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는 늦은 밤, 불 꺼진 거실 한가운데 멍하니 서 있었다. 손에 든 스마트폰 화면의 푸른빛이 희미하게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도시의 밤은 언제나 그랬듯 고요했지만, 이따금 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나 옅은 엔진음은 오히려 아파트의 적막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 뿐이었다.
“젠장, 정말 피곤한가 보네.”
지우는 작게 중얼거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싱크대에 놓인 머그컵을 집어 들고 물을 채우려는데, 컵이 손 안에서 스르륵 미끄러졌다. 쨍그랑! 요란한 소리를 내며 컵은 바닥에 흩어져버렸다.
“어머나!”
지우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분명 제대로 잡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파편을 치우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들이 바닥에 흩뿌려져 마치 작은 별들 같았다.
그것은 시작이었다.
다음 날 아침, 지우는 갓 내린 커피를 마시려다 문득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 흙내음? 아니, 좀 더 음습하고 눅눅한, 어딘가 깊은 지하실에서 풍겨오는 듯한 냄새였다.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켰지만 냄새는 쉬이 가시지 않았다. 그날 밤에는 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잠들기 전 스탠드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는데, 거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우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피곤해서 헛것이 들리나.’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누웠는데, 이번에는 ‘투둑, 투둑’ 하는 소리가 벽 너머에서 들려왔다. 마치 작은 돌멩이가 벽을 긁는 것 같은 소리였다.
“누구세요?”
지우는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끼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숨을 죽이고 현관문으로 다가갔다. 도어락의 숫자가 켜져 있었다. 누군가 문을 만진 흔적이었다. 지우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주먹으로 문을 콩콩 두드렸다.
“밖에 누구 있어요?”
여전히 정적만이 흘렀다. 어둠 속에서 문이 서서히, 아주 천천히 열리는 것 같았다. 지우는 순간적인 착각일 거라고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도어락은 잠겨 있었다. 그녀는 스마트폰으로 경비실에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지우는 결국 잠 못 이루고 밤을 지새웠다.
며칠 뒤, 현상은 더욱 잦아들었다. 아파트 복도에서 지나가던 이웃이 “지우 씨, 요즘 집에서 자꾸 이상한 소리 나던데 괜찮아요?”라고 물어왔다. 지우는 얼버무렸다. 그녀는 불안감에 떨면서도 애써 평범한 일상에 매달렸다.
주방에서 요리를 하는데, 칼이 저절로 식탁 끝으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그릇장 문이 ‘덜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가 닫혔다. 샤워를 하던 중에는 수압이 갑자기 미친 듯이 높아지더니 뜨거운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지우는 비명을 지르며 샤워 부스 밖으로 뛰쳐나왔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창백했다.
그리고 그날 밤, 지우는 악몽을 꾸었다. 아니, 악몽이 아니었다.
잠결에 눈을 떴을 때, 천장이 보이지 않았다. 어둠이 너무 짙어 사물이 형태를 잃었다. 방 안의 가구들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 옆 협탁이 ‘끼익’ 소리를 내며 벽 쪽으로 밀려갔다. 옷장 문이 활짝 열리더니, 옷들이 쏟아져 내렸다.
“뭐, 뭐야…!”
지우는 몸을 일으켰지만,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공기 자체가 끈적하고 무거웠다. 그녀는 간신히 손을 뻗어 스탠드를 켰다. 불빛이 방 안을 비추자, 놀랍게도 가구들은 원래 자리에 있었다. 옷들도 옷장 안에 정돈되어 있었다.
‘내가 너무 예민한가… 스트레스 때문일 거야.’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젠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건 단순한 스트레스나 착각이 아니었다.
다음 날, 지우는 친구인 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수야, 나 아무래도 이상한 일에 휘말린 것 같아.”
“응? 무슨 일인데? 요즘 잠도 제대로 못 자는 것 같더니.”
“우리 집이… 우리 집이 자꾸 이상해. 물건들이 멋대로 움직이고, 막 소리가 나고… 어제는 가구들이 움직이는 소리까지 들렸다니까?”
현수는 잠시 침묵하더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우야, 너 요즘 회사 일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그런 거 아니야? 정신과 상담이라도 받아보는 게…”
“아니야! 나 진짜 제정신이야! 내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
지우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현수는 당황한 듯 말을 돌렸다.
“알았어, 알았어. 그럼 내가 한번 가볼까? 네가 그렇게 무섭다고 하니까 나라도 옆에 있어줄게.”
“아니, 괜찮아… 괜찮아…”
지우는 급히 말을 잘랐다. 현수를 이곳으로 데려올 수 없었다. 이곳은 안전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혼자였다.
그날 저녁, 지우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온몸의 근육이 경직된 채로. 주방에서 쟁반이 ‘덜그럭’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분명히 들었다. 지우는 공포에 질려 눈을 감았다. 그녀의 귀에 희미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그르르… 크툴루… 프타근…”
말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어떤 언어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긁어내는 듯한, 끈적하고 비틀린 소리였다. 그 소리가 머릿속을 파고들자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듯했다.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고, 손발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지우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침실 문을 열자마자 벽에 걸려 있던 액자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액자 속 사진은 그녀의 가족사진이었다. 유리 파편이 흩어지며 그녀의 발목을 스쳤지만,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그만해… 제발 그만해…!”
그녀는 절규했다. 하지만 속삭임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커지고, 더 선명해졌다. 이제는 사방에서 들려왔다. 벽에서, 천장에서, 바닥에서. 아파트의 모든 틈새에서 그 기괴한 소리들이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지우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눈앞의 벽지가 꿈틀거리는 듯했다. 벽지의 패턴이 마치 살아있는 무언가처럼 일그러지며 기괴한 얼굴 형상들을 만들어냈다. 무수히 많은 눈동자들이 그녀를 응시하는 것 같았다.
방의 형태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직각이었던 모서리들이 비정상적으로 구부러지고, 천장이 낮아졌다 높아졌다를 반복했다. 마치 공간 자체가 흐느적거리는 젤리처럼 변하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 보이던 도시의 불빛들도 이상하게 왜곡되어 보였다. 직선으로 뻗어 있어야 할 도로들이 울렁거리고, 빌딩들이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건 환상이야. 내가 미쳐가는 거야.’
하지만 현실은 더 가혹했다. 바닥에서 차가운 기운이 스며 올라왔다. 발가락부터 시작해 온몸을 감싸는 듯했다. 그것은 단순한 냉기가 아니었다. 심장을 옥죄는 듯한, 존재의 근원을 흔드는 듯한 차가움이었다.
공기 중에는 더 이상 음습한 흙냄새가 아니었다. 썩은 살점과 녹슨 금속, 그리고 알 수 없는 화학 물질이 뒤섞인 듯한 역겨운 악취가 진동했다. 지우는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지만,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으읍… 으읍…!”
갑자기 방 안의 모든 가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침대, 옷장, 책상, 의자… 모든 것이 중력을 거슬러 공중에서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보이지 않는 손이 그 모든 것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그리고 그 중심에 지우가 있었다.
속삭임은 이제 하나의 거대한 합창처럼 변했다. 수천, 수만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읊조리는 듯했다. 그 소리는 더 이상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비록 의미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소리들이 전하는 감정은 명확했다. 굶주림, 증오, 그리고 무한한 고독.
지우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속삭임의 합창에 완전히 파묻혔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일그러졌다. 눈동자는 검은 심연처럼 깊어졌고, 피부는 푸르죽죽하게 변색되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산발적으로 흩날리며 마치 보이지 않는 촉수에 붙잡힌 것처럼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문득, 그녀는 깨달았다.
이것은 폴터가이스트가 아니었다.
이것은 어떤 존재가 이 아파트를, 이 공간을, 그리고 그녀의 정신을 침범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물건을 움직이는 장난스러운 영혼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주 저편의, 인간의 인지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는, 너무나 거대하고 오래된 무언가였다.
그것의 존재 자체가 이 세상의 법칙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지우의 눈앞에 마지막 장면이 펼쳐졌다.
천장이 서서히 갈라지더니, 그 틈새로 무언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형태가 없는 암흑의 촉수였다. 셀 수 없이 많은 촉수들이 방을 가득 채우며 허공에서 꿈틀거렸다. 촉수들의 끝에는 각각 빛을 흡수하는 듯한 붉은 눈동자가 박혀 있었다.
“아… 아… 아아아아악!”
지우의 비명은 더 이상 인간의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광기와 공포,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의 침략에 대한 순수한 절규였다. 암흑의 촉수 하나가 그녀의 얼굴을 향해 뻗어왔다.
그리고, 모든 것이 멈췄다.
아니, 모든 것이 사라졌다.
지우의 아파트는 조용했다. 거실의 쟁반은 원래 자리에 놓여 있었고, 침실의 액자는 깨지지 않은 채 벽에 걸려 있었다.
단지, 그 아파트에 지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존재하긴 했을지도 모른다.
벽지 패턴의 일그러진 얼굴들 중 하나가, 지우의 눈을 닮은 듯한 검은 심연을 품고서, 아파트를 찾아올 다음 희생자를 말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뿐.
도시는 다시 고요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