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어스름이 걷히지 않은 비좁은 흙벽 오두막. 축축한 짚단 위로 덮인 낡은 천 조각은 온기를 주기엔 너무나 얇았다. 희미하게 코끝을 스치는 곰팡이와 흙냄새, 그리고 역한 땀 냄새가 섞인 공기 속에서 나는 눈을 떴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자, 갈라진 나무 기둥과 거미줄이 희뿌옇게 보였다. 이곳이 어디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헐렁한 삼베 옷을 입고 잠든 낯선 여인의 옆모습. 푹 꺼진 볼과 깊게 패인 주름이 고단한 삶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꿈인가?’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 나는 도심의 번잡한 출근길에서 이어폰을 꽂고 신문 기사를 읽고 있었다. 미세먼지 가득한 회색 하늘 아래,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바쁘게 움직였고, 나는 그 수많은 인파 중 하나였다. 그러다 갑자기… 엄청난 충격과 함께 모든 것이 암전되었다. 그 다음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내 손이었다. 투박하고 거칠었지만, 분명 내 손이었다. 그런데 어딘가… 어색했다. 뼈마디가 굵고 손톱 밑에는 거뭇한 흙때가 박혀 있었다. 나는 잠시 멍하니 내 손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전신을 휘감았다. 마치 며칠 밤낮을 굶고 힘든 육체노동을 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 순간, 옆에 잠들어 있던 여인이 뒤척이더니 눈을 떴다. 주름진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눈은 맑으면서도 어딘가 슬픔이 어린 빛을 띠고 있었다.
“어휴, 우리 지혁이 정신이 들었니? 몸은 좀 어때? 밤새 앓는 소리를 내더라마는.”
여인은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손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혁’이라고? 내 이름은 이지혁이 맞지만, 이 여인은 누구지? 그리고 왜 이런 낯선 곳에 내가 있는 거지?
“할머니….” 나는 나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아직 변성기가 채 끝나지 않은 듯 어딘가 어리게 들리는 그 목소리는 분명 내 것이 아니었다. 아니, 내 것이었지만 내가 알던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할머니는 내 말을 듣고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 할머니 왔다. 아이고, 이 녀석, 얼마나 앓았는지 모른다. 아파도 굶을 순 없으니, 죽이라도 좀 먹어라.”
할머니는 오두막 한쪽 구석에 놓인 낡은 나무 쟁반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릇을 가져왔다. 묽고 거친 잡곡 죽이었다. 식욕은 없었지만, 할머니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나는 숟가락을 받아들고 겨우 몇 술을 떴다. 흙맛이 나는 듯 거칠었지만, 따뜻한 온기가 몸속으로 퍼지자 욱신거리던 통증이 조금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죽을 먹는 동안, 할머니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며칠 전부터 열병을 앓았다는 이야기, 마을 사람들이 힘을 보태 약초를 구해 주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올해는 세금이 너무 가혹해서 마을 전체가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아르카디아 제국.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이 드넓은 대륙을 통치하는 제국이라 했다. 황제의 이름은 ‘카이저’. 할머니는 그 이름을 말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마치 불경한 말을 내뱉은 것처럼.
“아이고, 지혁아.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해마다 세금은 늘고, 병사들은 툭하면 마을에 와서 행패를 부리고…. 올해는 비까지 안 와서 농사도 망쳤는데, 또 세금을 걷으러 온다고 하더구나.”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깊은 절망감이 배어 있었다. 나는 죽 그릇을 내려놓고 침묵했다. 내가 이지혁이라는 낯선 소년의 몸에 빙의한 것인지, 아니면 전생이라는 걸 겪게 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알던 세계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곳은 철저하게 가혹하고,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밖에서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은 눈부셨지만, 그 햇살이 비추는 세상은 그리 밝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거렸지만, 짚단 위에서 하루 종일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지혁아, 아직 몸이 성치 않으니 누워 있거라.”
할머니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흙벽 오두막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진흙골 마을. 할머니의 말대로였다. 길은 온통 진흙투성이였고, 마른 풀과 낡은 나무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옷차림은 다들 비슷했다. 낡고 해진 삼베 옷.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 대신 피곤과 불안이 가득했다. 아이들마저도 눈빛에 일찍이 삶의 고단함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멍하니 마을을 둘러보았다. 한때 번영했던 문명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내가 알던 스마트폰, 인터넷, 전기, 수돗물… 그 모든 것들은 이곳에서 신화 속 이야기나 다름없을 터였다. 나는 왜 이런 곳에 떨어진 걸까? 이곳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때였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점차 가까워지는 그 소리에 마을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불안한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아이들은 엄마의 치마폭 뒤로 숨었고, 나이 든 남자들은 굳은 표정으로 어딘가를 노려보았다.
이윽고, 먼지를 일으키며 나타난 것은 제국 병사들이었다. 붉은 깃발이 휘날리고, 번쩍이는 철제 갑옷을 입은 병사들은 말 위에서 오만하게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의 허리춤에는 번뜩이는 검이 매달려 있었고, 얼굴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함이 서려 있었다.
“어이! 진흙골 마을 촌장 나오너라!”
선두에 선 병사가 매서운 눈빛으로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권위와 함께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늙고 허리 굽은 촌장이 주저하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저, 전하… 저희 마을은 올해 농사를 망쳐서… 겨우내 먹을 곡식도 변변치 못합니다. 제발, 부디….”
촌장이 무릎을 꿇고 애원했지만, 병사는 비웃음을 터뜨렸다.
“웃기지 마라! 황제 폐하께서 내려주신 칙령을 거스를 셈이냐? 아르카디아 제국의 법은 너희 같은 미천한 것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금은 세금대로 내고, 추가로 징수한 품목들을 내놓아라! 황실 제단에 바칠 제물이다!”
병사의 손짓에 다른 병사들이 마을 곳곳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오두막 문을 부수고 들어가거나, 마당에 쌓아둔 땔감, 심지어 몇 안 되는 가축들까지 끌어내기 시작했다. 닭들은 푸드덕거렸고, 새끼 돼지는 꿰뚫리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마을 사람들은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그들의 눈에는 분노와 함께 깊은 절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저항해 봤자 돌아오는 것은 채찍질과 죽음뿐이라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 감히 대들었던 몇몇 마을 사람들의 최후는 너무도 비참했다.
내 할머니도 눈물을 흘리며 오두막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병사 하나가 우리 오두막으로 다가오더니 발로 문을 걷어찼다.
“이 안에 숨겨둔 것이 있느냐? 어서 내놓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요.”
병사는 할머니를 비웃으며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할머니가 애지중지하던 낡은 항아리를 들고 나왔다. 할머니는 허둥지둥 항아리를 빼앗으려 했지만, 병사는 할머니를 거칠게 밀쳤다. 할머니는 그대로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할머니!” 나는 반사적으로 외치며 할머니에게 달려갔다. 할머니의 뺨에는 흙이 묻었고,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항아리는 병사의 손에서 힘없이 떨어져 깨졌다. 그 안에는 바짝 마른 약초 몇 뿌리와, 몇 년을 모은 듯한 동전 몇 닢이 굴러떨어졌다.
“흥, 고작 이런 것들이냐?” 병사는 콧방귀를 뀌며 동전들을 발로 짓밟았다. “이런 빈약한 것들에게서 세금을 걷느라 시간 낭비했다는 것이 분통 터지는군.”
그의 동료 병사들도 하나둘씩 전리품을 챙겨 모여들었다. 그들은 굶주린 마을 사람들의 고통을 보며 비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그들의 고통이 자신들에게는 최고의 오락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 안에 있던 낯선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살면서 이런 불합리하고 폭력적인 상황을 직접 겪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살던 세상은 비록 경쟁은 치열했지만, 적어도 이런 노골적인 폭력과 약탈은 없었다. 법과 질서가 존재했고, 최소한의 인간적인 존엄성은 지켜졌다.
하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이곳은 적자생존의 야만적인 세상이었다. 힘 있는 자가 모든 것을 빼앗고, 힘 없는 자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지옥 같은 곳. 그리고 나는 그 지옥 한가운데에 던져졌다.
병사들이 마지막으로 마을의 얼마 안 되는 가축들을 밧줄로 묶어 끌고 가자, 마을 사람들은 주저앉아 통곡했다. 겨울은 아직 멀었지만, 이미 이들에게는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이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몇몇 남자들은 주먹을 꽉 쥐었지만, 그들의 눈에는 이미 포기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나는 흙바닥에 쓰러진 할머니를 부축해 일으켰다.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내 심장을 칼날로 찌르는 듯 아프게 파고들었다.
‘이렇게… 이렇게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 건가?’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질문을 던졌다. 이대로 눈 감고 귀 닫고 살다, 이 소년의 몸처럼 시름시름 앓다 죽어야 하는 걸까? 내 전생의 지식, 내가 알던 현대의 상식들은 이곳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는 걸까? 아니. 쓸모가 없을 리 없다. 최소한, 이런 불합리한 상황을 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병사들의 말발굽 소리가 점차 멀어져 갔다. 진흙골 마을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하지만 그 침묵은 평화로운 것이 아니라, 절망과 체념이 뒤섞인 무거운 침묵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지만, 내 눈에는 이 세상의 모든 부조리가 거대한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보였다.
‘아르카디아 제국… 황제 카이저….’
내 입술 사이로 낮게 읊조린 그 이름은 더 이상 불경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가운 결의로 가득 찬 주문과도 같았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자들은, 가장 무서운 존재가 된다.
그리고 나는, 이제 이 모든 것을 빼앗긴 자들 중 하나였다.
새로운 삶의 시작은, 피와 흙먼지로 얼룩진 복수의 서곡이 될 것임을, 나는 어렴풋이 예감했다.
그것이 이 모든 부조리의 시작이라면, 내가 바로 그 끝을 맺으리라.
진흙골 마을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희미하지만 강렬한 불씨 하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