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장막이 채 걷히지 않은 새벽 네 시, 미나의 오피스텔 창밖은 먹빛이었다. 십여 층 아래 도로는 잠시 숨을 고르는 듯 조용했지만,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사이렌 소리는 도시가 완전히 잠들지 않았음을 알렸다. 미나는 침대 머리맡 스탠드의 불을 켜고, 멍하니 벽을 응시했다. 시곗바늘은 째깍거리는 대신 숫자를 뚝뚝 끊어 바꾸는 디지털 방식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듯했다.
벌써 일주일째였다.
처음엔 피곤해서 잘못 본 줄 알았다. 거실 바닥에 뒹굴던 리모컨이 다음 날 아침 소파 쿠션 위에서 발견되었을 때, 미나는 그저 자신이 건망증이 심해졌다고 생각했다. 매일 아침 마시는 믹스 커피 봉지가 감쪽같이 사라졌다가, 저녁에 엉뚱하게도 화장실 선반 위에서 나타났을 때도 그랬다. ‘내가 드디어 스트레스성 건망증에 걸린 건가?’ 애써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점차 그 기묘함은 일상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이틀 전,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였다. 분명 거울에 비치지 않도록 벽에 걸어둔 수건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것도 한 장이 아니라, 서너 장이 전부. 미나는 순간 오싹함을 느꼈다. 욕실 문을 닫고 들어온 뒤로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는데. 혹시 누가 들어왔다가 나간 건가? 그러나 잠금장치는 굳게 채워져 있었고, 창문은 고층이라 열릴 리 만무했다.
어젯밤, 그 현상은 정점을 찍었다.
미나는 퇴근 후 간단히 저녁을 먹고 침대에 누워 태블릿으로 웹소설을 읽고 있었다. 익숙한 남자 주인공의 목소리가 이어지는 한창 절정 부분에서, 갑자기 주방에서 ‘쨍그랑!’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미나는 깜짝 놀라 태블릿을 떨어뜨릴 뻔했다.
“뭐야?”
누군가 침입한 건가?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미나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숨을 죽이고 주방 쪽으로 향했다. 식칼이라도 들고 가야 하나 고민했지만,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거실을 지나 주방 입구에 다다르자, 불이 꺼진 주방 안에서 깨진 유리 조각들이 희미한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세상에…”
싱크대 위 선반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유리컵 하나가 산산조각 나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미나는 조심스럽게 불을 켰다. 조명이 주방을 환하게 밝히자,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유리 파편들이 섬뜩했다. 마치 누군가 던져 부순 것처럼 보였다.
그때, 등 뒤에서 싸늘한 한기가 스쳤다. 미나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공기만이 텅 빈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한기는 마치 거대한 손이 등을 쓸어내린 듯 선명하게 느껴졌다.
“젠장…”
미나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두려움이 온몸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그날 밤, 미나는 밤새 불을 켜놓고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새벽 네 시. 미나는 잠이 완전히 달아난 채 벽만 보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이 아파트에 이사 온 지 벌써 3년인데,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잖아.’
미나는 휴대폰을 들어 포털 사이트에 ‘아파트 폴터가이스트’라고 검색했다. 수많은 오컬트 커뮤니티 글과 유튜브 영상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하나를 클릭했다.
「…주로 강한 염원이나 감정이 남아있는 곳에서 발현되며, 초기에는 물건의 이동, 소음 등으로 시작해 점차 물리적 간섭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특히 특정 인물에게만 반응하는 경우가 많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미나는 글을 읽어 내려갈수록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특정 인물에게만 반응한다라…’
그때였다. 닫혀 있던 옷장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아주 미세하게 열렸다. 미나는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불이 켜진 방이었지만, 옷장 안은 어둠 속에 잠겨 있어 마치 검은 구멍처럼 보였다.
“누구… 거기 있어?”
미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옷장 안의 어둠이 한층 더 짙어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미나는 휴대폰 플래시를 켜서 옷장 안을 비췄다. 빽빽하게 걸린 옷가지들 사이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안심과 동시에, 더욱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데, 왜 문이 열렸을까?
그 순간, 미나의 침대 옆 협탁에 놓여 있던 액자가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액자 유리는 깨지지 않았지만, 그 소리는 미나의 심장을 저 깊은 곳까지 흔들었다.
미나는 그대로 얼어붙어 액자를 응시했다. 액자 속에는 해맑게 웃고 있는 미나의 어린 시절 사진이 담겨 있었다.
그러자, 깨진 유리컵 파편들처럼 조각난 듯한,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들이 방 안을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여러 사람이 동시에 속삭이는 듯했지만, 그 어떤 단어도 명확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저 차갑고 불쾌한 소음만이 미나의 귓가를 울렸다.
미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제발… 제발 사라져 줘. 제발…’
그러나 소음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선명해지고, 그 속에서 무언가 튀어나오려는 듯한 기묘한 압력이 느껴졌다. 미나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이 작은 오피스텔이, 단숨에 그녀를 집어삼키려는 듯한 거대한 괴물처럼 느껴졌다.
그때, 등 뒤에서 싸늘한 손길이 미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가락들이 그녀의 살을 파고드는 듯한 통증과 함께, 누군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가지… 마…”
목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그 섬뜩함은 미나의 영혼을 꿰뚫는 듯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애절하면서도 광기 어린 집착이 느껴졌다.
미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불을 걷어차고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온몸의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터져버릴 것 같았다.
“끄악!”
그녀의 비명은 공허한 방 안에서 메아리쳤다. 그와 동시에, 방 안의 모든 불이 ‘퍽!’ 소리와 함께 꺼졌다. 순식간에 암흑이 찾아왔다.
사방은 고요했다. 방금 전까지 미나를 괴롭히던 모든 소음과 기척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미나는 숨을 헐떡이며 방 중앙에 선 채로 주위를 살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둠 속에 숨어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미나는 손을 더듬어 겨우 휴대폰을 찾아 플래시를 켰다. 희미한 불빛이 방 안을 쓸고 지나가자,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방문에 매달려 있는 오래된 탁상시계였다. 벽시계가 아니라, 낡고 멈춰버린 탁상시계.
미나는 저 시계를 저기에 둔 적이 없었다.
그리고, 시계 바늘이 가리키는 시간은…
새벽 4시 44분.
미나의 심장이 다시 한번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이 모든 기괴한 일들이 시작된 시간. 그녀가 침대에서 잠 못 이루고 벽을 응시하던 바로 그 시간.
문득, 탁상시계의 유리판 안에 맺혀 있는 작은 물방울 같은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눈물이었다. 누군가 울다 멈춘 듯한, 마른 눈물 자국.
그리고 그 눈물 자국 아래로, 긁힌 듯한 작은 글씨가 희미하게 보였다.
「나를… 혼자 두지 마…」
미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휴대폰 불빛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이 아파트는, 더 이상 그녀의 보금자리가 아니었다. 이곳은, 어떤 존재의 외로움과 집착이 만들어낸, 기괴한 감옥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창밖은 여전히 어둠 속이었다. 하지만 미나는 알고 있었다. 동이 터도, 이 밤의 공포는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이제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절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