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컬트 호러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몽혼(夢魂)의 서곡

낡은 작업실에는 묵직한 공기가 맴돌았다. 재현은 캔버스 앞에서 붓을 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창밖으로는 이미 오래전에 해가 지고 도시의 불빛들이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다. 재현이 사용하는 이 작업실은 한때는 번성했던 부잣집의 서재였으나, 지금은 허물어져 가는 저택의 한 귀퉁이에서 먼지만 쌓여가는 공간이었다. 삐걱거리는 마룻바닥과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겨울바람은 그 특유의 음산함을 더했다.

그는 요즘 들어 며칠 밤낮을 그림에 매달렸다. 정확히는 ‘그녀’를 그렸다. 처음 그녀를 만난 것은 꿈속에서였다. 짙은 안개 속에서 한 줄기 빛처럼 나타난 여인. 이름조차 알 수 없던 그녀는 시선과 몸짓만으로도 재현의 영혼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의 밤은 더 이상 단순한 휴식이 아니었다. 매일 밤 그녀를 만나는 밀회였다.

“후우…”

짧은 한숨과 함께 재현은 붓을 내려놓았다. 캔버스에는 아직 미완성인 여인의 옆모습이 담겨 있었다. 현실에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지만, 그의 손은 그녀의 윤곽선을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려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듯한 머리칼, 길고 우아한 목선, 그리고 어딘가 슬픔이 어린 듯한 눈매. 아무리 노력해도 눈동자만은 그릴 수 없었다. 마치 색을 입히는 순간, 그 신비로움이 깨져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며칠째 잠을 제대로 못 자서가 아니었다. 아니, 잠은 충분히 잤다. 오히려 너무 깊이 잠들었다. 문제는 그 잠에서 깨어나도 피로가 가시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마치 밤새도록 누군가에게 영혼의 진액이라도 빨린 듯한 공허함. 그러나 재현은 그 미지의 존재에게 기꺼이 자신을 내주었다. 그녀가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무언가가 그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는 작업실 한쪽 구석에 놓인 낡은 침대에 몸을 던졌다. 삐걱거리는 스프링 소리가 고요함을 깨뜨렸다. 어둠이 모든 것을 감쌌고, 재현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그녀를.

***

깊고 아득한 어둠 속에서, 부드러운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재현은 자신이 어딘가 몽롱한 공간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발아래에는 마치 새벽 안개처럼 부드러운 구름이 깔려 있고, 머리 위에는 별들이 쏟아질 듯 반짝였다. 그리고 그 빛의 한가운데, 그녀가 서 있었다.

“재현.”

나지막하고도 황홀한 목소리. 그의 이름을 부르는 단 한 마디가 온몸의 세포를 깨웠다.

그녀는 늘 그렇듯 흰색의 얇은 옷을 입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칼은 달빛을 머금은 듯 은은하게 빛났고, 그늘진 얼굴은 신비로움을 더했다. 그의 꿈속에서만 존재하는 그녀, 리엔.

“리엔…”

재현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꿈속에서 이뤄지는 대화는 늘 현실의 그것보다 훨씬 생생하고 깊었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리엔은 미소 짓고 있었지만, 그 미소에는 늘 미묘한 슬픔이 배어 있었다.

“오늘도 나를 그렸나요?” 그녀가 물었다.

“당연하죠. 당신을 그리지 않으면, 숨조차 쉴 수 없는 기분이니까요.”

재현의 고백에 리엔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그 눈동자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느꼈다. 갈망, 슬픔, 그리고… 두려움?

“당신은 참으로 순수한 영혼을 가졌군요.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 리엔은 중얼거렸다.

“무엇이든 감당할 수 있어요. 당신과 함께라면.” 재현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동시에 불꽃처럼 뜨거웠다. 모순된 감각에 그는 잠시 멍해졌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나요?” 리엔이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인간의 목소리에서도 들을 수 없는 기묘한 울림이 있었다. 마치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는 듯한.

“사랑해요. 당신이 누구든, 어디에서 왔든, 어떤 존재든.”

그의 말에 리엔은 재현의 품에 안겼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기는 재현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달콤하고 퇴폐적인 향. 마치 영혼을 녹여버릴 듯한 달콤함이었다.

“나는 당신의 꿈이고, 당신의 그림이며, 당신의 모든 감각을 지배할 존재예요.”

그녀의 속삭임은 마치 뱀의 유혹처럼 재현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는 그녀의 품에 안겨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 순간만큼은,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니라 영원한 현실이기를 바랐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리엔은 그의 품에서 살며시 벗어났다. 그녀의 눈빛은 한층 더 깊어진 듯했다.

“나의 소중한 재현. 당신의 영혼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요. 그 빛을 나는 언제까지고 품고 싶어요.”

그녀의 손이 재현의 뺨을 감쌌다. 그녀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온몸의 기력이 쭉 빨려 나가는 듯한 묘한 감각이 들었다. 아찔했지만, 동시에 쾌락에 가까운 희열이 뒤따랐다. 마치 맹독과도 같은 달콤함.

문득, 재현은 캔버스에 그리지 못했던 리엔의 눈동자를 보았다. 검고 깊은 심연. 그러나 그 심연 속에서 얼핏 비치는 것은 인간의 것이 아닌, 태고의 어둠과도 같은 광채였다. 그의 심장이 불안하게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 순간, 리엔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그녀의 손톱이 아주 미세하게 길어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이빨도, 뾰족하게 변하는 것 같았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 그녀의 형상이 아주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아름다웠던 얼굴에 기괴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숨을 들이켰다. 리엔은 재현의 공포를 눈치챈 듯, 그의 귓가에 다시 속삭였다.

“두려워 마세요, 나의 연인. 나는 당신의 전부를 원할 뿐.”

그 목소리는 더 이상 사랑하는 여인의 것이 아니었다. 깊은 동굴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낮은 음색의 소름 끼치는 울림이 그의 영혼을 갉아먹는 듯했다.

재현은 몸서리쳤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필사적으로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몸은 마치 족쇄라도 채워진 듯 움직이지 않았다.

리엔은 그의 공포를 즐기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제야, 재현은 깨달았다. 그녀의 눈동자 속 심연에서 반짝이던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영혼을 비추는 그림자였음을. 그의 생명력, 그의 예술혼, 그의 존재 자체가 그녀의 탐욕스러운 먹잇감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

“하아… 하아…”

재현은 격렬한 호흡과 함께 눈을 떴다. 눅진한 어둠 속, 그의 몸은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낡은 침대 시트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심장은 광란하듯 뛰어댔다.

꿈이었다. 악몽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뼛속까지 스며든 공포에도 불구하고, 그의 심장 한구석에는 여전히 리엔을 향한 갈망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차가운 손길, 달콤한 향기, 그리고 그 영혼을 녹일 듯한 목소리가 생생하게 귓가에 맴돌았다.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간 듯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그는 몸을 일으키려 애썼지만, 힘없이 다시 침대에 고꾸라졌다. 거울이라도 있다면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분명 어젯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져 있을 터였다. 그는 이미 며칠 전부터 피부는 창백해지고, 눈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도 손끝이 떨렸고, 집중력은 급격히 저하되었다.

‘몽마(夢魔)…’

오래전 고대 서적에서 읽었던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인간의 꿈속에 침투하여 영혼의 에너지를 취하는 존재. 그들의 아름다움에 홀린 인간은 서서히 생명력을 잃어가고, 결국에는 껍데기만 남게 된다는 끔찍한 이야기.

재현은 자신이 그 몽마의 먹잇감이 되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어쩌면 리엔은, 처음부터 그저 자신을 이용했을 뿐이었다. 그의 순수한 영혼과 예술적인 재능을 탐하여, 그것들을 양분 삼아 존재를 유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공포가 다시금 온몸을 덮쳐왔다. 그러나 그 공포의 밑바닥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미련, 그리고… 사랑. 그녀가 몽마라는 사실이 명확해진 순간에도, 재현은 그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대로 서서히 말라 죽어가야 하는가? 아니면 그녀에게서 도망쳐야 하는가? 하지만 도망칠 수 있을까? 이미 그녀는 그의 영혼 깊숙한 곳에 뿌리내렸다. 그의 꿈을 지배하고, 그의 현실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도, 미완성된 리엔의 옆모습은 여전히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손으로 직접 그린 그녀의 얼굴은, 이제는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 몽마의 형상으로 각인되었다.

재현은 떨리는 손으로 겨우 휴대폰을 찾아 들었다. 희미하게 빛나는 화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이미 반쯤 죽은 사람 같았다. 핏기 없는 얼굴, 움푹 들어간 눈.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캔버스 속의 리엔을 응시했다. 공포와 사랑. 이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이 그의 심장을 격렬하게 난도질했다.

“리엔…”

그의 입술에서 그녀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그 이름만으로도 온몸의 기력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영혼은 그녀를 갈구하고 있었다. 죽음과 맞바꾼 사랑. 종족을 뛰어넘은 금지된 갈망. 재현은 이 기묘한 사랑의 덫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캔버스 속 리엔의 눈동자가 잠시 빛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것은 시작이었다. 지독하고도 아름다운 저주의 서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