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거친 바위틈을 비집고 자란 마른 풀들이 허무하게 흔들리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운현은 낡은 도포 자락을 여미며 절벽 아래를 응시했다. 아래는 아득한 심연, 그 끝에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한 폐허가 점점이 박혀 있었다. 한때는 찬란했을 강호의 요충지였으리라. 이제는 잿빛 먼지와 부서진 돌무더기만이 과거를 웅변하고 있었다.

“사부님, 저 아래는… 정말 폐허인가요?”

뒤에서 들려오는 소연의 목소리는 불안감으로 가득했다. 열세 살 소녀의 얼굴은 흙먼지로 얼룩져 있었지만, 또렷한 눈빛에는 굶주림과 함께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 세대 전 대파멸의 흔적이다. 우리가 찾던 곳은 아니겠지.”

대파멸. 강호의 모든 문파가 사라지고, 영웅호걸들의 시대가 종말을 고한 그때를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살아남은 자들은 짐승처럼 흩어졌고, 세상은 거대한 무덤이 되었다. 운현과 소연은 그 무덤 위를 떠도는 그림자였다. 그들이 찾아 헤매는 것은 전설 속 약초도, 비전 무공서도 아니었다. 단지 살아남기 위한 한 조각의 빵, 그리고 짧은 밤을 견딜 수 있는 안전한 잠자리뿐이었다.

지난 사흘간 그들이 먹은 것은 겨우 독 없는 들풀과 지렁이 몇 마리였다. 물은 며칠 전 썩은 웅덩이에서 길어 올린 것이 마지막이었다. 운현의 속은 쓰렸고, 기혈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소녀의 굶주린 눈을 보면 약한 소리 한 번 낼 수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죠?” 소연이 잔뜩 움츠러든 어깨를 흔들었다.

운현은 아득한 수평선을 응시했다. 잿빛 하늘과 잿빛 대지가 만나는 곳, 그곳에 희미한 산봉우리가 보였다. 그 산은 강호의 마지막 보루라 불리던, 하지만 이제는 지도에도 없는 ‘천묵산(天默山)’이었다. 전해 내려오는 말로는 그곳에 몇몇 생존자들이 모여 작은 촌락을 이루고 산다고 했다. 희미한 소문이었지만, 그들에겐 한 가닥의 희망이었다.

“천묵산으로 간다. 며칠 밤낮을 걸어야 할지 모르지만, 다른 길은 없다.”

소연은 말이 없었다. 그저 작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소녀의 손은 운현의 도포 자락을 조심스레 잡았다. 그 작은 온기가 운현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녹였다. 이 아이를 지켜야 한다. 그 생각만이 운현을 지탱하는 유일한 힘이었다.

그들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찢어진 도포, 해진 신발, 메마른 입술. 지친 몸은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비명을 질렀지만,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소녀의 발걸음이 느려질 때마다 운현은 그녀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잿빛 세상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기괴하게 솟아오른 바위들은 마치 피를 토하는 괴수의 형상처럼 보였다. 그들은 간신히 절벽 아래 움푹 패인 동굴 하나를 찾아냈다. 작고 허름한 동굴이었지만, 바람을 피하고 밤의 짐승들을 잠시나마 막아줄 수 있을 터였다.

운현은 동굴 입구를 돌무더기로 대충 막은 뒤, 안으로 들어섰다. 소연은 이미 벽에 기대어 지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운현은 품에서 마른 육포 조각 하나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그것은 지난주 어렵게 잡은 들쥐 한 마리를 말린 것이었다.

“소연아, 이걸 먹어라.”

소녀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 “사부님은요?”

“나는 괜찮다. 넌 아직 어리니 더 먹어야 해.”

운현은 애써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기는커녕, 속은 찢어질 듯 아팠다. 육포는 운현의 몫으로 남겨둔 마지막 조각이었다. 소녀는 말없이 육포를 받아들었지만, 쉽사리 입에 대지 못했다. 그 작은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어서 먹어. 기운 차려야 내일 또 걸을 수 있지.”

그제야 소연은 조심스럽게 육포를 베어 물었다. 한 조각을 삼키는 데 한참이나 걸리는 듯했다. 소녀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그 모습에 운현의 가슴은 미어졌다.

그날 밤, 동굴 안은 칠흑 같았다. 바깥에서는 매서운 바람 소리와 함께 짐승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운현은 소녀를 품에 안고 밤을 지새웠다. 소녀의 작은 심장이 그의 가슴에 닿아 두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새벽녘, 동굴 밖에 희미한 빛이 스며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운현은 잠결에 뭔가를 느꼈다. 이상한 냄새. 피 냄새였다. 그리고 쿵, 쿵, 쿵. 심장이 울리는 듯한 둔탁한 진동.

운현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잠든 소연을 품에서 떼어놓고, 막아놓았던 돌무더기를 살짝 치웠다. 틈새로 비친 바깥 풍경은 충격적이었다.

동굴 입구에서 불과 수십 장 떨어진 곳. 잿빛 대지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맹수였다. 털은 듬성듬성 빠져 있었고, 온몸은 기괴한 혹과 흉터로 뒤덮여 있었다. 눈은 핏발이 서 있었고, 날카로운 발톱은 바위를 찢을 듯이 번득였다. 가장 끔찍한 것은, 그 맹수의 주둥이가 피로 흥건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발밑에는…

사람의 시체였다. 무참히 찢겨나간 시체. 이틀 전 그들이 스쳐 지나갔던 다른 생존자들의 시체였다.

운현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변종수(變種獸)’. 대파멸 이후 나타난, 끔찍하게 변이된 짐승들. 평범한 맹수와는 차원이 다른 힘과 흉포함을 가진 존재였다. 강호의 고수들이라도 함부로 덤비지 못하는 공포의 대상.

맹수는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이 동굴을 노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운현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이곳에서 싸운다면 승산은 거의 없었다. 아니, 살아남을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하지만 도망칠 수도 없었다. 맹수는 이미 동굴 입구와 그들이 지나온 길목을 막고 있었다.

그때, 소연이 몸을 뒤척이며 작은 신음을 냈다. 맹수의 거대한 귀가 움찔거렸다.

“젠장…!”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선택지는 단 하나였다. 조용히, 맹수가 눈치채지 못하게 다른 출구를 찾는 것. 하지만 이 동굴은 막다른 곳이었다.

운현의 눈은 동굴 깊숙한 곳, 희미한 어둠 속에 묻힌 벽면을 향했다. 혹시나 하는 희망. 부서진 바위틈이 보였다. 사람이 겨우 기어갈 만한 작은 틈새.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절벽 낭떠러지일 수도, 맹수의 또 다른 굴일 수도 있었다.

소연이 눈을 떴다. 피곤에 절었던 눈은 맹수를 발견하고는 공포에 질려 크게 뜨였다. 소연은 비명 대신 운현의 도포 자락을 움켜쥐었다. 작은 몸은 잔뜩 경직되어 떨리고 있었다.

운현은 소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소연아, 내 말 잘 들어. 저 틈새로 기어 들어가야 한다. 절대로 소리 내지 마. 알겠느냐?”

소연은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운현은 품에서 녹슨 단검을 꺼내 들었다. 한 손으로는 소녀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단검을 꽉 쥐었다. 이 작은 단검 하나가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운현은 맹수의 움직임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돌무더기를 더 밀어냈다. 동굴 안은 맹수의 쉰내와 피비린내로 가득 찼다. 맹수가 고개를 돌려 동굴을 향해 코를 킁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운현의 심장이 발버둥 쳤다.

“지금이다.”

운현은 소연을 먼저 틈새로 밀어 넣었다. 소녀의 작은 몸이 흐느끼듯 틈새 속으로 사라졌다. 운현은 이어서 자신의 몸을 구겨 넣었다. 바위는 날카로웠고, 살이 찢어지는 고통이 밀려왔다.

맹수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 맹수가 동굴 쪽으로 한 발짝 다가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운현은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살이 찢기고 피가 흘러도 상관없었다. 오직 저 끔찍한 짐승에게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틈새는 생각보다 깊었다. 어둠 속에서 축축한 흙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습기가 느껴졌다.

뒤에서 맹수의 날카로운 발톱이 돌무더기를 긁는 소리가 들렸다. 동굴 입구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였다.

“젠장…!”

운현은 마지막 힘을 다해 몸을 비틀었다. 마침내 좁은 틈새를 빠져나와 굴러떨어졌다. 차가운 흙바닥에 몸이 닿았다. 주위는 완전한 암흑이었다. 소연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부님… 사부님…”

운현은 맹렬히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주위를 더듬었다. 이곳은 또 다른 동굴이었다. 깊고 어두운, 그리고 알 수 없는 냄새가 맴도는 곳.

“괜찮다, 소연아. 괜찮아…”

운현은 소연을 끌어안았다.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또 다른 막막함이 밀려왔다. 과연 이곳은 어디로 이어지는 길일까. 어둠 속에서, 운현은 단검을 꽉 쥐었다. 그들의 생존은 이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굴 안에서 섬뜩한 울림이 다시 한번 메아리쳤다. 그것은 맹수의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