버린 세상에서, 누군가에게 연민을 느낀다는 건 사치이자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마지막 발버둥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할 건데?” 하준이 물었다. “혼자 갈 셈이야? 저게 뭔지 알지도 못하면서?”
여인은 주저했다. 그녀의 소총은 여전히 하준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 긴장은 이전보다 훨씬 완화되어 있었다. “혼자는 무리겠지.” 그녀의 시선이 하준에게 고정되었다. “너… 같이 갈래? 물론, 보상은 없어. 어쩌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고.”
하준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굶주림에 지쳐 비틀거리는 몸. 곧 부서질 것 같은 정신. 하지만 저 작은 아이와 그 주변의 ‘어둠’은 묘하게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혹은, 그를 이 세상의 모든 고통에서 해방시켜줄지도 모른다는 알 수 없는 끌림.
“좋아.” 하준은 배낭을 고쳐 메었다. “하지만 내가 저 아이를 구하든, 저게 나를 잡아가든… 네 총알이 먼저 내 머리를 뚫는 일은 없어야 할 거야.”
여인은 피식 웃었다. 짧고 건조한 웃음이었다. “약속할게. 만약 저게 널 해치려 한다면, 내가 먼저 저것에게 총을 쏠 테니까.” 그녀는 소총을 들고 조심스럽게 잔해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 이름은 이세나야. 너는?”
하준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의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거렸다. “강하준.”
그들은 서로에게서 한 치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은 채, 폐허가 된 병원을 향해 나아갔다. 아이 주변을 맴도는 살아있는 듯한 어둠, 그리고 귓가에 맴도는 알 수 없는 속삭임이 그들의 신경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세나는 총을 굳게 쥐었고, 하준은 그의 낡은 나이프에 손을 얹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어둠에 잠식된 아이일까, 아니면 그들의 남은 이성마저 집어삼킬 광기의 심연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