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샴페인 잔을 든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니, 떨리는 것은 내 손이 아니라 눈앞에 펼쳐진 화려한 광경이었을지도 모른다. 높은 천장을 가득 채운 샹들리에의 불빛 아래, 상류층 인사들의 가식적인 웃음소리가 마치 파도처럼 밀려왔다. 오늘 밤, 이 모든 가증스러운 환상 속으로, 내가 설계한 파멸의 서곡이 울려 퍼질 것이다.
“강대표님, 이 작품 정말 훌륭하지 않습니까? 숨겨진 작가의 재능이 드디어 빛을 발하는군요.”
옆에 선 미술품 컬렉터 박 회장이 들뜬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넸다. 나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의 말이 옳았다. 한때는 미천한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재능이, 이제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화려한 조명 아래서 빛나고 있었다. 마치 나처럼.
2년 전,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믿었던 친구의 손에 의해, 잔인하게 파괴되었다. 내가 일구었던 꿈, 쌓아 올렸던 명성,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까지. 모든 것이 한순간에 재가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나를 ‘실패한 사업가’로 기억했지만, 나는 살아남았다. 폐허 속에서 칼을 갈았고,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완전히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내 이름은 강태한. 아니, 이젠 ‘강재혁’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성공한 신진 벤처 투자가이자 미술품 컬렉터로. 아무도 강태한의 그림자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가면을 쓰고 살아왔다.
“어디 보자… 오늘 최민준 이사도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박 회장의 입에서 그 이름이 흘러나왔을 때, 내 손에 들린 샴페인 잔이 터질 뻔했다. 심장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내렸지만, 얼굴에는 완벽하게 무심한 미소가 걸렸다.
“아, 최 이사님요. 그분도 이 업계에서는 꽤 유명하시죠. 요즘 주가가 대단하던데요.”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겉으로는 평온했지만, 내 안의 모든 감각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사냥감을 기다리는 맹수의 눈빛으로, 나는 군중 속을 훑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나타났다.
입구 쪽에서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한 남자. 값비싼 명품 정장을 빼입고,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얼굴 가득 머금은 남자. 내 모든 것을 앗아간 최민준이었다. 그의 옆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아마도 최근 그가 자랑스럽게 소개했던 약혼녀, 서지윤이리라.
“최 이사님! 오셨군요!”
박 회장이 반갑게 그를 향해 손짓했다. 최민준은 주변 사람들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며, 마치 개선장군처럼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눈빛은 거만했고, 입가에는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의 오만이 배어 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하지만 그 확신은, 곧 산산이 부서질 것이다.
최민준이 박 회장과 악수를 나누는 동안,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스쳐 지나갔지만, 아무런 인식도 없었다. 그는 단지 내게 ‘성공한 타인’의 얼굴만을 보았을 뿐이다. 그에게 강태한은, 오래전 죽어 사라진 패배자에 불과했다.
“박 회장님,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작품들이 정말 훌륭하군요. 특히 저 메인 작품은, 시대를 앞서가는 통찰력이 느껴집니다.”
최민준은 능숙하게 미술품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한때는 예술의 ‘예’ 자도 모르던 녀석이, 이제는 고상한 취미까지 흉내 내고 있었다. 역겨웠지만, 나는 미소를 유지했다.
“아, 마침 강재혁 대표님께도 그 작품에 대해 말씀드리던 중이었습니다. 강 대표님은 신진 작가 발굴에 일가견이 있으시죠.”
박 회장이 나를 최민준에게 소개했다. 최민준의 시선이 드디어 내게로 향했다. 나는 손에 든 샴페인 잔을 살짝 들어 보이며 목례를 했다. 눈을 마주치는 그 순간, 나는 그의 눈동자 속에서 어떠한 혼란의 조짐도 읽어내지 못했다. 완벽했다. 나의 복수는, 완벽하게 위장된 첫 발을 내디뎠다.
“강재혁 대표님이시군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요즘 투자 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이시죠.”
최민준이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한때는 그 손이 내게 따뜻한 위로와 지지를 주었지만, 이제는 기만과 배신으로 얼룩진 손이었다.
“최민준 이사님도 업계의 전설이시죠. 특히 그 탁월한 안목과 과감한 결정력은 본받을 점이 많습니다.”
나는 진심인 척,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어깨는 으쓱거렸고, 눈빛에는 만족감이 가득했다. 이 순간, 나는 그가 얼마나 공허한 영혼을 가졌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칭찬 한마디에 이토록 쉽게 도취되는 자라니.
“하하, 과찬이십니다. 강 대표님이야말로, 짧은 시간 안에 그렇게 큰 성공을 이뤄내셨으니, 저희 같은 낡은 물건들은 명함도 못 내밀죠.”
“낡은 물건이라뇨. 최 이사님은 여전히 건재하시지 않습니까. 오히려 저는… 어떤 이의 뼈아픈 실패를 거울삼아 여기까지 온 것에 불과합니다.”
나는 미묘한 뉘앙스를 담아 말을 흘렸다. 최민준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미소가 옅어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고, 그는 이내 특유의 능글맞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하하, 뭐…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습니까. 저도 젊은 시절엔 수많은 실패를 겪었죠.”
“그렇죠. 하지만 어떤 실패는… 그 과정에서 모든 것을 잃게 만들고,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마치 불에 타버린 흔적처럼요.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그 불이, 훗날 더 단단한 강철을 만드는 용광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의도적으로 ‘불’, ‘상처’, ‘용광로’ 같은 단어들을 사용했다. 우리의 과거를 암시하는, 아주 사적인 이야기의 파편들이었다. 최민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마치 불쾌한 기억을 떠올린 듯, 인상을 찌푸렸다.
“강 대표님 말씀이 철학적이시군요. 하지만 저는 좀 더 실용적인 쪽이라… 하하.”
그는 얼버무리며 화제를 돌리려 했다. 내가 원하는 반응이었다. 의심의 씨앗은 뿌려졌다. 아직은 너무나 미약한 씨앗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맹독을 품은 거대한 나무로 자라날 것이다.
그때, 최민준의 옆에 있던 서지윤 씨가 수줍게 웃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강 대표님, 저도 대표님의 투자 성공 사례들을 관심 있게 지켜봤어요. 정말 놀랍더라고요.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미래를 예측하시죠?”
그녀는 선량하고 순수한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 순수함이 최민준의 옆에서 더욱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녀는 아마 최민준의 본모습을 모를 것이다. 그가 어떤 악마인지, 그의 손에 어떤 피가 묻어있는지.
“미래를 예측한다기보다는… 과거를 철저히 분석하고, 현재의 변수들을 세밀하게 계산할 뿐입니다. 물론, 가끔은 운명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예상치 못한 암초에 부딪히기도 합니다만.”
나는 서지윤 씨를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내 말은 분명 그녀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진짜 의미는 최민준을 향한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암초’. 그 암초는 바로 나였다.
최민준은 그제야 완전히 불편해진 표정이었다. 그는 내게서 시선을 떼어내며 박 회장에게 다른 작품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내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 틈을 주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샴페인 잔을 기울였다. 차가운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흐르며, 내 안의 뜨거운 복수심을 잠시 가라앉히는 듯했다.
최민준과 서지윤 씨가 박 회장과 함께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며, 나는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군중 속에 섞여 그들을 주시했다.
내 계획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최민준이 가진 모든 것을, 내가 잃었던 것보다 더 잔인하게 빼앗을 것이다. 명성, 돈, 그리고 그의 옆에 선 서지윤이라는 여인까지. 그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이, 내 손에 의해 조각조각 부서질 것이다.
복수는 차갑게 식어버린 요리처럼, 가장 차가울 때 가장 맛있는 법이니까.
나는 서지윤 씨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녀는 아름다웠고, 순진했으며, 최민준이라는 독사에 물릴 준비가 되어 있는 순백의 꽃과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 꽃을 구원할 것인가, 아니면 복수의 제물로 삼을 것인가.
아니. 구원? 제물?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최민준의 완벽한 파멸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 부서지거나, 사라지거나, 망가진다 해도… 그것은 나의 알 바가 아니었다.
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파멸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뜨겁게 끓어오르는 듯했다. 이제 막, 막이 올랐을 뿐이다. 최민준, 네가 겪게 될 지옥은, 내가 겪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추악하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네가 나를 강태한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한, 나는 강재혁이라는 이름으로, 네 삶의 모든 것을 갉아먹을 것이다. 천천히, 그리고 아주 즐겁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