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 온 초대
어둠이 뼈에 스며드는 폐허. 축축한 흙바닥 위, 핏빛으로 그려진 낡은 문양이 희미하게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강진우는 텅 빈 눈으로 그 문양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의 등 뒤로, 몇 년 전 자신이 묻었던 약속과 배신이 핏물처럼 울컥 솟아났다.
“민준아…”
갈라진 목소리가 찢어지는 듯 공간을 갈랐다. 그의 손톱은 이미 검게 변해 있었고, 살점은 마치 오랜 시간 물에 불린 듯 흐느적거렸다.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인간의 온기가 없었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증오로, 죽지 못하고 버티는 시체에 가까웠다.
그는 오래전부터 죽은 자였다.
아니, 죽기조차 허락되지 않은 채, 끔찍한 형벌 속에서 겨우 숨통만 붙어 있던 존재였다.
모든 것은 그날 밤 시작되었다. 친구라는 가면 아래 숨겨진 최민준의 잔인한 미소와 함께, 그의 삶은 산산조각 났다. 그는 가장 믿었던 자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심연 속으로 던져졌다.
절규와 고통만이 가득한 시간 속에서, 그는 희미하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었다. 생명을 담보로 한 거래, 영혼을 지불해야 하는 유혹. 처음엔 미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살아있는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진짜 지옥의 손을 잡는 수밖에 없었다.
핏빛 문양을 감싸고 있던 검은 기운이 진우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휩쓸었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미 겪을 수 있는 모든 고통은 겪어본 자였다. 이제 남은 것은… 되갚아주는 것뿐.
* * *
최민준은 전혀 다른 밤을 보내고 있었다.
초고층 오피스텔의 펜트하우스. 통유리창 밖으로는 서울의 화려한 야경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샹들리에의 불빛이 그가 흔드는 와인잔 속 붉은 액체를 보석처럼 반짝이게 했다. 그는 느긋하게 이탈리아제 소파에 기대어 태블릿을 넘겼다. 그의 이름으로 된 기사에는 연신 ‘최연소’, ‘혁신가’, ‘성공신화’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성공은 달콤했다. 과거를 잊게 할 만큼.
비릿한 미소가 그의 입술에 걸렸다. 강진우? 그깟 놈 하나쯤 밟고 올라서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그는 너무 순진했고, 너무나도 무능했다. 그 재능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이었을 뿐. 이제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되었다.
“하아…”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는 순간, 쨍그랑!
손에 들고 있던 와인잔이 갑자기 깨져버렸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민준은 어리둥절했다. 깨진 파편 위로 붉은 와인이 쏟아졌다.
“…뭐야.”
단순한 사고일 거라고 생각했다. 고급 와인잔은 본래 약하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바닥의 와인 얼룩이 마치 피처럼 보였다. 뭉개지고 일그러진 사람의 형체처럼. 섬뜩한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피곤해서 그런가.
그때였다. 펜트하우스의 모든 전등이 미친 듯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마치 고장 난 심장처럼, 희미한 불빛과 암흑이 반복되었다. 쉬이이익, 쉬이이익. 어디선가 찬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분명 모든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따뜻했던 실내 온도가 순식간에 뚝 떨어졌다.
“젠장, 이게 무슨…”
민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엿보고 있는 듯한 소름 끼치는 시선. 분명 혼자였다. 아무도 없어야 했다.
그런데…
귀에 속삭이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약… 속…”
너무나 희미해서 환청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었다. 아니, 분명 환청일 것이다. 민준은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울렸다. 이 목소리… 이 기분 나쁜 한기… 어디선가 느껴본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아주 끔찍한 순간에.
그 순간, 거실 한쪽에 놓인 가족사진 액자가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강화유리가 산산조각 났다. 민준은 놀라서 액자로 다가갔다. 깨진 유리 조각 위로, 맑고 밝게 웃던 자신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었다.
사진 속의 자신만이 일그러진 것이 아니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부모님의 얼굴이 마치 먹물이 번진 듯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마치 그림자 속으로 서서히 잠식당하는 것처럼.
“이게… 무슨…”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액자를 주우려 하자, 깨진 유리 파편 사이로 검은 액체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끈적하고 역겨운, 기분 나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민준은 역겨움에 순간 몸을 움츠렸다. 그의 등 뒤에서, 벽난로 위에 걸려 있던 커다란 유화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기울어졌다. 그가 애써 외면했던, 기억 속에서 지우려 했던 낡은 풍경화였다.
그림 속의 숲은 밤의 장막 아래 잠겨 있었고, 멀리 보이는 저택은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런데 그림 속 숲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나무들이 흐느적거리고, 짙은 어둠 속에서 수없이 많은 눈동자들이 자신을 노려보는 듯했다.
환영이었다. 분명 환영일 것이다.
민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오히려 그의 눈앞에, 그림 속 숲의 일부였던 어둠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민준의 펜트하우스를 향해 촉수를 뻗었다.
그것은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었다.
짙은 어둠이 점차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마치 사람의 손가락처럼 얇고 길게 늘어진 그림자의 촉수가 벽을 타고 기어왔다. 그의 심장은 발작하듯 미친 듯이 뛰어댔다.
그 순간, 그의 고급 오피스텔 벽면에 붉은 글씨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피가 배어 나온 듯한.
**‘배신자.’**
붉은 글씨가 벽면 가득 채워지는 순간, 주변의 모든 그림자가 진우의 집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암흑 속에서 끔찍한 울림이 민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마치 수많은 유령이 함께 속삭이는 듯한.
“오랜만이야, 민준아.”
그 목소리는 뼈 속까지 스며드는 한기만큼이나 섬뜩했고, 너무나도 익숙했다. 민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그림자처럼 일그러진 형태의 남자와 마주했다. 남자의 눈은 핏빛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 얼굴에 깊이 새겨진 끔찍한 증오는, 분명 오래전 자신이 버린 그 얼굴이었다.
그 순간, 민준은 직감했다.
지옥이, 그를 찾아왔다는 것을. 그리고 그 지옥이, 다름 아닌 자신의 오랜 친구 강진우라는 것을.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밤의 서막이 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