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챕터 1: 잿빛 도시의 첫 번째 그림자

회색빛 아스팔트가 갈라지고 솟아오른 콘크리트 잔해들 사이로, 녹슨 강철 뼈대가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다. 한때 하늘을 찌르던 빌딩들은 이제 거대한 이빨 빠진 유골처럼 서서,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빛바랜 폐허의 풍경을 이루었다. 지독한 산성비가 대지를 적시고 지나간 자리는 늘 질척거렸고, 썩은 흙냄새와 금속 타는 냄새가 섞인 역한 공기는 숨 쉬는 것 자체를 고역으로 만들었다. 대붕괴 이후 30년, 세상은 더 이상 인간을 위한 곳이 아니었다.

인류는 지하 깊숙한 곳이나 극단적으로 요새화된 지상 거주구에서 겨우 명맥을 잇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3구역’은 과거의 거대 연구단지를 개조해 만든 곳으로, 외벽을 겹겹이 두른 강철과 두터운 콘크리트가 외부의 모든 위협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물론, 완벽한 보호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바깥 세상의 위협만큼이나, 내부의 그림자는 언제나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강태인 씨, 오랜만입니다.”

구역장 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건조하고 낮게 깔려 있었다. 그의 굳은 표정은 제3구역의 현재 상황을 대변하는 듯했다. 태인에게는 그 얼굴에 드리운 피로와 신경쇠약의 징후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낡은 방탄 재킷의 깃을 살짝 여미며, 답답한 공기를 폐 깊숙이 들이마셨다. 지하 거주동에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폐는 아직 지상의 이 끔찍한 공기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상태였다.

“오랜만이라는 말을 들을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요, 구역장님.”

태인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마치 닳고 닳은 기계가 내는 소리 같았다. 그가 ‘감정’이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느껴본 것이 언제였는지, 본인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의 관심은 오직 ‘논리’와 ‘진실’에만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사고하는 기계’ 혹은 ‘얼어붙은 눈’이라 불렀다.

문 구역장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아니, 최악입니다.”

그들은 제3구역 내에서도 가장 철저히 통제되는 구역 중 하나인, 폐쇄된 연구동 복도를 걷고 있었다. 두터운 강철문들이 양옆으로 늘어서 있었고, 그 사이에는 오직 관리자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전자식 잠금장치들이 번뜩였다. 복도의 공기마저도 다른 곳과는 다르게 무겁고 차갑게 느껴졌다.

“한서윤 박사입니다.”

문 구역장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태인의 굳은 표정에도 미세한 파문을 일으켰다. 한서윤 박사. 제3구역의 생존을 책임지는 에너지원 개발의 핵심 인물. 그녀가 없었다면 이 거대한 지하 도시의 전력 공급도, 식량 생산 시설도 오래전에 멈췄을 것이다. 그녀는 제3구역의 ‘심장’과도 같은 존재였다.

“사망했습니다.”

태인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문 구역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어두웠지만, 그 안에는 맹렬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듯했다.

“사망이라니… 왜 저를 불렀습니까? 의료진이나 보안팀이 처리할 일 아닌가요?”

“그게… 밀실입니다.”

문 구역장은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는 당혹감과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사고가 아닙니다. 살인입니다. 그리고 범인은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문제의 강철문 앞에 섰다. 무겁고 두툼한 문은 외부에 설치된 지문 인식기와 홍채 스캔 장치를 통해 열리도록 되어 있었다. 문의 잠금 상태를 알리는 붉은 램프는 여전히 켜져 있었다.

“사건은 어젯밤 늦게 발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 박사님은 저녁 식사 후 연구실로 돌아가셨고, 오늘 아침 출근한 연구원들이 연락이 닿지 않아 문을 강제로 열었습니다. 내부 잠금장치까지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태인은 말없이 문을 응시했다. 문의 표면에는 아무런 긁힌 자국이나 파손 흔적이 없었다. 이 두꺼운 강철문을 강제로 연다면 엄청난 소음이 발생했을 것이고, 분명 보안 시스템이 즉시 작동했을 것이다.

“내부 잠금장치… 확인했습니까?”

“네. 강제로 부수고 들어간 보안팀의 보고입니다. 내부에서 걸린 잠금쇠는 바깥에서 해제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오직 안에서만 해제 가능합니다.”

태인은 턱을 살짝 문지르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이 모든 정보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연구실에 창문은 없겠죠?”

“물론입니다. 이 구역의 모든 연구실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 있습니다. 환기 시스템은 천장에 달린 작은 덕트가 전부입니다. 성인 남성이 통과할 수 없는 규격입니다.”

“환기 덕트도 확인했습니까? 혹시라도 독가스 같은 것을 주입했다거나…”

“네, 확인했습니다.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시신에는 외부의 물리적 충격 흔적도, 독극물 반응도 없었습니다. 의료팀은 ‘급성 심장마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만…” 문 구역장은 말을 흐렸다. “저희는 믿을 수 없습니다. 한 박사님은 정기 검진에서 늘 완벽하게 건강했습니다.”

태인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눈은 이미 강철문을 넘어 연구실 내부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밀실 살인. 이 끔찍한 시대에 이런 고전적인 수수께끼가 나타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흥미로웠다. 그의 얼어붙었던 심장에 작은 전율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들어가지 않습니까? 안을 봐야죠.”

문 구역장은 그의 말에 움찔했다. “아직 아무도 손대지 않았습니다. 보안팀이 최소한의 보고만 하고 봉쇄했습니다. 강태인 씨가 오시길 기다렸습니다.”

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구역에서 그만큼 기묘하고 비상식적인 사건들을 해결해온 이는 없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미 전설과도 같았다.

보안팀원 한 명이 다가와 무거운 강철문을 열었다. 둔탁한 금속음이 복도를 울렸다. 문이 열리자, 안에서는 차가운 금속 냄새와 함께 미세한 잿빛 먼지가 뿜어져 나왔다. 연구실 내부는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정면에는 각종 연구 장비들로 가득 찬 작업대가 있었고, 그 앞에는 등받이가 높은 의자가 보였다. 의자에는 한서윤 박사가 앉은 채로 미동도 없었다. 머리는 살짝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손은 작업대 위에 놓인 낡은 태블릿 PC 위에 얹혀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평온해 보였다.

태인은 문턱을 넘지 않고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은 연구실 내부를 스캔하듯 훑었다. 벽에 걸린 낡은 달력, 작업대 위의 여러 장치들, 바닥에 떨어진 펜 하나, 그리고 테이블 한구석에 놓인 컵. 어느 하나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었다.

“구역장님, 시신은 아직 만지지 않았다고 했죠?”

“네, 보안팀이 들어간 직후 모든 것을 봉쇄했습니다. 유일하게 만진 것은 박사님께 다가가 맥박을 확인한 것이 전부라고 합니다.”

태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시선은 한서윤 박사의 시신, 정확히는 그녀의 손에 얹힌 태블릿 PC에 머물렀다. 낡았지만 여전히 작동하는 듯한 그 기기는 희미한 불빛을 내고 있었다.

“어떤 작업 중이었는지, 혹시 확인했습니까?”

문 구역장은 잠시 망설였다. “보안팀이… 잠시 열어 보려 했지만, 태블릿에 암호가 걸려 있어서 실패했습니다. 중요한 정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 손대지 않았습니다.”

태인은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섰다. 그의 발걸음은 마치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그는 시신에 다가가지 않고, 방의 가장자리에서부터 천천히 모든 것을 훑어보았다. 그의 눈은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그의 눈동자는 방 안의 빛을 반사하며 무언가를 탐색하는 듯 번뜩였다.

벽, 바닥, 천장, 그리고 모든 집기들.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시선이 멈춘 한 지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작업대 구석에 놓인 작은 유리병이었다. 투명한 병 안에는 회색빛을 띠는 끈적한 액체가 절반 정도 담겨 있었다.

“이건 무엇입니까?” 태인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읽을 수 없었다.

문 구역장은 그 병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마 박사님이 실험에 쓰시던 시약 중 하나일 겁니다. 저런 것들은 늘 많았습니다.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태인의 눈은 이미 그 ‘특별하지 않은 것’에서 특별한 것을 읽어내고 있었다. 병 주위에 아주 미세한 흠집이 보였다. 마치 누군가 급하게 병을 잡았다 놓은 듯한, 지극히 작고 사소한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다시 한서윤 박사의 손가락 끝으로 향했다.

“잠깐, 저건…?”

문 구역장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태인은 이미 한서윤 박사의 손가락, 정확히는 그녀의 검지와 중지에 묻은 아주 작은,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 끈적한 얼룩을 발견했다. 병 속의 액체와 같은 회색빛이었다.

불가능해 보이는 밀실. 시신에 남은 흔적 없는 죽음. 그리고 이 평범해 보이는 병과, 그녀의 손에 남은 미세한 흔적.

태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기쁨의 미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난해한 퍼즐을 풀어낼 실마리를 발견했을 때의, 혹은 숨겨진 진실의 조각을 찾아냈을 때의 만족감에 가까웠다.

“문 구역장님, 범인은… 이 방 안에 있었습니다.”

그의 말은 복도를 울리고 있었다. 문 구역장은 충격에 휩싸인 얼굴로 태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직도 이 방 안에 있습니다.”

태인의 시선은 마치 살아있는 혼령을 꿰뚫어 보듯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톱니바퀴들이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불가능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아직 풀리지 않은 논리만이 존재할 뿐. 이 잿빛 도시에 드리운 첫 번째 그림자는, 이제 막 그 정체를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