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밤은 언제나 그랬듯 차갑고 무심했다. 한강 다리 위에서 내려다본 도시는 거대한 그림자 속에서 홀로 빛나는 유리 조각 같았다. 이서진은 난간에 기댄 채 멍하니 흘러가는 강물을 응시했다. 그의 손에 들린 낡은 스마트폰 액정에는 한때 세상의 모든 것을 함께 꿈꾸었던 친구, 강태훈의 얼굴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화면 속 태훈은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서진의 심장을 칼날처럼 후벼 팠다.
“강태훈… 네가 내 전부를 빼앗아 갔어.”
서진의 목소리는 부서진 조약돌처럼 거칠었다. 3년 전, 그는 강태훈과 함께 밤낮없이 매달려 혁신적인 인공지능 솔루션을 개발했다. 세상이 뒤집힐 만한 기술이었다. 하지만 그 성공 직전에, 태훈은 서진의 모든 자료를 빼돌리고 그를 마치 먹튀라도 한 것처럼 언론에 제보했다. 하루아침에 서진은 나락으로 떨어졌고, 태훈은 그의 기술을 가로채 ‘인사이트 테크’라는 회사를 설립, 지금은 전 세계를 무대로 승승장구하는 IT 거물이 되어 있었다.
서진은 폐인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사기꾼이라 손가락질했고, 투자자들은 등을 돌렸다. 그에게 남은 것은 배신감과 지독한 가난, 그리고 태훈에 대한 불타는 증오뿐이었다. 이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바스러진 순간이었다.
차가운 강바람이 뺨을 스쳤다. 서진은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 어둠 속으로 몸을 던지려던 찰나, 강렬한 빛이 그의 시야를 잠식했다. 이명처럼 귓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그의 몸이 붕 뜨는 듯한 기이한 감각. 정신을 차렸을 땐, 다리 위가 아니었다. 익숙한 천장, 낡은 자취방의 퀴퀴한 냄새.
“여기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서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낡은 책상 위에는 빛바랜 노트북이 놓여 있었고, 꽂혀 있는 책들 사이에는 ‘AI 기반 스마트 홈 시스템’이라는 글자가 선명한 공학 서적이 보였다. 3년 전, 그와 태훈이 함께 연구하던 주제였다.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 뜬 날짜는 ‘20XX년 9월 12일’. 3년 전의 오늘이었다. 태훈이 서진의 기술을 빼돌리기 불과 두 달 전의 시간. 서진은 얼어붙은 듯 굳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꿈인가? 환각인가?
아니, 달랐다. 손안의 스마트폰은 3년 전 자신의 것이 맞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3년 후의 지옥 같은 현실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배신의 순간, 태훈의 차가운 미소, 몰락의 과정, 그리고 그의 절망. 모든 것이 생생했다.
서진은 느릿하게 침대에서 내려와 책상에 앉았다. 떨리는 손으로 노트북을 열었다. 바탕화면에는 그와 태훈이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 환하게 웃는 두 남자. 그때는 진심으로 태훈을 친구라고 믿었다.
“이게 기회인가…?”
서진의 눈동자에 차가운 불꽃이 일렁였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이번에는 지옥이 아니었다. 이건… 복수를 위한 기회였다.
그는 즉시 머릿속에 과거의 사건들을 재조합하기 시작했다. 태훈의 배신 계획, 그의 약점, 서진이 놓쳤던 기회들.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순간, 서진의 입가에 섬뜩하리만큼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강태훈. 이번엔 네가 내 바닥을 기게 될 거야. 내가 겪은 고통의 열 배, 백 배를 돌려줄 테니.”
그날부터 서진의 삶은 완벽하게 달라졌다. 과거의 순진했던 그는 사라지고, 미래를 꿰뚫어 보는 냉철한 복수자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태훈에게 티끌만큼의 의심도 사지 않기 위해 평소처럼 행동했다. 여전히 함께 밤샘 연구를 하고, 술잔을 기울였다.
“야, 서진아! 요즘 네 아이디어 진짜 미쳤다니까? 이대로 가면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어!”
태훈은 여전히 서진의 옆에서 흥분하며 떠들어댔다. 그 말을 들으며 서진은 속으로 비웃었다. ‘세상을 바꿀 기회는 너에게 없을 거야, 태훈아.’
서진은 태훈이 빼돌릴 예정이었던 핵심 알고리즘을 조금씩 변형하고 암호화했다. 외부 접근을 막는 보안망도 철저하게 구축했다. 동시에, 태훈이 몰랐던 새로운 특허를 몰래 출원했다. 태훈의 ‘인사이트 테크’가 대박을 터뜨렸던 서비스와 유사하지만, 훨씬 더 진보하고 완벽한 형태였다.
그리고 태훈이 자신의 기술을 훔치려 시도할 때마다, 서진은 미리 심어둔 함정으로 그의 움직임을 역이용했다.
“서진아, 이 부분 말이야… 내가 좀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은 것 같아서. 네 코드에 내 아이디어를 좀 추가하면 어떨까?” 태훈이 슬쩍 서진의 코드를 열어 보며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욕심이 가득했다.
서진은 태훈의 의도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 태훈아, 네 아이디어도 좋지. 그런데 내가 최근에 더 나은 보안 모듈을 개발했거든. 네가 건드릴 필요도 없어. 혹시라도 데이터가 손상될까 봐.”
서진은 싱긋 웃으며 태훈의 접근을 차단했다. 태훈은 살짝 당황하는 기색이었지만, 이내 서진의 ‘뛰어난 실력’ 때문이라며 애써 태연한 척했다. 서진은 그 순간 태훈의 속셈을 꿰뚫어 보았다. 여전히 변하지 않은 탐욕스러운 본성.
두 달이 흘렀다. 태훈이 서진의 기술을 빼돌려 ‘인사이트 테크’를 설립하려던 그 시기가 다가왔다. 서진은 미리 준비한 복수의 칼날을 갈고 닦았다.
태훈은 서진에게 비밀스럽게 접근했다. “서진아, 좋은 소식이 있어. 우리 기술에 투자하겠다는 기업을 찾았어. 조건이 아주 좋아! 우리가 지분을 반씩 나누고, 나는 경영을 맡고 너는 개발에 집중하면 돼.”
그것은 3년 전, 태훈이 서진을 속여 기술을 빼돌리기 위해 꾸민 완벽한 함정이었다. 서진은 이미 그 함정의 깊이를 알고 있었다.
“아, 그래? 축하한다, 태훈아. 하지만 난 이제 너랑 함께할 생각이 없어.”
서진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평온했지만, 그 안에는 뼈아픈 조롱이 담겨 있었다.
태훈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 서진아, 무슨 소리야?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고생? 그래, 내가 ‘고생’은 많이 했지.” 서진은 비릿하게 웃었다. “네가 내 기술을 훔쳐서 튀려던 그날, 난 이미 알고 있었거든.”
태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무슨 소리야! 내가 뭘 훔쳐! 너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거야?”
“의심? 아니, 확신이지.” 서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미래에서 왔거든, 강태훈.”
태훈은 얼어붙었다. “미, 미래라니? 서진아, 너 제정신이 아니구나?”
“제정신이 아니었던 건 너였지. 내 기술을 훔쳐서 네 이름을 걸고 성공하려 했던 그 순간부터.” 서진은 미리 준비해둔 문서를 태훈 앞에 던졌다. 그것은 서진이 출원한 특허증과 태훈이 서진의 서버에 불법적으로 접근하려 했던 시도들이 기록된 보안 로그였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태훈이 서진의 기술을 빼돌려 투자자들에게 몰래 접촉했던 메일 기록들이었다. 서진은 미래 지식을 활용해 태훈의 모든 움직임을 추적하고 기록해 뒀던 것이다.
“네가 나한테 제안한 그 ‘투자’라는 것도 결국엔, 내가 개발한 모든 기술을 네 이름으로 만들기 위한 수작이었잖아? 3년 전처럼 말이야. 이번엔 달라, 태훈아.”
서진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태훈은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는 것을 느꼈다.
“이건, 이건 조작이야! 서진아, 너 대체 무슨 짓을…!” 태훈이 더듬거리며 외쳤다.
“조작? 아니, 이건 미래에서 온 경고야. 네가 나에게 했던 그대로 돌려주는 거지.” 서진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내가 겪었던 그 절망, 나락으로 떨어지는 그 기분을 너도 똑같이 느껴봐야지 않겠어?”
다음 날, IT 업계는 발칵 뒤집혔다. 강태훈이 사기 및 기술 절도 미수 혐의로 고발당한 것이다. 서진은 태훈의 모든 악행을 언론에 공개했다. 태훈이 서진의 핵심 기술을 훔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서진이 미리 심어둔 함정에 스스로 빠졌다는 모든 증거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제야 사람들은 3년 전 태훈이 ‘인사이트 테크’를 설립했을 때의 의혹들을 다시 떠올렸다. 서진은 그 의혹들을 태훈의 현재 행각과 연결시키며 완벽하게 재구성해 폭로했다.
태훈의 이미지는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가 애써 쌓아 올린 명성은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졌다. 투자자들은 등을 돌렸고, 협력사들은 계약을 파기했다. 태훈은 온갖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3년 전, 서진이 겪었던 그대로였다. 아니, 서진의 복수는 훨씬 더 철저하고 잔혹했다. 태훈은 기업인으로서의 생명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명예마저 잃었다.
서진은 텅 빈 사무실에 앉아 뉴스 속보를 지켜보았다. 강태훈의 몰락을 알리는 헤드라인이 거듭해서 뜨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희열도, 어떤 만족감도 없었다. 그저 공허함만이 가득했다. 복수는 달콤할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복수를 이루고 나니, 그의 마음속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창밖으로 잿빛 하늘이 보였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서진은 창가로 다가가 비 내리는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태훈아… 이게 네가 선택한 길의 끝이야.”
그의 목소리는 빗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이제 과거의 족쇄에서 벗어났다. 그의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는 백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 백지에 무엇을 채워 넣을지는 이제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내렸다. 마치 그의 마음속에 쌓여있던 앙금들을 씻어내려는 듯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