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잿빛 낙원
**첫 번째 챕터: 썩어가는 침묵 속, 하나의 균열**
어둠은 익숙한 감각이었다. 눈을 감거나 뜨거나, 세상은 늘 잿빛 장막에 가려져 있었다. 먼지와 썩어가는 악취, 그리고 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으르렁거리는 소리만이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지표였다. 햇수로 7년. 세상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지옥으로 변했고, 나는 그 지옥 속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은 개미 한 마리였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빈 배를 움켜쥐고 도시의 폐허 속을 헤매었다. 한때 화려했던 상가 건물들은 뼈대만 남은 채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유리창은 깨진 눈동자처럼 텅 비어 있었다. 손에 쥔 녹슨 철근을 꽉 쥐었다. 이건 내 유일한 친구이자 방패였다. 놈들을 상대하기엔 턱없이 부족했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놈들은 소리에 민감했다. 작은 자갈 하나 구르는 소리에도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었다. 숨소리마저 죽이고 건물 잔해 사이를 지났다. 한때 북적였을 거리가 이제는 썩어가는 침묵만을 머금고 있었다. 이 침묵이 곧 공포였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미지의 공포.
“젠장, 아무것도 없잖아.”
낮게 중얼거렸다. 폐허가 된 편의점 안은 이미 털리고 털려 먼지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텅 빈 선반, 바닥에 나뒹구는 쓰레기들. 예전에는 과자 한 봉지, 낡은 통조림 하나라도 발견하면 횡재한 기분이었지만, 이제는 그런 작은 희망마저 사치였다. 며칠째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다. 갈증도 심했다. 곧 비가 올 것 같았지만, 이 산성비는 마실 수도 없었다. 차라리 저 흙탕물을 끓여 마시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때였다. 멀리서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하나가 아니었다. 여럿이었다. 나는 재빨리 몸을 웅크리고 허물어진 벽 뒤에 숨었다. 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셋. 모두 남자들이었다. 아니, 한때 남자였던 것들.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피부는 썩어 문드러져 있었고, 이빨은 날카로운 짐승의 송곳니처럼 변해 있었다. 동공 없는 눈은 오직 먹이를 향한 광기로 가득했다.
놈들은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느릿함이 오히려 더 위협적이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철근을 쥔 손에 땀이 흥건했다. 이대로 발각되면 끝이었다. 달아날 곳도 없었다.
놈들이 내 은신처 앞을 지나쳤다. 썩은 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숨을 참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을 참았다. 제발, 제발 지나가. 몇 초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놈들의 발소리가 멀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마지막 한 마리가 고개를 획 돌렸다.
“크르르르…!”
젠장! 놈의 시선이 정확히 내가 숨어있는 곳을 향하고 있었다. 들켰다.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이 악물고 몸을 던졌다. 놈의 옆구리를 향해 철근을 휘둘렀다. 퍽! 썩은 고깃덩어리 같은 몸이 철근의 충격을 흡수하며 휘청였다. 하지만 놈은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흐읍!”
간신히 피했다. 놈의 썩은 손톱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대로 맞았다면 피부가 찢어지고 감염되었을 것이다. 나는 정신없이 도망쳤다. 폐허가 된 골목길을 이리저리 내달렸다. 뒤에서는 놈들의 끔찍한 울음소리가 쫓아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몸은 이미 한계였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안 돼. 여기서 멈출 순 없어. 놈들에게 잡히는 순간, 내 몸도 놈들처럼 변해버릴 터였다. 혹은 찢겨 먹히거나. 어느 쪽이든 끔찍한 결말이었다.
도망치던 중, 나는 우연히 낡은 도서관 건물 앞에 다다랐다. 정교하게 조각된 석상과 웅장했던 외벽은 이제 검게 그을리고 부서져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다른 건물들보다 덜 허물어진 듯했다. 그 안에 숨을 공간이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녹슨 철문을 밀고 들어갔다. 끼이익, 끔찍한 소리가 폐허에 울려 퍼졌다. 놈들이 더 빠르게 쫓아왔다.
“망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철문을 닫고 뒤에 있던 무거운 책장을 필사적으로 끌어당겨 문을 막았다. 쿵, 쿵! 문밖에서 놈들이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나마 안전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곳은 놈들에게도 잊혀진 곳일까. 거대한 도서관 내부는 먼지로 가득했지만, 그래도 비교적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때 수많은 지식과 이야기가 담겨 있었을 책장들은 텅 비어 있거나, 축축하게 젖어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조금만 쉬었다가 다시 움직여야 했다. 놈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건 시간문제일 터였다. 하지만 다리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대로 잠시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을 두드리던 소리는 멎었지만, 대신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희미한, 하지만 명확한 소리.
툭. 툭.
규칙적인 소리였다. 마치 누가 종이를 넘기는 소리 같기도, 뭔가를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놈들은 이런 소리를 내지 않는다. 놈들은 오직 으르렁거리고, 찢고, 씹을 뿐이다. 이상한 위화감이 온몸을 감쌌다.
나는 천천히 철근을 움켜쥐고 일어섰다. 조심스럽게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서관 깊숙한 곳, 낡은 책장들 사이로 난 복도를 따라갔다. 먼지 낀 공기 속을 헤치고 나아가자, 빛이 거의 들지 않는 한쪽 구석에 누군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놈이다. 하지만… 달랐다.
그는 낡은 목재 테이블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다른 놈들처럼 옷은 찢겨 있었지만, 피부는 놀랍도록 온전했다. 썩어 문드러지거나 살점이 떨어져 나간 흔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깨끗했다. 그의 얼굴은 먼지와 피로 얼룩져 있었지만, 윤곽은 또렷했다. 그리고… 그는 책을 보고 있었다.
손에 든 낡은 책의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툭. 툭. 그 소리였다.
나는 숨을 멈췄다. 이해할 수 없었다. 놈들은 책을 보지 않는다. 놈들은 글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놈들은 그저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껍데기일 뿐이다. 그런데 저것은… 책을 보고 있었다. 심지어 그 책은 빛바랜 그림책처럼 보였다.
그의 머리카락은 짙은 갈색이었고, 조금 길었다. 눈은…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다른 놈들의 탁한 눈과는 달랐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담고 있는 눈동자.
내가 너무 오랫동안 그를 응시했던 탓일까. 그는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본능적으로 철근을 휘둘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공격적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호기심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그리고 한순간, 나는 그의 눈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사람의 감정 같은 것을 본 것만 같았다. 슬픔? 아니면… 외로움?
그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공격적인 움직임은 없었다. 다만 그의 손에 들린 책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펼쳐진 페이지에는 빛바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작고 예쁜 꽃 한 송이.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움직임은 유려했고, 다른 놈들의 기괴한 움직임과는 확연히 달랐다. 여전히 한 마디 말도 없었다. 그저 나를 향해 몇 걸음 다가왔다.
나는 뒷걸음질 쳤다. 공포가 온몸을 조여왔지만, 동시에 낯선 감정이 스며들었다. 이 이상한 존재는 대체 무엇인가. 왜 다른 놈들과 다른가. 그리고 왜… 나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가.
그는 나에게 손을 뻗었다. 썩지 않은, 멀쩡한 손이었다.
“크르르르…?”
그때였다. 밖에서 멀어졌던 놈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놈들이 기어코 문을 부수고 들어오려 하는 모양이었다. 문을 막아둔 책장이 삐걱거렸다. 곧 깨질 것이다.
나는 놈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역시 밖의 소리를 들은 듯, 고개를 살짝 돌렸다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혼란스러운 빛이 스쳤다.
그리고 그는, 나를 향해 뻗었던 손을 거두는 대신, 내 손목을 낚아챘다. 차가운 체온이었다.
“무… 뭐야?!”
놈은 나를 끌고 도서관의 더 깊은 곳, 빛조차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이 괴물은, 날 해치려는 것이 아니었다.
놈들에게서, 나를 도피시키고 있었다.
이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나는 그저 그의 손에 이끌려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갈 뿐이었다. 저항할 수 없었다. 이성이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내 앞을 이끄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구원인가, 또 다른 종류의 지옥인가. 혼란스러운 심장박동만이 격렬하게 울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