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도시의 불빛이 창밖을 캔버스 삼아 무수한 점들로 박혀 있었다. 지후는 식탁에 앉아 식어가는 볶음밥을 무심하게 휘젓고 있었다. 낡은 원룸 오피스텔, ‘푸른 탑 주상복합’이라고 불리는 이 건물은 그 이름처럼 묘하게 비현실적인 푸른빛 외벽을 자랑했다. 선대의 건축 양식과 현대적인 미학이 묘하게 뒤섞인 외형은 멀리서 보면 제법 멋스러웠지만, 안으로 들어오면 그저 연식이 오래된 평범한 주거 공간일 뿐이었다. 특히 지후의 7층은 더했다.
“젠장, 또.”
천장에서 작게 ‘드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위층에서 가구를 끄는 소리겠거니, 지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 건물에 이사 온 지 벌써 반년. 이제 이런 사소한 소음들은 지후에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는 젓가락으로 볶음밥 속 계란 지단을 잘게 썰었다. 맛이 있지도 없지도 않은, 그냥 배를 채우기 위한 행위였다.
텔레비전에서는 한때 찬란했던 문명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화면 속의 옛 도시들은 지금의 이 거대한 철근 콘크리트 숲과 달리, 자연과 어우러진 정교한 석조 건축물들로 가득했다. 지후는 고개를 저었다. 뭐, 과거가 어떻든 지금 중요한 건 내일 아침까지 내야 할 과제와 눈앞의 이 식어빠진 밥뿐이다.
그때였다.
주방 쪽에서 ‘달그락’ 하는 소리가 났다. 설거지통에 넣어둔 숟가락이 스스로 굴러 떨어지기라도 한 걸까. 지후는 고개를 돌려 주방을 쳐다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떨어졌나?”
별 생각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싱크대 밑을 살펴봤지만, 숟가락은 제자리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못 들었나? 아님 너무 피곤해서 헛것이 들리는 건가? 지후는 피곤한 눈을 비볐다. 과제 때문에 요즘 통 잠을 제대로 못 자긴 했다.
다시 식탁으로 돌아와 볶음밥을 마저 먹었다. 텔레비전 속 다큐멘터리는 이제 사라진 고대 제국의 마지막 황제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었다. 고독한 그의 모습이 어딘가 지후의 현재와 겹쳐 보이는 듯했다.
‘끼이익…’
이번에는 훨씬 선명한 소리였다. 안방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지후는 순간 얼어붙었다. 자신의 방 문은 분명히 닫혀 있었다. 잠시 후 화장실을 갈 때 문이 열려 있으면 불편하니까, 식탁에 앉기 전 미리 확인하고 닫아두었었다.
“누구세요?”
무의식적으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동시에 등골을 타고 차가운 한기가 쭉 훑고 지나갔다.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텔레비전 속 황제의 비극적인 일생을 읊조리는 내레이터의 목소리만이 텅 빈 거실에 울려 퍼졌다.
지후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쿵. 쿵. 쿵.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안방 문 쪽으로 다가갔다.
문은 정말로 열려 있었다. 좁은 틈으로 안방의 어둠이 스며 나왔다.
“뭐야… 내가 안 닫았나?”
아무리 생각해도 분명히 닫았다. 닫는 소리까지 확실히 기억한다. 삐걱이는 경첩 소리가 유독 거슬려서, ‘이것도 고쳐야 하는데’라고 생각했던 것까지 생생했다.
지후는 떨리는 손으로 방문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웠다.
문 안쪽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스위치는 문 밖에 있었다. 손을 뻗어 스위치를 올렸다.
딸깍!
방 안은 이내 밝아졌다. 아무것도 없었다. 침대는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고, 책상 위에는 어지럽게 쌓인 전공 서적들이 그대로였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내가 너무 예민했나… 잠을 못 자서 그렇겠지.”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지후는 다시 문을 닫았다. ‘끼이익’ 하는 낡은 소리가 다시 한번 귓가를 맴돌았다.
그리고 다시 닫힌 문을 등진 채 거실로 돌아가려던 찰나였다.
‘탁!’
등 뒤에서 또렷하게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누군가 안에서 문을 잠근 듯한, 묵직하고 단호한 소리였다.
지후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안방에 있다.
지후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닫힌 안방 문. 그 문 너머에서, 아주 미세한, 그러나 분명한 속삭임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너무 작아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마치 오랜 시간 잊혔던 어떤 존재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듯한, 그런 소리였다.
지후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것은 환청이 아니었다.
이것은 꿈도 아니었다.
그의 오피스텔에, 지후 외에 다른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 순간, 주방 쪽에서 ‘쨍그랑!’ 하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그릇 깨지는 소리였다.
지후는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억지로 참아냈다.
그는 안방 문을 등진 채 주방 쪽을 돌아봤다.
싱크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컵들이 산산조각 나서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유리 조각들이 반짝이며 섬뜩한 빛을 뿜었다.
그리고 그 위로, 텅 빈 싱크대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수도꼭지를 끝까지 돌려놓은 것처럼, 폭포수처럼 물이 쏟아져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순식간에 주방 바닥은 흥건해졌고, 물은 거실로까지 침범하기 시작했다.
“안 돼…!”
지후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달려가 수도꼭지를 잠그려 했다. 그러나 수도꼭지에 손을 대기도 전에, 수도꼭지는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종당하는 것처럼, 제자리에서 ‘휘익’ 소리를 내며 완전히 잠겼다. 쏟아지던 물줄기가 거짓말처럼 뚝 멈췄다.
모든 것이 멈췄다.
흐르던 물도, 지후의 심장 소리도.
정적만이 남았다.
지후는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들, 젖은 바닥, 그리고 차갑게 식어버린 수도꼭지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거실 한가운데, 텔레비전이 놓인 장식장 위에 놓여 있던 오래된 유리 꽃병이 공중에 떠 있었다.
마치 실에 매달린 듯, 천천히, 아주 느리게 흔들리고 있었다.
꽃병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꽃병이 흔들릴 때마다, 그 안에서 차가운 바람이 새어 나오는 듯한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건… 대체…”
지후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그 순간, 공중에 떠 있던 꽃병이 ‘탕!’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산산조각 났다.
유리 파편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지후는 팔로 얼굴을 가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온몸의 감각이 마비되는 듯했다.
오랜 침묵 끝에,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유리 파편들은 이미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모든 것이 달랐다.
바닥에 떨어진 유리 파편들 사이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액체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바닥을 기어 다니는 검은 그림자.
그것은 마치 잉크 같기도, 혹은 핏물 같기도 한 불쾌한 색이었다.
그리고 그 검은 액체가 벽을 타고, 천장을 타고, 그리고 젖은 바닥을 타고, 마치 지후를 향해 기어오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검은 액체는 정말로 지후가 서 있는 곳으로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지후는 생전 처음 느끼는 극한의 공포에 사로잡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고, 온몸의 근육이 경직됐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지후는 뒷걸음질 쳤다.
그 순간, 집안의 모든 전등이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꺼졌다.
세상은 순식간에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다.
오직 창밖 도시의 불빛만이 희미하게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검은 액체가 바닥을 타고 스멀스멀 다가오는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차갑고 끈적한, 불쾌한 무언가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지후는 비명을 지르며 문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하지만 현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아니, 잠겨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아무리 손잡이를 잡아 돌려도, 발로 차봐도,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이 공간 자체가, 지후를 가두려는 거대한 감옥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지후의 귓가에 다시 한번 그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훨씬 더 또렷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고대의 언어 같은 소리였지만, 그 속에는 분명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도망칠 수 없어…’
‘이제 시작이야…’
지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눈앞에는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유리 파편들과, 스멀스멀 다가오는 검은 액체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것은 이 도시의 밤보다도 더 깊고, 더 차가운 어둠이었다.
지후는 자신이 이제 막, 이 도시의 오래된 비밀 중 하나와 마주쳤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비밀이, 그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