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갈라진 절벽 틈을 파고들어 기이한 휘파람 소리를 내는 곳, 그곳에 우리의 여정은 시작되었다. 깎아지른 듯한 암벽 아래, 수백 년간 아무도 발을 들이지 않았을 법한 음습한 기운이 맴도는 동굴 입구. 거대한 넝쿨과 이끼가 뒤덮은 바위를 헤치며, 우리는 마침내 그곳에 당도했다.
“여기가 맞아. 고문서에 묘사된 ‘망각의 아귀’와 정확히 일치해.”
엘라라가 낡은 양피지 지도를 펼쳐 들고는 흥분으로 반짝이는 눈으로 동굴 입구를 응시했다. 붉은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피로 대신 오직 탐험가의 열정으로 가득했다.
“아귀라니, 이름부터 불길하군.”
카엘이 육중한 양손 도끼를 쥔 채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갑옷은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지만, 굳건한 자세에서는 흔들림 없는 전사의 기개가 느껴졌다. 그는 언제나 냉철하고 현실적이었다.
“불길하다기보다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경외를 담은 표현이죠, 카엘. 이곳은 한때 거대한 제국을 이루었던, 이샤르 문명의 심장부였을 거예요. 세상의 모든 지식이 잠들어 있다는… 잃어버린 지하 도시 ‘제나레스’의 입구.”
라이라가 신비로운 보랏빛 눈동자를 빛내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늘 한 손에 낡은 마법 지팡이를 들고 있었고, 그 끝에는 푸른 수정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새하얀 머리카락과 달리, 그녀의 표정은 언제나 차분했다.
“지식도 좋지만, 보물도 많았으면 좋겠군. 지식만으로는 배가 채워지지 않으니까.”
카엘이 짧게 덧붙였다. 엘라라는 키득거렸고, 라이라는 옅게 미소 지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목적을 품고 있었지만, 이 거대한 미궁의 문을 열고자 하는 열망만큼은 같았다.
동굴 안은 예상보다 훨씬 깊고 어두웠다. 축축한 공기 속에서 흙냄새와 곰팡이 냄새, 그리고 무언가 알 수 없는 오래된 향기가 섞여 코끝을 자극했다. 엘라라가 마법으로 불을 밝힌 랜턴을 들어 올리자, 빛은 불안하게 흔들리며 동굴 벽의 기이한 형상들을 비췄다. 마치 거인의 입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비좁았던 통로는 점차 넓어지더니, 이윽고 거대한 석문 앞에 다다랐다. 높이만 해도 족히 십 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문은 정교한 문양과 알 수 없는 고대 문자로 뒤덮여 있었다. 문양은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는 뱀의 형상이었고, 그 틈새마다 희미한 마력의 잔향이 느껴졌다.
“이거… 보통 문이 아닌데.”
카엘이 도끼 손잡이를 꽉 쥐며 경계했다.
“고대의 봉인 마법이 걸려 있어요. 아주 강력해서, 함부로 건드리면 자칫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라이라가 조심스럽게 문에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문양 위를 스치자, 푸른빛의 정전기가 파직이며 작은 소리를 냈다.
“해독할 수 있겠어?” 엘라라가 숨을 죽이며 물었다. 그녀는 이 순간을 위해 수많은 밤을 고문서와 씨름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시도해볼게요.”
라이라가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고대어는 섬뜩하면서도 아름다운 선율을 지니고 있었다. 푸른 수정이 박힌 지팡이 끝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석문을 감쌌다. 문의 문양들이 서서히 빛나기 시작했고, 희미했던 마력의 잔향은 점차 강렬한 기세로 우리를 압박했다.
십여 분이 흘렀을까. 라이라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그녀의 호흡은 가빠졌다. 마침내 그녀의 주문이 절정에 달하자, 석문에서 엄청난 양의 마력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콰앙!
귀청을 찢는 굉음과 함께 석문이 천천히 안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수백 년간 닫혀 있던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틈새로 뿜어져 나오는 짙은 먼지와 함께, 이끼와 흙냄새를 넘어선 비릿한 금속과 광물의 향기가 밀려들었다.
문이 완전히 열리자, 우리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동굴과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지하 도시의 입구였다. 발아래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검은 대리석 계단이 아득한 심연으로 향하고 있었고, 머리 위로는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정체불명의 광물들이 박혀 있었다. 거대한 기둥들이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고, 그 기둥들에는 이미 잊혀진 문명 특유의 정교하고도 신비로운 조각들이 새겨져 있었다.
“세상에… 정말이었어…!”
엘라라가 감격에 겨워 나지막이 외쳤다. 그녀의 눈은 경이로움과 전율로 가득했다.
“이봐, 저것 좀 봐.”
카엘이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한때 화려했을 거대한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큼지막한 비석이 우뚝 서 있었는데, 그 표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촘촘히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비석 주변으로는 기이한 형상의 석상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었다.
“저 비석은… 역사를 기록한 것일까요?” 엘라라가 흥분하며 다가가려 했다.
“기다려, 엘라라. 뭔가 이상해.”
라이라가 그녀를 붙잡았다. 그녀의 푸른 수정이 빛나는 지팡이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력이… 느껴져요. 아주 오래되고, 짙은… 봉인된 마력이에요. 마치… 이 도시 전체가 거대한 봉인 속에 잠들어 있었던 것처럼.”
그녀의 말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단순히 잊혀진 도시가 아니라, 봉인된 도시라니.
우리가 비석에 더 가까이 다가가자, 카엘의 발밑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그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라 발을 떼었고,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검은 대리석 조각 하나가 움푹 파여 있었다.
“젠장, 함정인가?”
“아니요… 이건…!”
엘라라가 파인 조각 아래를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기이한 룬 문자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룬 문자가, 마치 혈액순환이라도 하는 것처럼 희미하게 붉은빛을 띠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바닥에 새겨진 모든 룬 문자들이 차례로 붉은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비석 주변의 석상들의 눈동자에서도 섬뜩한 붉은 광채가 터져 나왔다. 광장 전체를 휘감는 짙은 마력이 우리의 심장을 옥죄는 듯했다.
끼이이이잉-!
고막을 찢을 듯한 금속음과 함께, 광장 중심의 비석이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비석 아래 숨겨져 있던 공간이 드러나면서,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두운 기운이 우리를 집어삼킬 듯 밀려왔다.
“이건… 봉인이 깨지는 소리야.” 라이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도시를 잠재웠던 봉인이… 우리가 문을 열면서 깨어나고 있어!”
갑자기 대리석 바닥 전체가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천장에 박혀 있던 광물들은 일제히 강렬한 빛을 뿜어내며 우리를 비췄다. 마치 수백 년간 잠들어 있던 거인이 기지개를 켜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진동 속에서, 광장 중앙, 비석 아래에서 정체불명의 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눈동자, 검은 그림자 같은 형체, 그리고 그 형체 주위를 휘감는 강렬한 마력.
그것은… 잊혀진 도시 제나레스의 비밀을 지키는, 최초의 수호자였다.
우리는 숨을 멈췄다. 이곳은 단순한 폐허가 아니었다. 살아있는, 혹은 깨어난 어떤 존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젠장…!” 카엘이 도끼를 고쳐 쥐었다.
라이라의 푸른 수정은 미친 듯이 빛나며 경고하고 있었다.
엘라라는 두려움과 함께 새로운 지식에 대한 갈증으로 눈을 빛냈다.
우리는 이제 막 잊혀진 지하 도시의 심장부에 발을 들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심연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위험과 비밀을 품고 있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