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은 녹슨 칼날처럼 붉게 타올랐다. 한때 빼곡했을 건물들의 잔해는 그 칼날에 베인 듯 삐뚤빼뚤 서 있었고, 허물어진 고가도로의 철골 구조물은 거대한 괴물의 뼈대처럼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다. 먼지는 수백 년 묵은 서사시처럼 공중에 떠다녔고, 그 아래에서 유진은 낡은 방진 마스크를 고쳐 썼다.
그녀의 거처는 고가도로 밑에 버려진 낡은 컨테이너였다. 한때는 물건들을 실어 날랐을 이 강철 상자는 이제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녹슨 문을 열고 나오자, 바싹 마른 공기가 폐 깊숙이 파고들었다. 마스크가 없었다면 기침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오늘도… 살아남아야지.”
작게 중얼거렸다. 입 밖으로 내뱉어진 말은 흐릿한 먼지 속에 금세 삼켜졌다. 몇 년이 흘렀는지, 세상이 왜 이렇게 변했는지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저 어느 날, 하늘이 찢어지고 땅이 갈라지면서, 그림자 같은 존재들이 나타나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했을 뿐. 사람들은 그것들을 ‘침식자’라고 불렀다. 살아있는 모든 것의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존재들.
유진은 낡은 배낭을 메고 손때 묻은 칼을 허리춤에 찼다. 오늘 그녀의 목표는 폐허가 된 도시 외곽에 위치한 오래된 도서관이었다. 운이 좋으면 먹을 만한 통조림이나, 최소한 사용할 만한 천 조각이라도 찾을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어쩌면, 희망이라 불릴 만한 작은 조각이라도.
사방은 고요했다. 바람 소리마저 삼켜버린 듯한 정적. 가끔 삐걱이는 금속 소리나, 멀리서 무너지는 건물 파편 소리만이 이 세계가 완전히 죽지는 않았음을 알렸다. 유진은 발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바닥에 깔린 유리 조각들이 햇빛을 받아 섬뜩하게 반짝였다.
도서관은 멀지 않았다. 하지만 이 황폐한 세계에서 ‘멀지 않다’는 것은 곧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의미와 같았다. 그녀의 심장이 불안하게 쿵, 쿵 울렸다. 낡은 은색 브로치를 만졌다. 다섯 장의 꽃잎 모양이 새겨진 그 브로치는 어머니가 남긴 유일한 유품이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가락에 닿자, 왠지 모를 안도감이 밀려왔다.
도서관 건물은 외벽의 절반이 무너져 내린 채 위태롭게 서 있었다. 입구는 거대한 책장 파편들과 콘크리트 잔해로 막혀 있었다. 유진은 작은 틈새를 찾아 몸을 웅크린 채 비집고 들어갔다. 내부 역시 처참했다. 곰팡이 냄새와 눅눅한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찢어진 책들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고, 그 위에 침식자들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회색의 끈적한 흔적들이 얼룩져 있었다.
“빌어먹을….”
가장 먼저 들어간 1층 열람실은 이미 침식자들이 훑고 간 듯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유진은 2층으로 향하는 부서진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발소리가 삐걱이는 나무 바닥에 울렸다.
그때였다.
지끈거리는 두통과 함께, 그녀의 몸을 훑는 듯한 소름 끼치는 감각.
*침식자.*
유진은 재빨리 몸을 숨겼다. 손이 저절로 브로치에 닿았다.
“어딨지…?”
귀를 기울였다. 웅, 웅… 낮고 불쾌한 진동이 느껴졌다.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유진은 손에 든 칼을 꽉 쥐었다. 하지만 저 존재들에게 칼은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을 물리칠 수 있는 건 오직…
침식자는 모습을 드러냈다. 천천히 무너진 벽 사이로 스며들 듯 나타난 검은 형체. 그림자처럼 꿈틀거리는 여러 개의 촉수가 바닥을 긁으며 나아왔다. 눈도, 입도 없는 그 존재는 오직 ‘생명 에너지’에만 반응했다. 유진은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었다. 침식자가 그녀가 숨어 있는 책장 쪽으로 천천히 방향을 틀었다.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었다.
유진은 이를 악물었다. 어머니의 브로치를 움켜쥐고 주문처럼 속삭였다.
“광휘의 심장이여, 나의 의지를 들으라!”
**휘이이이잉-!**
은색 브로치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은 유진의 몸을 감싸 안았고, 낡은 옷 대신 하얀색과 푸른색이 어우러진 간결하면서도 견고한 전투복이 생겨났다. 허리에는 빛을 머금은 듯한 보라색 결정이 박힌 얇은 단검이 나타났다. 그녀의 눈동자는 금빛으로 반짝였다.
변신한 유진, 이 세계가 부여한 이름 없는 수호자였다.
몸에 넘치는 힘.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는 듯한 감각. 침식자가 내뿜는 불쾌한 에너지의 흐름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크윽…!”
유진은 자세를 잡았다. 침식자의 촉수가 그녀를 향해 맹렬히 뻗어왔다. 빛의 속도로 몸을 비틀어 피하자, 촉수가 스쳐 지나간 자리의 책장들이 순식간에 회색빛으로 변하며 바스라졌다. 부식성 에너지.
유진은 보라색 단검을 뽑아 들었다. 단순한 금속 칼이 아니었다. 칼날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미한 빛이 주위의 어둠을 밀어냈다.
“여기서 끝낼 순 없어…!”
그녀는 침식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몸이 마치 깃털처럼 가벼웠다. 한 번의 도약으로 침식자의 머리 위에 이르자, 단검을 내리찍었다.
**쉬이이이익-!**
단검이 침식자의 검은 몸체를 가르자, 마치 기름처럼 검은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침식자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더욱 격렬하게 촉수들을 휘둘렀다. 주변의 책장들을 부수고, 바닥을 깨뜨리며 맹공을 퍼부었다.
유진은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한 촉수가 그녀의 팔을 스쳤다. 빛나는 전투복이 잠시 회색빛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이내 푸른 빛을 되찾았다. 보호막이 있었다지만, 스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에너지를 빼앗겼다.
숨이 가빠졌다. 침식자는 수가 많았다. 한 마리를 처리하는 동안, 또 다른 침식자들이 어둠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젠장…!”
유진은 주먹을 쥐었다. 손바닥에서 푸른 빛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에너지를 압축하는 감각. 그녀의 가장 강력한 공격이었다.
“분광탄!”
**콰아앙!**
압축된 빛의 구체가 침식자 무리를 향해 날아갔다. 폭발음과 함께 검은 그림자들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잠시나마 빛에 압도된 듯, 침식자들은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둠은 다시 모여들었고, 수는 줄었지만 여전히 위협적인 침식자들이 그녀를 포위했다.
유진의 다리가 휘청였다. 과도한 에너지 사용으로 몸이 지쳐갔다.
눈앞이 흐릿해졌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수많은 밤을 홀로 버텨내고, 수많은 절망 속에서 살아남았다. 겨우 이런 곳에서,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는 없었다.
어머니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유진아, 어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피어나는 법이란다.”*
어렴풋한 기억 속의 목소리가 그녀를 흔들었다.
**아니, 아직 아니야!**
유진은 이를 악물었다.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모았다. 브로치의 빛이 다시 한 번 강렬하게 타올랐다.
“광휘의 장막!”
그녀의 주위에 거대한 빛의 돔이 펼쳐졌다. 침식자들이 돔에 닿자, 부식 에너지가 빛에 흡수되는 듯 검은 몸체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거대한 빛의 방패. 그것은 방어막인 동시에, 침식자들에게는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침식자들은 빛의 장막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우왕좌왕했다. 유진은 그 틈을 타 숨을 골랐다.
그리고, 그녀는 빛의 장막을 유지한 채 눈앞에 떨어진 작은 상자를 발견했다.
누군가가 떨어뜨린 듯한 낡은 보온병이었다.
회색빛 먼지에 덮여 있었지만, 분명 생존자들이 사용하는 것이었다.
**생존자의 흔적!**
그녀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이 세상에 자신 혼자만 남은 것이 아니었다는 증거.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한 희망의 조각.
유진은 빛의 장막을 걷어내고, 남아 있던 침식자들을 향해 마지막 ‘분광탄’을 날렸다.
**콰아아앙-!**
모든 것이 사라졌다. 검은 연기조차 남지 않았다.
털썩, 주저앉았다. 브로치의 빛이 서서히 꺼지고, 그녀의 몸을 감쌌던 전투복도 사라져 낡은 옷으로 돌아왔다. 극심한 피로가 밀려왔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는 낡은 보온병이 들려 있었다. 차갑게 식은 보온병이었지만, 그것이 주는 온기는 그 어떤 따뜻한 음식보다도 더 강렬했다.
“있었어….”
세상에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 있었다는 증거. 어쩌면 이 근처에 생존자 캠프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희망.
유진은 보온병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폐허가 된 도서관의 창밖을 내다봤다.
붉게 타오르던 노을은 이미 지고, 별 하나 없는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세상은 여전히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작은 불꽃이 피어났다.
어쩌면 내일은, 이 보온병이 알려준 길을 따라, 조금 더 나은 내일을 찾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그녀는 살아남았고, 내일도 살아남을 것이다.
그것이 이 황폐한 세계에서 그녀가 가진 유일한, 그리고 가장 강력한 마법이었다.
유진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시 컨테이너로 향했다. 내일은 또 다른 여정이 시작될 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