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 지훈의 좁다란 원룸은 푸른빛으로 출렁였다. 낡은 스탠드 조명은 꺼진 지 오래, 오직 VR 헤드셋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빛만이 그의 얼굴 위로 일렁였다. 지훈은 가상현실 게임 ‘아르카나: 황혼의 그림자’의 심연에 완벽히 잠겨 있었다. 그의 아바타, ‘어둠의 심장’은 거대한 고룡의 발톱 아래에서 아슬아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젠장, 저 패턴 또 시작이냐!”
지훈의 입에서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현실에서는 고작 땀으로 축축한 의자 위였지만, 가상현실 속에서는 숨 막히는 용암 동굴 한복판이었다. 콧등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흘러내려도 지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눈앞의 적, ‘절규하는 자르콘’은 피통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자 미쳐 날뛰는 듯했다.
끼이익.
그때였다. 현실의 주방 쪽에서 희미하게 무언가 긁히는 소리가 났다. 지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낡은 건물이라 늘 나는 소리려니 했다. 옆집에서 가구를 끌었거나, 아니면 제습기가 돌아가는 소리겠지. 그는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 고룡의 맹렬한 브레스 공격을 회피하며 아슬아슬하게 카운터 스킬을 꽂아 넣었다.
결국, 길고 길었던 사투 끝에 자르콘은 거대한 몸을 떨며 쓰러졌다. “크하하! 드디어 잡았다!” 지훈은 주먹을 허공에 휘두르며 쾌재를 불렀다. 주변을 어둡게 밝히던 용암이 서서히 식고, 그 중심에 보상 상자가 떠올랐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고대 마법 구슬]
[차원의 틈새에서 흘러나온 미지의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존재만으로도 주변의 상식을 왜곡시킬 수 있습니다.]
아이템 설명이 불길했다. 보통 이런 아이템은 엄청난 성능을 가지거나, 아니면 치명적인 저주를 동반했다. 하지만 ‘어둠의 심장’은 망설임 없이 구슬을 손에 넣었다. 어차피 고인 물 게이머에게는 이런 불확실성이야말로 새로운 자극이었다.
삐그덕.
구슬을 인벤토리에 넣자마자, 이번에는 방문이 미세하게 열리는 소리가 났다. 지훈은 소스라치게 놀라 헤드셋을 벗어 던졌다. 방문은 닫혀 있었다. 밖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뭐야, 나 환청 들었나?”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헤드셋을 착용하려는데, 방 한쪽 벽에 기대어 있던 책꽂이에서 꽂혀 있던 책 한 권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쿵. 먼지가 풀썩 일었다.
“젠장, 이것도 부실 공사인가.”
책을 주워 다시 꽂아 넣으며 지훈은 중얼거렸다. 밤샘 게임으로 피곤해서 괜히 예민해진 것이리라.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다시 헤드셋을 썼다.
***
시간은 자정을 넘겨 새벽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훈은 획득한 고대 마법 구슬을 가지고 마을로 돌아와 NPC에게 감정 의뢰를 맡겼다. ‘미지의 힘’에 대한 호기심이 그의 피로를 잊게 했다.
“후우… 대체 이 구슬의 정체가 뭐지?”
구슬의 감정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지훈은 잠시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때였다.
딸랑!
작은 풍경 소리 같은 것이 그의 방에서 울렸다. 지훈은 눈을 번쩍 떴다. 방에는 풍경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이어서 희미한 냉기가 방안을 감돌았다. 분명 창문은 닫혀 있었는데도 으슬으슬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뭐야… 보일러를 안 켰나?”
아무리 한겨울이라도 보일러를 켜지 않으면 모를까, 이런 싸한 냉기는 이상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보일러를 확인하러 걸어갔다. 주방을 지나 거실로 향하는 복도.
쨍그랑!
갑자기 주방에서 접시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재빨리 주방으로 뛰어갔다. 하지만 주방은 깨끗했다. 식탁 위에는 그가 설거지하고 건조대에 놓아둔 접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게… 대체 뭐야?”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에 지훈은 휴대폰을 꺼내 손전등을 켰다. 구석구석을 비춰봤지만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그는 불안한 마음으로 거실과 현관문까지 확인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다시 VR 헤드셋을 착용하고 게임 속으로 돌아가려던 순간, 귀에 희미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찾았다…”
지훈은 헤드셋을 벗지 않은 채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분명 헤드셋 밖에서 들린 소리였다. 목소리는 낮고 쉰 듯했지만, 분명히 그의 이름을 부르는 듯했다.
“누구… 누구세요?”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침묵.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차가운 공기는 여전히 그를 감싸고 있었다. 지훈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애써 애써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했다. ‘아마 내가 너무 게임에 몰입해서 헛것을 들은 거야. 피곤해서 그래.’ 그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시 게임 화면을 응시했다. NPC가 드디어 고대 마법 구슬의 감정 결과를 알려주고 있었다.
[고대 마법 구슬: 이세계의 틈새를 열어, 미지의 존재를 현실로 불러내는 힘을 지녔다.]
“뭐… 뭐라고?”
지훈은 자신의 눈을 비볐다. ‘현실로 불러낸다’니. 게임 아이템 설명에 그런 말이 들어갈 수 있나? 그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손을 뻗어 ‘고대 마법 구슬’의 상세 정보를 다시 확인하려 했다.
그 순간, 그의 VR 헤드셋 화면이 지지직거리며 일그러졌다. 게임 속 세계가 아닌, 마치 지직거리는 옛날 TV 화면처럼 변했다. 그리고 그 화면 속에서 섬뜩한 그림자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흐읍!”
지훈은 숨을 들이켰다. 동시에 그의 방 안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헤드셋을 거칠게 벗어 던졌다.
방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컵이 바닥에 떨어져 깨져 있었고, 그의 게이밍 의자는 마치 누군가 강하게 밀친 것처럼 벽에 부딪혀 쓰러져 있었다. 벽에 걸려 있던 액자들도 전부 비뚤어져 있었고, 천장에 달려 있던 조명은 미친 듯이 깜빡거렸다.
“이… 이건…!”
지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방문 옆 벽에 길게 그어진 붉은 핏자국 같은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 흔적은 마치 무언가 긁고 지나간 것처럼 보였다.
으르렁…
낮고 굵은 소리가 그의 뒤편에서 들려왔다. 지훈은 온몸의 피가 식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그의 방 구석, 어둠이 가장 짙게 드리운 곳에서, 희미하지만 분명한 그림자가 형체를 띠고 있었다. 키가 큰 사람의 형상이었으나, 윤곽이 흐릿하고 검은 연기처럼 흔들렸다. 눈이 있었던 자리에는 붉은 두 점이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지훈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악!”
지훈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온몸의 신경이 마비된 듯했다. 그림자는 지훈의 숨통을 조여오는 듯 가까워졌다. 살려달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VR 헤드셋에 연결된 메인 전원 케이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그림자가 한 발짝 더 다가왔다. 차가운 악취가 그의 코를 찔렀다. 지훈은 눈을 질끈 감고, 더듬거리던 손으로 겨우 전원 케이블을 움켜쥐었다.
팟!
굉음과 함께 스파크가 튀었다. VR 헤드셋의 불빛이 순식간에 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림자는 마치 연기처럼 사라졌다. 깜빡이던 조명도 멈췄고, 방은 다시 고요해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훈은 한참 동안 숨을 헐떡였다. 온몸이 땀으로 축축했다. 눈을 뜨자, 방은 아까와 다름없는 난장판이었다. 깨진 컵 조각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의자는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핏자국 같은 흔적은 사라지고 없었다.
“하… 하… 하…”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악몽이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온몸에 남아 있는 식은땀과 심장의 격렬한 고동은 그 모든 것이 현실이었음을 증명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상된 VR 헤드셋을 집어 들었다. 화면은 완전히 나간 듯했다. 그는 불안한 마음으로 헤드셋을 PC에 연결하고 게임 클라이언트를 실행했다. 다행히 접속은 되었다. 그의 인벤토리를 열었다.
[고대 마법 구슬]
[이세계의 틈새를 열어, 미지의 존재를 현실로 불러내는 힘을 지녔다. 현재, 틈새가 열려 있으며 미지의 존재가 현실과 게임 사이를 오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문구가 추가되어 있었다. ‘현실과 게임 사이를 오가고 있습니다.’
지훈은 휴대폰을 꺼내 손이 떨리는 와중에도 세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세아, 큰일 났어… 내 방에… 게임이랑 연관된 것 같아…」
세아는 당연히 어리둥절한 답장을 보냈다.
「무슨 일인데? 너 밤샜어? 꿈꾼 거 아니야?」
지훈은 화면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메시지에서 다시 어지러워진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방의 어두운 구석을 노려봤다.
그림자는 사라졌지만, 지훈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아직 이곳에 있었다.
그의 아파트에, 그와 함께, 지금도 숨 쉬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제 막 시작된 것일지도 몰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