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한 도서관 복도에 퍼진 퀴퀴한 종이 냄새는 강태율에게는 그 어떤 향수보다도 편안했다. 층계참을 오를 때마다 삐걱거리는 낡은 나무 계단은 그의 심장박동처럼 규칙적인 소리를 냈다. 시끄러운 급우들의 떠들썩함, 교사들의 잔소리, 그리고 지겨운 시험 기간의 압박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마다 태율은 습관처럼 이 곳, 도서관의 가장 외진 구석을 찾았다.
“젠장, 수학은 왜 이렇게 매년 똑같이 어려운 거야.”
그는 투덜거리며 도서관 3층, 아무도 찾지 않는 고서적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빛바랜 책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높은 서가들은 태율을 압도하는 동시에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책들 사이로 희미하게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은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들을 금빛으로 물들였다.
최근 들어 태율은 이상한 버릇이 하나 생겼다. 그건 바로 이 고서적 코너에서도 가장 손길이 닿지 않는, 곰팡내 나는 맨 끝 서가를 아무 이유 없이 더듬는 것이었다. 십 년 넘게 도서관을 드나들었다는 사서 선생님조차 저 끝은 정리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했던 곳. 아무런 기대도 없이 그저 손끝으로 거친 책등을 쓸어 넘기던 태율의 손에, 문득 이상한 감촉이 닿았다.
“어라?”
다른 책들보다 훨씬 깊숙이 박혀 있던 그 부분은, 책의 모서리가 아니라 얇은 틈새였다. 호기심이 발동한 태율은 손가락을 틈새에 밀어 넣었다. 생각보다 깊게 들어가는 손가락 끝에 무언가 덜컥하고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힘껏 밀자, 뻑뻑한 소리와 함께 책장 하나가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밀려난 책장 뒤편에는 어둠이 가득한, 마치 벽과 벽 사이에 숨겨진 듯한 작은 통로가 드러났다. 쾌쾌한 먼지 냄새는 이곳에서 더욱 진동했다. 태율은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좁고 낮은 통로는 몇 발자국 가지 않아 끝에 닿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작은 받침대 위에 놓인 한 권의 책이 있었다.
책은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주변의 다른 책들이 낡고 헤진 종이로 만들어진 것과 달리, 이 책은 두꺼운 가죽 표지에 정교한 금속 장식이 박혀 있었다. 세월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놀랍도록 온전했다. 표지 중앙에는 낯선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는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미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빛은 너무나 희미해서, 휴대폰 플래시를 끄자마자 주변의 어둠에 완전히 흡수되어 버렸다.
“이게 뭐야…?”
태율은 홀린 듯 책에 손을 뻗었다. 차가운 금속 장식과 거친 가죽 표면이 손끝에 닿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단순한 한기가 아니었다. 마치 수천 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듯한 격렬한 전율이었다.
동시에,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도서관의 어두컴컴한 풍경이 아니었다. 거대한 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고, 푸른 이끼로 뒤덮인 바위들이 듬성듬성 흩어져 있는 낯선 숲이었다. 저 멀리에서는 에메랄드빛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그 위로는 본 적 없는 형상의 새들이 날아다녔다. 귀를 기울이자, 바람 소리 사이로 알아들을 수 없는 고대의 언어가 속삭이는 듯했다. 환상이 너무나 생생해서, 태율은 자신이 정말 그 숲 한가운데 서 있는 것만 같았다.
“흐읍!”
태율은 숨을 들이켰다.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환상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다시 눈앞에는 휴대폰 플래시가 비추는 낡은 책과 어두운 통로가 돌아와 있었다.
“젠장, 방금 그게 뭐였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손끝에는 여전히 책에서 전해진 듯한 묘한 잔열이 남아있었다. 착각? 환각? 고작 책 한 권 만졌다고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태율은 다시 책을 바라봤다. 아까 보았던 미미한 빛은 더 이상 없었다. 그저 평범한, 조금 낡은 고서적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의 기억 속에는 방금 본 숲의 풍경과 귓가에 맴도는 고대의 속삭임이 너무나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손을 떼자마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온 현실이 더욱 기이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다시 책 표지에 얹었다.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이번에는 아무런 전율도, 환상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야… 나 착각한 건가?”
하지만 태율은 확신했다. 분명히 뭔가 있었다. 단순히 환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감각이 너무나 생생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은 생각보다 가벼웠지만, 묘하게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걸… 아무에게도 말해선 안 돼.’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책은 보통의 물건이 아니다. 그리고 이 안에는, 자신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책을 조심스럽게 배낭 깊숙한 곳에 숨겼다. 그리고는 다시 책장을 원래대로 밀어 넣고 통로를 빠져나왔다.
도서관은 이미 폐관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로 가득했다. 태율은 서둘러 낡은 계단을 내려갔다. 마음속으로는 방금 겪은 일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발걸음이 빨라질수록 심장은 더 격렬하게 울렸다.
“이봐, 강태율! 그렇게 서두르지 마. 책을 제대로 안 꽂았잖아.”
어느새 도서관 문 앞에 도착한 사서 선생님이 태율을 불렀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사서 선생님은 잔소리를 하면서도, 묘한 시선으로 태율의 등 뒤, 정확히는 그가 방금 나온 3층 고서적 코너 쪽을 흘긋 바라보는 것 같았다.
태율은 순간적으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서 선생님은 원래 그런 분이 아니었다. 혹시, 내가 숨겨진 통로에서 나온 것을 본 건 아닐까? 아니면, 내가 가지고 나온 이 책에 대해 알고 있는 건가?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네!” 하고 대답한 뒤 서둘러 도서관 문을 나섰다. 하지만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은 마치 칼날처럼 그의 신경을 꿰뚫는 것 같았다.
밤하늘 아래, 태율은 자신의 배낭 속에 잠들어 있는 고대의 비밀을 품고 혼란스러운 걸음을 옮겼다. 이제 그의 평범한 일상은 영원히 끝난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시작은, 아무도 찾지 않던 낡은 도서관의 가장 깊은 곳에서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