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심연의 메아리**
칼리스토의 붉은 흙먼지가 사이보그 의안을 탁하게 만들었다. 강준은 차가운 금속 벽에 기대어 거친 숨을 내쉬었다. 폐에는 먼지 대신 복수의 맹독이 차오르는 듯했다. 이곳, 코로니스 연구 기지. 한때 그의 삶이자 꿈이었던 곳은 이제 폐허가 된 미궁이었다. 5년 전, 한태성은 이곳에서 강준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그가 피와 땀으로 일궈낸 ‘공간 왜곡 엔진’의 핵심 알고리즘을 훔치고, 파멸적인 에너지 사고의 주범으로 그를 낙인찍어 우주 미아가 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강준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심연의 바닥에서 복수라는 이름의 새로운 심장을 이식받았다.
“경고. 시스템 과부하. 잔여 전력 12%.”
왼쪽 팔의 사이버네틱 건틀릿에 내장된 AI, ‘에이다’의 차분한 목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강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핵심 데이터 코어까지는 이제 3구역. 하지만 문제는 전력이 아니었다.
‘블랙 크로우.’
수십 년간 버려졌던 이 기지에, 태성의 사설 용병대가 강준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잔여 데이터 소거 및 시설 완전 봉쇄 임무를 띠고 온 것이 분명했다. 강준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완벽주의자인 태성은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 데 늘 집착했다. 강준은 그 완벽주의가 오히려 제 발목을 잡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곳에 남은 데이터, 그중에서도 **오리지널 코어 알고리즘**만이 강준의 무죄를 증명하고, 태성의 거대한 사기극을 만천하에 드러낼 열쇠였다.
강준은 녹슨 철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안쪽은 완전히 암흑이었다. 그의 의안에서 푸른 탐색광이 뻗어나가자, 거미줄처럼 뒤엉킨 전선들과 부식된 장비들이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끈적한 이끼와 정체 모를 곰팡이가 벽과 천장을 뒤덮고 있었다. 한때 최첨단 기술의 정수였던 이곳은 이제 죽어가는 행성의 장기처럼 부패해 있었다.
쿵! 쿵! 쿵!
묵직한 진동이 발밑에서부터 전해져왔다. 저 멀리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육중한 전투화의 마찰음. 블랙 크로우 병사들이었다. 강준은 재빨리 몸을 숨겼다. 파손된 서버 랙 뒤편, 희미한 빛마저 가려진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세 명이 다가왔다. 강화복의 스캐너가 빛을 번뜩였다.
“이 빌어먹을 곳에 뭐가 있다고 이렇게 사람을 불러 제껴. 지령은 잔여 데이터 완전 소거인데, 뭘 지우란 건지 모르겠다고.”
“닥쳐. ‘고대자’가 직접 명령한 사안이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스캔이나 계속해.”
“젠장, 전력도 불안정한데… 으아악!”
가장 앞서 걷던 병사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의 목에는 강준의 왼손 건틀릿에서 뿜어져 나온 ‘섬광 송곳’이 정확히 박혀 있었다. 짧은 단락과 함께 병사의 신경계가 마비된 것이다. 뒤따르던 두 명의 병사가 당황하며 무기를 들어 올렸다.
“젠장, 뭐야! 침입자!”
강준은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그는 파손된 환풍구를 통해 순식간에 이동했다. 복수심으로 단련된 그의 감각은 어둠 속에서도 완벽하게 기능했다. 건틀릿의 ‘전자기 펄스 캐논’이 다음 병사의 스캐너를 강타했다. 전자기 충격으로 시야가 마비된 병사는 허공에 대고 총을 난사했다. 그 사이, 강준은 그의 뒤로 접근해 목을 꺾었다. 마지막 한 명은 공포에 질려 도망치려 했지만, 강준은 그의 탈출을 허용하지 않았다.
“태성은 언제나 너희 같은 소모품들을 던져 넣었지. 하찮은 목숨들을.”
강준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병사는 겨우 뒤돌아 강준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사이보그 의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빛은 마치 지옥의 심연에서 솟아난 불꽃 같았다. 병사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3구역 클리어.” 에이다가 보고했다. “핵심 데이터 코어까지 250미터. 경계 레벨 상승.”
강준은 쓰러진 병사들의 강화복에서 무사한 전력팩을 뽑아냈다. 건틀릿에 연결하자, 에이다의 전력 부족 경고가 사라졌다. 이것으로 마지막 관문까지 도달할 수 있을 터였다. 그는 다시 움직였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었다. 그들이 개발했던 공간 왜곡 엔진의 시제품들이 잠들어 있는 곳. 그리고 태성이 감히 손댈 수 없는, 오직 강준만이 해제할 수 있는 최후의 방어벽이 있는 곳.
데이터 코어는 거대한 돔 형태의 공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중앙에는 거대한 원통형 서버 랙이 우뚝 솟아 있었고, 주변에는 낡은 터미널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돔의 천장에서는 불안정한 비상등이 깜빡였고, 공간 왜곡 엔진의 실패한 시제품들이 기괴한 모습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강준에게는 쓰라린 기억이었다.
“접근 허용. 생체 인증 시작.”
코어 입구의 인공지능이 강준의 목소리를 인식하자, 차가운 금속음이 울렸다. 하지만 이내 경고등이 번쩍였다.
“경고. 생체 정보 불일치. 보안 프로토콜 7 발동.”
강준은 예상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태성은 강준을 죽은 것으로 위장한 뒤, 그의 모든 생체 정보를 시스템에서 삭제했을 터였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예측했다. 이 보안 프로토콜 7은 강준이 태성에게 자신의 시스템을 설계하며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몰래 심어둔 백도어였다.
그는 건틀릿의 키패드를 눌러 복잡한 명령어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자판 위를 춤추듯 움직였다. 수십 년 전, 그와 태성이 술에 취해 농담 삼아 만든 암호들이었다. 그들의 젊고 순수했던 시절의 흔적이었다.
삑- 삑- 삐빅!
“인증 성공. 보안 프로토콜 7 비활성화. 최상위 관리자 권한 획득.”
육중한 데이터 코어의 문이 스르륵 열렸다. 내부에서 신선한 공기가 강준의 폐로 스며들었다. 마치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숨 쉬는 기분이었다. 코어의 중심에는 작은 단말기가 놓여 있었다. 그가 찾던 오리지널 코어 알고리즘 데이터가 보관된 곳이었다.
강준은 단말기에 건틀릿을 연결했다. 데이터 다운로드가 시작되었다. 수 년간의 연구, 수천 번의 실패, 그리고 수많은 희망이 담긴 정보가 그의 건틀릿으로 흘러들어왔다.
“다운로드 99%.” 에이다의 목소리에 희열이 담겼다. “완료.”
바로 그 순간, 코어 내부의 중앙 홀로그램 프로젝터가 작동했다. 거대한 푸른빛 기둥이 솟아오르더니, 그 안에서 한 남자의 모습이 형상화되었다.
한태성.
그는 여전히 그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홀로그램이지만, 그 눈빛은 강준의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
“놀랍군, 강준. 네가 아직 살아있을 줄이야. 아니, 정확히는 살아남아 여기까지 도달할 줄이야. 하긴, 네가 만든 시스템이니, 네가 뚫고 들어오는 것도 당연한 이치겠지.”
태성의 목소리가 돔 안에 울려 퍼졌다. 마치 과거의 유령이 현재를 조롱하는 듯했다.
“하지만 의미 없어. 네가 그 데이터를 손에 넣었든 말든.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손에 넣었다. 네가 사라진 후, 나는 네가 꿈꾸던 공간 왜곡 엔진을 완벽하게 완성했어. 그리고 그걸 이용해 새로운 시대를 열었지. 네가 그토록 외면했던, ‘힘’이 지배하는 시대를.”
강준은 주먹을 꽉 쥐었다. 혈관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모든 것을 안배했다는 얼굴인가, 태성? 그래서 내게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냐?”
태성은 고개를 저으며 조롱하듯 웃었다.
“아니, 강준. 난 그저 네게 작별 인사를 하러 온 거야. 네가 이 코로니스 연구 기지를 지옥으로 만들었듯이, 나도 네 마지막 안식처를 그렇게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돔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천장에서 붉은 경고등이 번쩍이며 ‘시설 파괴 시퀀스 가동’이라는 문구가 섬뜩하게 깜빡였다.
“젠장! 태성, 네가 기지를 자폭시키려 하는 거냐!” 강준은 격분했다.
“말했잖아, 강준. 의미 없다고. 네가 가진 그 데이터는, 이젠 아무것도 아냐. 너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질 뿐.”
홀로그램 속 태성의 미소가 점점 더 비열해졌다. 그 순간, 돔 입구에서 폭음이 터져 나오며 블랙 크로우 용병들이 쇄도해 들어왔다. 그들의 강화복에서 붉은 레이저가 강준을 향해 쏟아졌다.
강준은 데이터를 품에 안은 채 단말기를 부수고 몸을 날렸다. 돔의 구조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붕괴되기 시작했다. 먼지와 파편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탈출 경로 탐색!” 강준이 외쳤다.
“모든 경로 봉쇄! 대규모 폭파가 시작됐습니다!” 에이다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변했다.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와중에도 용병들은 강준을 향해 총탄을 퍼부었다. 강준은 몸을 굴려 거대한 서버 랙 뒤로 숨었다. 하지만 이곳마저 안전하지 않았다. 폭발음이 점점 더 커지고, 돔의 중앙 지지대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강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절망적인 현실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잊고 있던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이 돔의 바닥 깊은 곳에 숨겨진, 비상 탈출용 ‘공간 왜곡 포트’… 완벽하게 작동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미완성 기술.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에이다, 공간 왜곡 포트 작동 가능성 확인! 당장!”
그의 외침과 함께, 거대한 서버 랙이 마지막 버팀목을 잃고 강준을 향해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블랙 크로우 용병들이 총구를 겨누며 다가오는 가운데, 코로니스 연구 기지는 강준을 영원히 삼키려는 듯 최후의 포효를 내질렀다.
과연 강준은 이 지옥 같은 폐허에서, 태성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리고 그의 복수는, 이대로 심연 속에 갇히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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