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잿빛 그림자 아래서
강철의 도시, 그 이름처럼 냉혹한 회색빛 장막이 드리워진 곳. 높이 솟아오른 천룡 제국의 강철 첨탑들은 저 멀리 희미한 햇빛마저 가로막아, 도시는 언제나 그림자 아래에 있었다. 빌딩 숲 사이를 가로지르는 비좁은 골목길에서는 습기 머금은 곰팡이 냄새와 닳아빠진 기계에서 풍기는 기름 냄새, 그리고 잊을 만하면 코를 찌르는 매캐한 탄내가 뒤섞여 희뿌연 안개처럼 깔려 있었다.
지훈은 낡은 수레를 끌고 그 익숙한 냄새 속을 헤쳐 나갔다. 삐걱거리는 바퀴 소리가 텅 빈 골목에 울렸다. 그의 얇은 외투 사이로 스미는 차가운 바람은 뼈를 에는 듯 시렸다. 오늘도 그는 제국군 보급창에서 남은 자재를 받아 민간 구역의 작업장으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하찮은 일이었지만, 제국의 강철 첨탑 아래에서 ‘하찮지 않은’ 일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제국의 거대한 톱니바퀴를 돌리기 위한 부속품일 뿐.
“흐읍….”
입김이 하얗게 흩어졌다. 어둠이 완전히 깔린 것은 아니었지만, 이 도시의 하늘은 언제나 해질 녘처럼 어둑했다. 강철 건물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거리를 집어삼키고, 그 아래로는 낡은 가로등만이 희미하게 빛을 뿌렸다. 가로등 아래를 스쳐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 대신 피로와 공포가 짙게 서려 있었다. 모두 고개를 숙인 채 빠른 걸음으로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저마다의 이유로, 저마다의 생존을 위해.
지훈은 한때 이 도시의 활기 넘치던 모습을 기억했다. 제국의 통치가 강화되기 전, 회색빛 콘크리트 사이에서도 꽃잎처럼 피어나던 웃음소리와 골목을 가득 채우던 노랫소리가 있었다. 이제는 그런 소리 대신 제국군 순찰대의 구둣발 소리나 공중을 가로지르는 제국 드론의 낮고 음산한 굉음만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문득 골목 벽에 붙은 낡은 전단을 보았다. ‘제국의 영광을 위해, 시민은 복종하라.’ 수없이 보아온 문구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 문구 아래, 누군가 긁어놓은 듯한 작은 낙서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희미한 숯으로 그린 듯한, 마치 얽매인 덩굴 식물 같은 문양이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는, 교묘하게 숨겨진 그림.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지훈의 눈에는 아주 미세하고 희미한 푸른빛 ‘잔향’이 아른거렸다. 마치 누군가의 강렬한 염원이 잉크처럼 번져 남아 있는 듯한 기시감이었다. 그는 종종 이런 잔향을 보았다. 강한 감정이 얽매인 장소나 물건에서, 혹은 격렬한 사건이 벌어졌던 곳에서.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아주 희미한 빛의 흔적이었다. 어릴 적에는 그저 눈이 피곤한 탓인 줄 알았다. 하지만 성장하며 그것이 자신에게만 보이는 특별한 무언가임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그는 이 능력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는 것은, 언제나 위험을 동반하기 마련이었다.
“어이, 거기! 뭐 하는 놈이야!”
날카로운 목소리가 지훈의 등 뒤를 꿰뚫었다. 몸이 저절로 경직됐다. 제국군 순찰대였다. 제국군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불쑥 나타났다. 마치 그림자처럼, 혹은 강철 도시의 숨결처럼.
지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헬멧 아래로 빛나는 제국군의 시선이 그를 훑었다. 완벽하게 정비된 갑옷과 번쩍이는 무기가 위압적이었다. 지훈이 끌고 다니는 낡은 수레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납품 중입니다. 제국군 보급창에서 작업장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는 얼른 허리춤에 차고 있던 납품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낡고 구겨진 종이였지만, 제국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제국군 병사 하나가 거만한 표정으로 증명서를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는 대충 훑어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흐음, 깡통이나 나르는 천한 놈이었군. 근데 왜 벽에 붙은 종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지?”
지훈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낙서를 본 것을 들킨 것인가? 아니면 그저 트집인가? 그는 애써 침착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그저… 제가 납품할 작업장이 어디쯤인지 보려고 했습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
“거짓말 마라! 놈들이 심어놓은 표식을 본 게 아닌가!” 다른 병사가 지훈에게 다가오며 험악하게 말했다.
‘놈들’이라는 말에 지훈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제국에 대항하는 비밀 조직, ‘반란군’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제국은 그들을 ‘불순분자’라 부르며 끊임없이 탄압하고 있었다. 도시 곳곳에는 그들을 색출하기 위한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그들을 돕는 자는 어떤 명분으로든 처형당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그저 제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지훈은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이봐, 이 자식 눈빛이 께름칙한데? 잡아서 심문해볼까?”
병사 중 한 명이 들고 있던 ‘섬광총’을 지훈에게 겨눴다. 섬광총은 사람을 죽이지는 않지만, 강렬한 에너지 충격파로 정신을 완전히 마비시켜 폐인으로 만들 수도 있는 무서운 무기였다.
그 순간, 지훈의 눈에 다시 한번 푸른 잔향이 선명하게 아른거렸다. 이번에는 벽의 낙서뿐만이 아니었다. 병사들의 무기에서, 그리고 그들 주변의 공기에서도 희미하지만 강렬한 위협의 잔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동시에 병사들의 뒤편, 어둠 속 골목 깊숙한 곳에서 또 다른 붉은빛 잔향이 감지되었다. 그것은 마치… 끓어오르는 분노와 결의의 흔적 같았다.
그리고 들렸다. 아주 작고 희미했지만, 분명히 들렸다.
_똑, 똑, 똑._
마치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무언가를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한 규칙적인 소리. 그 소리는 붉은 잔향이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제국군 병사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지훈에게 쏠려 있었다.
“내가 네놈의 꿍꿍이를 모를 줄 알아? 요즘 부쩍 이런 표식들을 남기는 쥐새끼들이 늘었다더군. 자백하지 않으면….”
병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병사의 섬광총이 바닥에 떨어졌다. 동시에 병사의 몸이 휘청거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마치 누군가 보이지 않는 힘으로 그를 밀친 것처럼.
“뭐… 뭐야?!”
남은 병사들이 당황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지훈의 눈에만, 붉은 잔향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어둠 속을 가르고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두 번째 병사 역시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며 쓰러졌다. 그의 목덜미에는 작은, 날카로운 파편이 박혀 있었다.
“공격이다! 경계!”
이제 남은 것은 증명서를 들고 있던 병사뿐이었다. 그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허둥지둥 무기를 뽑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어둠 속에서 번개처럼 달려 나온 그림자가 그의 손에서 증명서를 낚아채고, 그의 복부를 강하게 가격했다.
콜록!
병사는 그대로 꺾이며 쓰러졌다. 그제야 지훈은 그 그림자가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들고 있던 자신의 납품 증명서가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어둠 속의 인영은 쓰러진 병사들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지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헬멧이나 제복 대신,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쓴 모습이었다. 그 인영의 주변에서는 붉은 잔향이 마치 춤추듯 강렬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후드 아래로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지훈은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 방금 전 그 낙서를 남긴 자 중 하나일 것이라고. 그리고 그가 발산하는 붉은 잔향은, 그가 품은 제국에 대한 깊은 증오와 혁명의 열망임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인영은 지훈의 눈을 응시하는 듯 잠시 멈춰 섰다. 마치 지훈이 가진 특별한 능력을 눈치챈 것처럼. 이윽고 인영은 짧고 굵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 증명서는 내가 잠시 쓴다.”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지만, 그 속에는 묘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인영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지훈에게서 훔쳐낸 증명서를 자신의 주머니에 넣고는, 다시 어둠 속으로 녹아들듯이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붉은 잔향만이 희미하게 남아 허공에 흩어졌다.
지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쓰러진 제국군 병사들, 흩어진 섬광총, 그리고 사라진 자신의 납품 증명서. 모든 것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방금 무엇을 목격한 것인지, 아니, 무엇에 휘말린 것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골목 저편에서 저벅저벅, 또 다른 제국군 순찰대의 구둣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훈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자리에 그대로 있다가는 자신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는 낡은 수레를 버려둔 채, 정신없이 골목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발소리에 맞춰 격렬하게 울렸다. 잿빛 그림자 아래, 그의 삶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맞이하고 있었다. 평범한 운반꾼으로 살아가던 지훈의 세상에, 천룡 제국에 맞서는 자들의 붉은 잔향이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