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그림자가 춤추는 지하 미궁, ‘고요의 심연’. 발밑에서 끈적이는 어둠이 기어올라 숨통을 조였다. 지척에서 들려오는 기괴한 비명은 환청인지, 아니면 정말로 희생자를 찾아 헤매는 망령의 울음소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강태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너덜거리는 벽에 몸을 기댔다. 낡은 가죽 갑옷은 이미 여기저기 찢겨 너덜거렸고, 앙상한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마른 몸은 극한의 피로에 절어 있었다. 손에 쥔 녹슨 단검은 그나마 위안이었다. 이 빌어먹을 심연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
“젠장… 이 끝이 어디야.”
툭, 낮게 읊조린 목소리가 어둠 속에 흩어졌다. 얼마나 깊이 내려왔는지, 몇 시간째 이 지옥 같은 공간을 헤매는지 기억조차 희미했다. 오직 심장을 꿰뚫는듯한 차가운 공기만이 이 모든 것이 현실임을 상기시켰다. 현실? 그래, 현실. 이 게임 속에서만큼은 모든 것이 현실보다 더 잔혹하게 느껴졌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시야 너머로,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정우현. 따스했던 미소 뒤에 숨겨진 차가운 칼날.
* * *
“태인아, 넌 너무 약해. 이젠… 더 이상 쓸모가 없어.”
그 한마디가 심장을 찢어발겼던 날의 기억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함께 밤을 새워가며 게임을 하고, 서로의 등을 지켜주며 길드를 키워왔던 날들.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산산조각 났다. 우현의 차가운 눈빛, 자신을 비웃던 길드원들의 조롱, 그리고 무참히 던져졌던 나락.
‘우현아, 난 네가 이럴 줄은 몰랐어.’
애써 손을 뻗었지만, 우현은 자신을 밀쳐내고 그들의 비웃음 속으로 사라졌다. 남겨진 것은 오직 버려졌다는 상처와 끓어오르는 배신감뿐이었다. 그날 이후, 태인은 이전의 모든 것을 버렸다. 맵의 가장 어둡고 위험한 구석을 찾아 헤매고, 누구도 선택하지 않을 ‘숨겨진 클래스’의 퀘스트를 수행했다. 약하지 않아. 아니, 약해서는 안 돼. 그 놈들이 짓밟았던 내 모든 것을 되찾고, 그보다 더한 고통을 안겨줄 때까지.
* * *
“크윽…!”
정신을 차리자 턱에 느껴지는 칼날 같은 고통이 전신을 감쌌다. 뺨을 타고 흐르는 끈적한 액체. 피였다. 어느새 무릎 꿇고 앉아있던 자신을 발견했다. 헛된 생각에 잠겨있을 시간이 없었다. 이곳은 단 한순간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는 곳이었다.
저벅, 저벅.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이내 핏빛 눈동자를 번뜩이는 거대한 촉수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곱 개의 촉수가 축축한 바닥을 기며 둔탁한 소리를 냈고, 녀석의 몸체에서는 썩은 내와 함께 끈적한 점액이 흘러내렸다. ‘심연의 포식자’. 예상했던 상대였다.
태인은 이를 악물었다. 정면승부는 불가능하다. 저 괴물은 물리 공격에 면역에 가까웠고, 마법 저항력 또한 엄청났다. 하지만, 약점은 있었다. 특정 주술적 매개체를 이용한 공격에 취약하다는 점. 그리고 그 매개체는 오직 이곳, ‘고요의 심연’ 최심부에서만 얻을 수 있었다. 지난 몇 주간 목숨을 걸고 찾아 헤맨 이유였다.
“이제 끝을 보자, 이 빌어먹을 괴물.”
그의 손이 허리춤에 매달린 작은 주머니를 더듬었다. 손안에 잡히는 것은 검붉은 색의 수정 조각. ‘어둠의 심장 파편’. 오직 세 번만 사용할 수 있는 일회성 아이템. 이것을 이용해 바닥에 주술진을 완성하고, 폭발적인 마나 역류를 일으켜야 한다. 성공 확률은 3할. 하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이곳을 통과해야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태인은 단검을 바닥에 박고 중심을 잡은 채, 왼손으로 파편을 쥐고 빠르게 주술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심연의 포식자는 그의 행동을 지켜보며 촉수를 움찔거렸다. 녀석의 붉은 눈이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촤아악!
포식자의 촉수 하나가 채찍처럼 날아와 그의 어깨를 강타했다. 쿵! 벽에 부딪힌 몸에서 뼈가 비명을 질렀다. 단검을 놓칠 뻔했지만, 태인은 이를 악물고 다시 잡았다.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바닥에 그려지는 주술진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하나, 둘, 셋… 마지막 획을 긋는 순간, 포식자의 나머지 촉수들이 번개처럼 뻗어와 그의 몸을 휘감았다. 으득,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전신을 꿰뚫었다. 공기가 억눌려 숨조차 쉴 수 없었다.
“크아악!”
그럼에도 태인은 이를 악물고 마지막 힘을 쥐어짜냈다. 얼굴에 핏줄이 솟아오르고, 눈은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의 눈앞에는 포식자의 흉측한 형상이 아닌, 비웃던 우현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죽어… 너도, 그리고… 그 놈들도!’
태인의 손아귀에서 수정 조각이 핏빛 섬광을 내뿜으며 터져 나갔다. 콰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주술진에서 뿜어져 나온 에너지가 포식자의 몸을 산산조각 냈다. 끈적한 체액이 폭발하며 사방으로 튀었고, 기괴한 비명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마나 역류로 인해 그의 몸 또한 시야가 흐려질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퀘스트: 심연의 포식자 처치 완료]
[경험치 획득]
[레어 아이템 ‘정화된 망각의 심장’ 획득]
털썩 주저앉은 태인은 간신히 몸을 지탱하며 아이템을 확인했다. 손안에 들린 것은 얼음처럼 차가운, 투명한 심장 모양의 보석이었다.
[정화된 망각의 심장 (유일 등급)]
– 사용 시 대상의 모든 기억 관련 버프 및 디버프를 일시적으로 무력화합니다.
– 쿨타임: 72시간
– 잠재력: [그림자 기록] 능력을 탐지하고 역이용할 수 있는 잠재력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태인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정화된 망각의 심장’의 효과도 놀라웠지만, 진정 그의 심장을 뛰게 한 것은 그 아래에 적힌 작은 글씨였다. ‘정우현의 [그림자 기록] 능력을 탐지하고 역이용할 수 있는 잠재력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정우현의 최강의 기술, [그림자 기록]. 상대방의 전투 패턴과 약점을 실시간으로 학습하고 기록하여 최적의 공격 방식을 찾아내는 사기적인 능력. 그 능력 덕분에 정우현은 언제나 태인의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움직였다. 그 능력을 가지고 태인을 비롯한 수많은 경쟁자들을 짓밟고 올라섰다. 그런 그의 절대적인 능력을 카운터 칠 수 있는 아이템이 드디어 제 손에 들어온 것이었다.
피로와 고통 속에서도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이제 시작이야, 우현아.”
그의 시야에 희미한 시스템 메시지가 하나 더 떴다.
[길드 ‘에덴의 장미’가 ‘북풍의 요새’ 공략에 성공했습니다!]
‘에덴의 장미’. 정우현이 속한 길드였다. 그들의 성공 소식은 태인의 심장에 얼음 조각처럼 박혔다. 기껏해야 길드의 하급 멤버였던 자신을 버리고 올라선 그들의 화려한 성공. 그들의 영광은 곧 무너질 모래성이 될 터였다.
태인의 눈은 차갑게 빛났다.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상처투성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집념은 그 어떤 어둠보다 짙었다. 발밑에 흩어진 포식자의 잔해들은 마치 그들의 미래를 예언하는 듯했다. 심연의 끝에서, 복수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